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둘 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라. 나디사와 아트리스는 삼십 분째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라드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러다가 해가 질 때까지 이러고 있겠다, 싶었다.
고맙다는 아트리스의 말 때문에 나디사는 지난 그의 행동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손수 수프를 끓여 오지를 않나. 마벤이 비싼 침구를 사 와서 바꾸는데 잔소리 한번 안 하지를 않나.
그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온 마벤을 봐준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행동이 고마운 자신을 향한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쑥스러워졌다.
“나디사, 너는. 좋아하는 것도 없어 보이고. 취향도 모르겠고.”
아트리스는 이 기나긴 대화를 끝내고 싶은 것처럼 뒷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한 걸음 울타리에서 물러났다.
“이름 짓는 게 곤란하면 그거라도 내가 지어 주는 걸로 보답하는 게 낫지, 싶어서.”
“보답 안 해도 돼.”
그런데 일 초 정도. 그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입술 끝에 걸렸다.
눈치 빠른 아트리스는 잠시 멈추어 서서 그녀의 말을 기다려 줬다.
“그…….”
“편하게 말해.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
“이름 말이야. 어떻게 지었어?”
물건이 아닌 게 나왔지만 아트리스는 선선히 미소를 지었다.
모처럼 지은 미소가 따사롭게 느껴져 그의 인상까지 다르게 보였다.
“부모님 이름. 한 글자씩 따서.”
답은 전부 주었다는 듯이 아트리스는 가뿐하게 마구간을 나섰다. 그의 침착한 걸음걸이를 보며 나디사는 홀로 중얼거렸다.
“부모님 이름…….”
그녀의 친모의 이름은 티사. 친부는 누군지 알 길이 없고. 그러니 그녀의 부모는 영원히 마이사와 로단이었다.
제게도 이름이 내려질 것을 알아차린 걸까. 남 앞에서는 그리도 얌전하던 라드가 그녀의 손등에 코를 콕콕 찧었다.
“마음에 안 들어도 못 바꿔.”
이곳에 와서 처음 해 보는 것 중에, 이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디사는 웃으며 라드의 코를 손등으로 꾹 밀었다.
“로마.”
* * *
“이게 다라고?”
라넌은 시가에 불을 피우며 형편없는 양의 성과를 물고 온 수하를 쳐다보았다.
“네.”
“거기서 네, 라고 하면 내가 조금 민망해지는데.”
“더 찾아보겠습니다.”
“됐어.”
요 며칠 악몽에 시달린 라넌은 시가를 물고도 잠기운이 달아나지 않았다.
골이 아파 와 엄지로 이마를 누르던 그녀는 문득 스치는 생각에 입술을 열었다.
“걔네는.”
“누구…….”
“발톱. 요즘 잠잠하다.”
“말씀하신 대로 훈련서를 읽고 알아서 본인들끼리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정찰병 보고에 따르면 외곽에서 라드들이 날아다닌다고도 하고요. 벌써 비행까지 맞췄나 봅니다.”
벌써 비행까지. 안 그래도 매캐하게 느껴진 시가의 향이 점점 싫어졌다. 라넌은 채 피우지도 않은 시가를 입에서 빼고 의자에 기대어 누웠다.
“저,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
“음.”
그래도 시가가 아까워 다시 입에 물려는 순간 그 시가 맛을 떨어트리는 말이 귀를 통과했다.
“나디사 마로닌, 말입니다. 저희가 데리고 있는 건 어떨까요.”
뜻밖의 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왜냐하면 라넌은 어느 정도 이럴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나디사 마로닌의 조종 실력을 본 이들은 모두 동의할 것이었다.
차별 금지법이 생기고, 수비교에 의해 모든 종족은 평등하다는 게 교리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 평등을 주장하는 수비교조차 사툰 종족이 아니면 신관이 되지 못한다.
이 라드군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모두가 평등하다. 그러나 그 평등의 최대 수혜자가 어떤 사고를 치고 나갔는지 아는 사람들이 라드군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그럴 리 없어. 걔는 플란 종족이니까.”
“비록 플란 종족이어도…….”
“나가서 일 봐.”
그녀의 수하는 젊은 축이었다. 심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송이는 모르는 사연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봐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가지 않고 버티고 서서 계속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후배에게 꽤 너그러운 선배인 그녀는 거칠게 담뱃재를 털었다.
“뭐 하자는 거야?”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뭐.”
“밖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요즘 나는 손님들이 싫더라. 좋은 기억이 없어서.”
손님을 빙자한, 라드군에 숟가락 얹어 보려는 어중이떠중이들. 일단 손님이라고 했으니 또 대접은 해 줘야 하는 성가신 부류들.
라넌은 천천히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 놓은 겨울 코트를 입었다.
“손님이라고 하니, 또 예의는 갖춰 줘야지.”
요사이 라드군에 찾아오는 손님은 수비교의 그 진지한 남자들밖에 없기에 라넌의 표정은 풀릴 일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내 차에는 술 좀 섞어서 내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떠나는 수하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녀의 지시는 진심이었다.
코트 단추를 잠근 라넌은 들어오는 발소리를 애써 모른 척했다. 그녀 나름대로의 반항이자 맞이하기 싫다는 표현이었다.
발걸음 소리는 집무실 소파 근처에서 멎었다. 이윽고 삭막한 집무실 분위기를 바꾸어 줄 목소리가 들렸다.
“햇볕 앞에 있으시니 참 아름다우세요.”
고운 미성의 목소리를 들은 라넌의 고개가 돌아갔다. 신관은 신관이라서 싫어하지만, 그녀도 어쨌든 여자인지라.
“이게 누구십니까. 란.”
잘 생기고, 한창 여인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남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동갑내기들은 죄 자식 가진 아저씨들이 된 반면 이처럼 수비교에 입문하고 싶어지는 화사한 외모는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전혀 그녀를 찾아올 접점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수비교의 축복이라고 불리며, 차세대 첫 번째 신관 자리가 낙점된 란은 그야말로 신전의 왕자님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첫 번째 신관이 제 후계자로 싸고도는 것에 반해 란의 충심은 다른 곳을 향하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요.”
“왕성과 가까워,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렸습니다.”
제 외모가 먹히는 것을 알고 눈까지 접으며 웃는 란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사이 그녀의 수하가 뜨거운 차를 가져왔다.
“드세요.”
술을 넣지 않은 밋밋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라넌은 감 없는 수하를 속으로 맹렬히 비난했다.
“얼마 전.”
슬쩍 훑어보니 란은 찻잔에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군에서 나오는 차가 맛있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저렇게 대놓고 천대할 정도는 아닌데.
신전에서 귀하게 자란 란의 입맛 때문에 언짢아진 라넌은 똑같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네. 얼마 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네.”
“두 번째 신관께서 축복을 내려 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얼마 전이면, 꽤 얼마 전인데요.”
“어느 부대인가요.”
“아……. 이미 알고 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라넌의 말에 미소를 지운 란이 신사적으로 찻잔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마시진 않고 향만 마시는 모습이 사람 속을 긁기로 작정한 듯했다.
오랜만에 훈훈한 남자와 차 한 잔 마시나 했더니. 안 본 새에 그 풋풋하던 청년도 신전의 사람이 다 됐다.
라넌은 찻잔 손잡이만 매만졌다.
“사실 말이죠.”
“네에. 말씀하시죠, 란.”
“라넌 경께 전할 말이 있어서 왔는걸요.”
그 지위에 뻐꾸기 노릇을 할 것도 아니고. 감히 신전의 왕자를 움직이게 한 이가 누구려나.
그딴 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신관께서 또, 뭐라고 충고해 주실 게 있으신가 봅니다.”
“충고라기보단. 종종 궁금해하셔서요.”
제가 충심을 바치고 있는 자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란은 햇살 같던 껍질을 벗었다.
“뭐가 궁금하시답니까. 왜. 전처럼 오시지 않고.”
“임무는 나가는지. 요즘은 별일 없는지. 말씀하시기론 축복을 내리신 게 처음이라 각별하시다는데.”
각별을 넘어 개인적인 사견을 붙이자면, 집착 정도였다. 그 정도 위치의 신관이 일개 부대에게 갖는 관심의 정도가 심했다.
도대체 왜지.
“축복 내리신 게 한두 번도 아닐 텐데.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궁금하시다면. 별일 없고, 임무는 곧 나가고. 그게 내가 아는 전부입니다.”
“그런데요. 라넌 경.”
급격히 얼어붙은 분위기에 안 그래도 맛없는 차가 식어 가는 걸 느꼈다. 이 남자. 명성에 비해 힘 조절이 미숙했다.
라넌은 표정 한번 굳히지 않았다. 막 청년의 문턱을 넘고 있는 아름다운 신관에게 질문했다.
“궁금해서요. 나디사 마로닌이 누구인지.”
따사로운 것만 담아야 할 그 입술에서 나온 이름에 라넌은 표정을 달리했다.
그 이름이 요 며칠 꾸는 악몽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얼굴만 같고 이름은 다른 여자지만.
그 둘이 구분 안 되는 건 제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이름은 왜.”
과연 수비교의 첫 번째 신관의 안목다웠다. 란은 제가 존경하는 두 번째 신관보다 그를 닮아 있었다.
“거슬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