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본거지에 있는 합숙소는 모르겠지만, 외곽에 따로 떨어져 있는 이 성탑 내 합숙소는 협소하고 낡았다.
여자 숙사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사람 둘이 쓰기엔 비좁은 방에 침대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분명 처음엔 그랬다. 갑자기 들이닥친 남자들이 화장대, 옷장, 안장에 거치대까지 놓고 난 후부턴 발 디딜 틈도 없어졌다. 전부 마벤의 사가에서 들여온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부족하다고 비죽거리는 마벤의 입술은 더하면 더했지, 이 상황을 물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더 놓을 곳도 없어 보이는 방에 벨벳 소파니 캐노피니 뭐니 하며 계획을 짜느라 바빴다.
하지만 마벤과 이 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간 다툼으로 번질 게 뻔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굉장히, 아주, 나디사에게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침구류 새것으로 다시 바꿀 거라, 사람 들를 거니까 문 닫고 가지 마.”
외곽이라 비교적 출입이 자유로워 바깥사람이 자주 들락날락했다.
아침 일찍 씻고 와 머리가 덜 마른 나디사는 단추를 잠그다가 말고 한숨이 나왔다.
“왜 한숨 쉬어?”
“모르는 사람 드는 게 싫어서.”
“내가 아는 사람이야.”
“나는 모르잖아.”
“네가 알 필요 없지? 네 물건 나르는 것도 아닌데.”
군복을 채 갈아입지도 않고 누워 있는 마벤을 보다가, 먼지가 폴폴 날리게 이불을 풀썩거렸다.
“마로닌. 좀 살살 할래?”
그녀가 유독 더 삐뚤어진 이유를 알고 있는 나디사는 이불 털기를 멈출 수 없었다.
아무리 감정이 무디다지만 억울한 것은 억울한 것이었다.
“아, 진짜, 저 고자질쟁이가.”
“안 했어.”
“했잖아.”
“안 했다고.”
“했어.”
“안 했어.”
“했어!”
“안 했어.”
나디사와 마벤은 이 일로 벌써 일주일 넘게 다투는 중이었다. 작게는 말싸움부터 크게는 이렇게 유치한 일까지 저지르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를 감싸려고 했던 나디사의 입장에선 이만큼 억울할 일도 없었다.
며칠 전 마구간은 장정 여섯이 달려든 덕에 정해 둔 기일보다 빨리 복구할 수 있었다. 거기엔 아트리스의 마구간 설계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마벤 로사는 자주 농땡이 피운다는 이유로 아트리스에게 일대일 감시를 당했다. 한눈팔면 자빠져 자서 안 된다며 심하게 다그치긴 했었다.
마벤은 본인이 잠들었다는 사실을 나디사가 일러바쳤다고 오해하는 중이었다.
이젠 이판사판이었다. 이불을 터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마로닌!”
포호 같은 비명을 지르며 마벤이 일어남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지 마!”
“네.”
나디사와 마벤의 상반되는 대답에 주춤하던 상대는 문을 반만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그리사 데이. 같은 플란 종족의 그는 본래 나이보다 앳돼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성년이 아닌지라 경어를 쓰는 게 편하다는 그의 말이 얼핏 떠올랐다.
“아트리스가 휴게실로 모이라고 해서요. 회의할 게 있다고.”
“알겠어.”
걸어가 옷장을 여는 마벤의 손길에 신경질이 배어 있었다.
군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하는 그녀를 배려해 나디사는 나가면서 방문을 꼭 닫아 주었다.
며칠째 이어진 신경전 때문에 종일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한 칸 밑 계단에 내려간 그녀의 뒤로 그림자가 지기 전까지.
“저기요.”
먼저 간 줄 알았던 그리사 데이가 벽에 기대 있었다.
총명한 보라색의 눈은 돌 틈 사이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에 얼어 버린 듯 차가웠다.
“……뭐 할 말이라도.”
“네.”
그리사는 그녀에게 볼일이 있는 사람처럼 몸을 들어 계단으로 내려왔다.
좁디좁은 나선 모양의 계단을 밟는 걸음은 저를 따라오라는 것처럼 느긋했다.
조용하고 진중한 성격을 가진 그리사 데이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주어진 일을 군소리 없이 해냈다. 마구간을 지을 때 손이 덜 간 것도 그 덕분이었다.
다정한 사람인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적어도 이 발톱 내에서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쪽은 아니었다.
그런데 잘 나가던 그리사가 계단 중반에 멈추어 섰다. 하필 작은 창으로 들어온 겨울 볕이 그의 머리 위에 앉고 마는 자리였다.
정작 뒤로 고개를 돌린 그리사는 눈이 부시지 않은 양 평온한 낯으로 질문했지만.
“물어볼 게 있어서요.”
“응.”
같은 플란 종족임에도 그의 제비꽃색 눈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보통 우리 종족은 수나타에 사는데. 왜 당신은 샤포드에서 살았죠?”
얼마 전 샤포드에서 왔다고 말했을 때 그에게 같은 질문을 받았었다.
당시엔 미소로 얼버무렸으나 그 얼버무림이 그의 의문을 꺼트리진 못했나 보다.
“이모가 그리로 이사 가셔서.”
“이름은요? 어떻게 되는데요.”
뿌연 먼지가 떠다니는 성탑 계단에 불편한 침묵이 내려왔다. 나디사는 그의 시선을 피하듯 눈을 내리감았다.
“그걸 내가 말할…….”
“말할 이유는 없죠. 그런데 혹시나 해서요.”
혹시나, 라는 그의 날 선 말을 담담히 받았다.
“어떤 혹시나.”
“수비타에서 우리 종족을 합류시킬 때, 절대 뚫릴 일 없던 방어벽이 뚫린 이유가 몇몇 배신자 때문이라고. 그 때문에 수많은 우리 종족이 죽었고, 그 배신자들은 두 번 다시 수나타로 들어오지 못하죠.”
“…….”
“그 혹시나요.”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그리사의 주먹이 어른 남자 못지않았다.
소수 종족이 소수가 된 건, 수비타 왕국의 무리한 영토 확장과 그에 따른 학살 때문도 있었다.
지금이야 세월이 지나서 다들 수비타 왕국의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였지만, 그 학살의 기억이 생생한 종족일수록 대대로 뼛속 깊은 아픔을 물려받았다.
샤포드에서 살게 된 건 아마도 그녀의 친모 때문일 터다. 마로닌 부부는 도통 그녀에게 설명하는 법이 없다만 고향을 떠나서 그 척박한 땅에 사는 건 그러한 이유밖에 없다.
“이러면 의심이 의심이 아니죠. 대답도 못 하고.”
“그건…….”
어깨에 묵직하게 휘감기는 팔뚝이 나디사의 말을 막았다. 낯선 손끝은 내려와 가냘픈 쇄골에 걸쳐졌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해? 삭막하다.”
결 좋은 은발이 그녀의 머리통에 기대고 있었다.
그가 뿌리는 향수의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냄새는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요. 휴게실로 가야 해요.”
그리사는 그의 말에 동요하지 않고 마저 계단을 내려갔다. 사라지는 단정한 망토를 보며 나디사는 피로에 시달렸다.
어째서 친모가 죽었는지, 저를 키워 준 마로닌 부부가 숨기고 있는 게 무언지도 모르는데. 이제는 생판 모르는 동족의 혐오까지 받게 생겼구나.
그리고 하나 더. 안 그래도 버거운 이 남자는 왜 자꾸만 무게를 실어 오는 걸까.
“분위기 망쳐 줘서 고마운데. 무거워.”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바람 같은 남자인데.”
“미안하지만 남들한테 미쳤다는 소리 많이 듣지?”
“그걸 그렇게 다정하게 얘기해 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인걸? 디디.”
나디사는 저번부터 말도 안 되는 애칭을 하고 있는 그에게서 몸을 흔들며 떨어졌다. 계단을 한 칸 더 내려가 뒤를 홱 보았다.
막 자고 일어난 것 같은 싱그러운 얼굴로 기지개를 켜는 히아신이 있었다.
나디사는 그의 향수 냄새가 남은 목을 긁으며 말했다.
“왜 디디라고 부르는지.”
“애, 칭.”
윙크를 날리는 그를 보고 미미한 현기증이 일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벼운 남자와의 대화 덕분에 머릿속 자리 잡고 있던 고민도 날아갈 듯했다.
나디사는 그에게 가진 마음마저 가벼워지기 전에 등을 돌렸다.
군화에 밟히는 돌계단 소리가 두 사람분으로 늘어났을 때 히아신은 콧노래를 불렀다.
휴게실로 가는 내내 이어진 그의 콧노래는 경쾌하고 밝았다.
마음의 그늘과 상관없이 작은 돌벽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과 잘 어울리는 노랫소리였다.
* * *
뒤늦게 도착한 휴게실은 장작불이 꺼져 있어 겨울 길바닥과 다를 바 없었다. 차라리 볕이 드는 바깥이 따듯할 지경이었다.
마벤을 제외한 전원이 모두 모였다. 마벤이 감기를 핑계로 참석하지 않은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아트리스의 표정은 꺼진 장작불보다 삭막했다.
시네라는 그런 아트리스의 눈치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리사는 멍하니 꺼진 장작불을 보고 있었고, 유일하게 히아신만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제 손톱을 보는 중이었다.
“왜 모이자고 했습니까?”
전보다 훨씬 차분하고 싸늘해진 그리사가 물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아트리스의 눈이 생기를 되찾았다.
“내일부터 심부름꾼이 온다고 해. 방 안 청소나 편지 심부름 같은 건 그이한테 맡기면 될 거고.”
“와.”
짝짝짝, 히아신의 의미 없는 박수 소리가 야유처럼 퍼졌다.
그에 아트리스는 미간을 찌푸리긴 했으나 평정을 잃진 않았다. 진짜 하고픈 말은 따로 있는 듯했다.
“그리고 너희를 불러 모은 이유인데.”
히아신은 질질 끄는 말을 듣는 게 힘든 것처럼 말이 끝날 때가 돼서는 거의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뻗친 은발이 누울 자리를 찾듯 비비적거렸다.
“바로 위 부대인 무릎은 벌써 라드를 받고 훈련에 들어갔다고 해.”
“라드를요?”
관심이 있는 사항이 나오자 그리사가 적극적으로 나왔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준다는 건가요.”
“기약 없어. 감시관을 보내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아트리스의 건조한 말은 꽤 절망적이었다.
라드군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라드 지급을 미루고 있었다. 당연히 고의적이었다.
임무 없이 외곽에 배치해 두는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비싼 돈을 들여 마련해 둔 안장은 삭기 직전이었다.
“임무에 배제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라드군인데 라드를 주지 않는다는 건 항의해야 해요.”
“그래서 말인데. 그 항의라는 것 말이야.”
스산하게 눈을 번뜩인 아트리스는 간단명료한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 하러 갈 건데, 한 사람 더 나랑 같이 가 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