19화
“다시.”
정식 임무가 내려온다는 소식에 아트리스는 새벽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훈련 일정을 잡았다.
그가 짠 진형은 이랬다. 본인이 선두로 나서고 왼편 첫 번째는 나디사, 오른편 첫 번째는 그리사가 맡기로 한다.
그 뒤로 시네라와 마벤이. 히아신은 나디사의 뒤를 맡았다.
“다시.”
하루하루 엄청난 양의 육고기를 먹어 치우는 라드를 관리하는 것도 체력 소모가 상당했다.
심부름꾼 다섯이 오긴 했지만 빨래와 편지 전달, 청소를 맡는 것만 해도 벅찬 터라 발톱 내부에서 정한 당번이 고기를 날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벤 로사. 높이 날 것 같으면 앞사람 뒤통수만 보고 조절하라고 했지.”
“야.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내가 여기 있겠니? 바로 저 위 부대로 갔지!”
“안 되면 연습해. 동료한테 폐 끼치지 말고.”
“하! 너나 똑바로 지시 내려.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정신이 없으니까!”
“그 지시를 정신없다고 느끼는 건 너뿐이야, 마벤 로사.”
훈련이 끝나고도 싸우는 두 사람 덕분에 노을이 더 빨간 듯했다.
두 사람을 두고 마구간으로 라드를 데려가던 시네라는 머뭇머뭇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저, 아스.”
딴생각 중이던 히아신은 저에게 말을 거는 시네라를 보며 빙긋 웃었다.
“나, 아스 아닌데.”
“어, 어?”
“맞춰 봐. 내 성이 뭔지.”
마구간을 코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했다. 당황하면 온몸이 붉어지는 시네라의 캐롯은 얼른 쉬고 싶다며 칭얼거렸다.
“모, 모르겠어. 아스 아니야?”
그리사와 나디사가 제 라드들을 넣어 놓고 나오는 길에 그 광경을 보았다.
그리사는 늘 그렇듯이 참견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지만, 상황 파악이 된 나디사는 일부러 히아신의 옆에 섰다.
“맞아.”
“마, 맞지?”
나디사는 혀를 차는 히아신을 한번 흘겨보고 빈터 쪽으로 걸어갔다.
싸움이 한창인 두 사람에게 식사하러 가자고 할 정도의 사람은 나디사뿐인 것이다.
“저, 아스. 우리가 오늘 라드들 식사 당번이거든.”
“아! 그래서 내 이름을 그렇게 수줍게 불러 준 거야?”
“응. 아, 미안. 내가 같은 방이, 아니라서, 조금, 더 친해지면…….”
“너 혼자 해.”
“어?”
히아신은 얼빠진 시네라를 버려둔 채 마구간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당했다는 걸 시네라가 마구간에 쫓아 들어갔지만, 막상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히아신에게 당당히 말할 배짱이 없었다.
“아, 아스. 그래도, 저기, 그게 혼자 들기엔 무거워서.”
분명 들을 만한 거리임에도 히아신은 딴청을 피우며 마구간 울타리를 닫아 버렸다.
쾅, 닫는 소리에 움찔 놀란 시네라의 어깨를 위로차 툭툭 두드리고선 떠나 버렸다.
개운한 걸음걸이의 히아신을 맞이한 건 마찬가지로 어수룩한 심부름꾼이었다.
왠지 그 소년이 재밌는 걸 물고 왔을 거란 감이 히아신의 뇌리를 스쳤다. 재미없는 훈련보다 더 나을 거라는 감이.
히아신은 번쩍 손을 들어 심부름꾼 소년을 불렀다.
“여기.”
“아!”
새로 배정된 심부름꾼은 모시는 이들의 얼굴을 전부 외우지 못했다.
저를 찾아 주는 부름에 화색이 돈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편지를 전해 드려야 하는데, 이게 누군지 모르겠어서.”
맑게 빛난 히아신의 눈은 가만히 편지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나디사 마로닌.
그 여자였다.
“내 거.”
“아, 그렇습니까? 네, 여기 있습니다.”
“응, 내일 봐.”
“네!”
어린 심부름꾼은 아주 뿌듯한 걸음걸이로 떠나갔다. 본인이 오배송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빨간 인장이 박힌 편지에서는 그 집만의 특이한 향기가 배어 있었다.
본의 아니게 히아신은 그녀가 편지를 뜯지 않고 보관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받자마자 서랍 행으로 가는 편지를 한두 번 목격한 게 아닌지라.
늘씬한 나무에 기대서 그 편지를 이리저리 돌려 봤다.
기지개 켜며 일어나는 봄처럼 날이 갈수록 무르익는 여자와 닮은 점이 많았다.
첫 만남부터 예외가 너무 많아, 이제는 평범한 것이 오히려 어색한 여자.
항상 웃음으로 휘어져 있던 그의 눈꼬리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때아닌 구름 떼가 몰려와 그의 얼굴에도 그늘이 졌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조용한 마구간 앞에서 히아신은 그 붉은 인장을 손톱으로 건드려 보았다.
벗겨질락 말락 하는 인장이 손톱 끝에 걸렸다. 못된 충동이 일어나려는 찰나. 쑥, 편지를 뽑아 가는 손이 있었다.
갑자기 비어 버린 손과 편지. 바람같이 등장한 나디사가 그의 앞에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놀랄 일 없을 것 같은 그녀가 숨을 색색거렸다.
“이거 내 편지인데.”
“알아.”
감정이 백지 같은 여자여서 분노 한 방울만 떨어트려도 그게 얼마나 크고 잘 보이는지 모른다.
뜯기기 직전인 인장을 본 나디사가 정색하며 발을 뒤로 뺀 순간이었다.
날렵한 몸짓의 히아신이 한발 앞서서 튀어나와 앞길을 막았다.
옆으로 가려고 하면, 그 역시 막았다. 두세 번 더 그녀의 앞길을 막자 천사여도 칼을 빼 들 수밖에 없었다.
“더 볼일이라도?”
“볼일? 그거 보고 싶어.”
“이걸?”
그래. 몸이 오그라들게 심심해서 뭐라도 부수고 상처 내고 싶었다.
오합지졸 주제에 무얼 열심히 해 보겠다고 기세가 살아난 게 꼴불견이었다.
왜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생긴 이 작은 시비가 무척이나 귀했다.
“보고 싶다고? 왜?”
“안 뜯고 있잖아. 내가 대신 뜯어서 읽어 볼까, 해서.”
“자.”
그러니 이런 전개는 그의 예상에는 없던 것이었다. 막상 자신에게 들이밀어진 편지를 본 히아신의 눈길은 방향을 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나디사는 장난을 끝내고 편지를 제 품으로 가져갔다.
“저번에 편지 읽는 거 싫어한다고 했잖아.”
승리의 미소를 지은 그녀가 히아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까 시네라에게 그가 한 행동과 똑같았다.
오늘만큼은 패배를 인정했다. 당장 그 손목을 잡아다 꺾어도 모자랄 판에 편히 가시라고 길까지 터주다니. 이 모든 것이 그의 예상 밖이라서였다.
그리고 그는 예상 밖의 일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무얼 두고 간 사람처럼 다시 돌아오는 나디사에게 섣부른 기대를 품었다. 그는 재미있는 사람에겐 후한 경향이 있었다.
“히아신. 네가 전당포 일을 하다가, 여기에 들어온 게 우연인지, 아니면 계획인지 모르겠지만.”
“응.”
“해야 할 일은 해. 네 말대로 우린 동기잖아. 네가 윗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나디사 마로닌은 똑 부러지게 할 말을 하고 갔다.
히아신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만큼 위로 올라갔다.
마침내 해를 가리고 있던 구름 떼가 물러가며 머리 위로 찬란한 햇빛이 드리웠다.
물씬 다가온 초봄을 만끽하던 히아신은 숨어 있는 시네라의 인기척을 느꼈다.
끼어들 타이밍을 놓쳐 다가오지 못한다는 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시네라.”
긴장하여 손바닥을 마주 비비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시네라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어?”
“같이 하자.”
있는 그대로 저조한 기분을 보이는 히아신이 시네라와 함께 이동했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 *
확실히 저번 달보다 생활은 전반적으로 나아지고 있었다.
바깥에서 얻어 온 듯한 식사가 아닌, 직접 고용한 요리사가 매 끼니를 식탁에 올려 줬다.
그 요리사의 실력이 견습생 수준이라는 것과 식재료 또한 위 부대에서 남은 것이 온다는 게 숙제로 남았지만.
저번 추락 사건 이후로 윗선 중 한 사람이 이것저것 보내 주는 물건들이 없는 살림에 보탬이 됐다.
대망의 정식 임무는 봄기운이 완연해진 어느 날에 도착했다.
비공식 훈련만 참여한 말단은 아랫지방 쪽에 보내지기 마련이었다.그것을 모르진 않았다.
“보호요?”
“네.”
중간 감시관 또한 변경이 되어, 예전처럼 그들을 무시하거나 하대하는 이가 오지 않는다.
감시관 역할에 맞게, 군 내부에 비리를 감시하고 윗선과의 중간 다리 역할을 맡는다.
아트리스는 수장으로서 회의에 참여해 임무 내용을 듣고 오는 길이었다.
그 내용이 거창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만 첫 임무에, 첫 외출에 들뜨지 않은 이가 있을까.
겨우 한 식구라는 느낌이 그날. 봄이 왔으니 빈터에 꽃을 심자고 한 그날. 소집 명령을 내린 아트리스가 뒷짐 진 자세로 말했다.
“첫 임무가 도착해서 모두 모이라고 한 거고.”
이런 일에 기대감이 거의 없는 마벤조차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한 채로 온 것이니. 이 열띤 침묵은 기대감에 또 다른 표현일 터였다.
“아마도…….”
하지만 아트리스의 곤란한 표정이 길어질수록 분위기는 다른 양상으로 변해 갔다.
올 것이 왔군. 다소 따스하게 느껴지는 햇볕이 지겨워질 즈음 아트리스의 입술은 고심을 끝냈다.
“외부 초소에 사는 병사의 간호, 보호를 맡았다.”
“뭐?”
“간호라고.”
제각기 한마디씩 하는데도 아트리스는 제지하지 않았다. 그의 텅 빈 눈을 보건대 이 명령이 마음에 차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새로이 온 정식 임무는 유리구슬처럼 굴러가고 있던 이들에게 돌부리를 건너라 종용했다. 간신히 잡혀 가던 마음이 이탈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마벤은 대꾸 없이 코웃음만 치다가 마구간 쪽으로 뛰어가 버렸다. 더 있다간 험한 소리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출발은 한 시간 뒤로 한다. 지도는 내가 받았어.”
아트리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린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