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잠자코 서서 그의 인사를 받아 줄 상황이 아니었다.
다행히 마구간 주변에는 사람이 없지만, 언제 누가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히아신은 아까 그녀가 놓아준 나뭇잎을 손에 들고 조롱하듯 흔들었다.
새삼 누워 있을 때는 몰랐던 그의 흐트러진 군복이 눈에 들어왔다.
다부진 근육을 숨기지 못하고 툭툭 푼 단추나 제대로 묶지 않은 망토 자락이나. 길게 뻗은 다리를 감싼 하얀 바지는 밑단이 접혀 있었다.
단언컨대 군인의 외양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디사는 전혀 군인답지 않은 그를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뜨끔거렸다.
발이 트도록 걸어가서 도착한 롯소의 거리와 정체 모를 전당포의 주인, 피 냄새.
그처럼 흉흉한 단어의 주인이 항상 벙글거리며 웃고 있다는 게, 심지어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군다는 게 나디사를 말문 막히게 하는 대목이었다.
지금도 그는 그녀가 준 나뭇잎을 눈에 대는 시늉을 하며 아이처럼 웃었다.
무엇부터 물어야 좋을지, 무엇부터 따져야 좋을지, 그 웃음 앞에만 서면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라드군에는 나 때문에 온 겁니까? 아니지.”
존대는 할 필요 없다고 본인 입으로, 직접 그랬다. 채무 관계 때문에 차려 주던 예의를 제 발로 걷어찬 셈이었다.
“설마 나를 빠른 시일 내에 죽이고, 내 시신을 가져가려고 여기 잠입한 건가?”
“와아. 하하!”
무슨 이야기를 하나 궁금하다는 듯이 눈에 나뭇잎을 댄 채로 기다려 준 히아신은 큰 웃음을 돌려줬다.
어찌나 웃어 대는지. 나디사는 자신이 농담을 한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디디! 세상에. 나 한 5년 만에 이렇게 크게 웃어 봐! 와!”
“당신은…….”
“당연히 아니지! 그리고 그렇게 건조한 질문으로 자기를 죽일 거냐고 묻다니!”
“…….”
“진짜 죽이고 싶어지잖아?”
나디사는 도망치고 싶어질 뻔했으나 그래 봤자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히아신의 길고 경쾌한 웃음은 기어코 눈꼬리 끝에 눈물이 맺히고 나서야 끝이 났다.
히아신은 웃지 않고 있는 나디사를 뒤늦게 발견한 것처럼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흐, 아니야, 아니야. 나는 네가 죽길 바라지 않아.”
“그것참 안 믿기는 말이라.”
“그래, 맞아! 나한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 봐.”
나디사는 들고 있는 나뭇조각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만큼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그래서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했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나는, 네가, 여기, 있을 줄, 몰랐어!”
무슨 대단한 진실을 말해 주는 양 말을 할 때마다 한 칸씩 앞으로 오는 그의 얼굴이 부담스러웠다.
반짝 빛나는 그의 녹색 눈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내 입이 근질거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아서. 우리 동기잖아. 잘 지내야 되는데? 그렇지? 게다가 나는 여기에 있는 신사 숙녀 중에 네가 제일 좋아.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해.”
“나는 여기 있는 신사 숙녀 중에 당신이 가장 의심스러운 상황이고요. 아니, 상황이고.”
“괜찮아. 나는 의심 받는 거 좋아해.”
처음 말하려던 것은 이게 아닌데. 아니, 이 사람과 이렇게, 이 장소에서 말을 나누려던 것은 아닌데.
안 그래도 말주변이 없는 나디사는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나뭇잎처럼 정신이 없었다.
히아신은 이제 됐냐는 듯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날도 그랬다. 말 몇 마디를 나누고 금화를 빌려준 날도 그는 악수를 청했다.
나디사는 그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보다시피 손이 없어요. 아니, 없어.”
“아, 이런. 아쉽다. 악수하는 거 좋아하는데.”
히아신은 볼일이 그게 다였다는 듯이 몸을 가뿐하게 돌렸다.
마구간에서 멀어지는 그의 푸른 망토가 사선으로 삐뚤어져 있었다. 반대로 매단 모양이다.
악수를 요청한 사람보다 거절한 사람이 황당한 차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싶으면서도 나디사는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싫어할 수 없었다.
수상쩍다는 건 만인이 동의할 테지만. 자신에게 어떠한 위해를 가한 적도 없고, 그 큰 금액을 빌려준 대가를 원한 적도 없고.
정말 이 만남이 우연이라고 생각될 만큼 돈에 관해 담백하게 굴고 있는 전당포 주인. 딱 하나. 그가 요구한 것이 생각났다.
나디사는 떠나는 그에게 양심상 한 마디를 건넸다.
“그 여자.”
마구간을 빠져나가던 히아신은 저에게 하는 말인 것을 용케 알아들었다.
멈춰 서 고개를 돌린 그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눈썹을 위로 올렸다.
“언젠가 나한테 저 여자야, 하면 죽여 주면 된다면서. 그 여자는 나타났나, 싶어서.”
아, 하면서 작게 입을 벌린 히아신은 이번엔 웃지 않았다. 입술을 다물지 못하던 그가 어렵게 혀끝을 굴렸다.
“아직.”
“……그럼 됐어. 나한테 돈 갚으란 말도 안 하는데. 그건 꼭 해 달라고 한 게 기억나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히아신은 달라진 태도로 나디사를 대했다.
그의 웃음이 사라진 눈빛, 입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힘들었다.
한 걸음만 더 나가면 빈터로 나갈 수 있음에도 그는 뒤를 택했다. 온전히 뒤돌아선 그의 머리 위로 부는 바람조차 눈치 보듯 약하게 지나치고 있었다.
“그걸 기억했어?”
다 지난 이야기를 기억하는 게 기특하다는 투였다.
히아신은 이걸 어떻게 삶아서 죽여야 좋을까, 싶은 표정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그건 말이지…….”
“여기서 농땡이 피우고 있었나.”
마구간 길에 버려진 먼지가 빈터 방향으로 날아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아트리스는 삐딱한 자세로 그 먼지를 맞았다.
차가운 눈으로 두 명을 쏘아보는 그의 손에 두꺼운 교리 책이 들려 있었다.
역시 몰래 돌려놓기를 잘했지.
나디사는 방금의 대화를 모른다는 얼굴로 손에 든 울타리 조각을 들여 보였다.
“쓰레기 치우고 있었습니다. 아니, 있었어.”
“나는 이거 도와주고 있었는데? 안 놀았는데?”
웃으며 말을 마친 히아신은 가벼운 손 키스를 날린 뒤 아트리스의 옆을 지나쳤다.
히아신이 빈터로 떠날 때까지 자세에 변함이 없던 아트리스의 눈가가 실룩 움직였다.
무거운 정적 속에 묻혀 있던 나디사는 일단 나뭇조각부터 치우자 싶어 허리를 숙였다.
“히아신 아스하고는 전부터 알던 사이였나?”
흔들림 없는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꽂혔다. 거짓을 잡아내듯이 옭아매는 바람 아래서 나디사는 숨죽이고 있었다.
“사툰은 사툰끼리, 팃은 팃끼리, 플란은 플란끼리 어울리지. 히아신 아스는 플란 종족이 아닌데도 너를 꽤 잘 아는 것처럼 구는데.”
건조한 물음 끝에는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날카로움이 섞여 있었다. 능청스러움과 거리가 먼 나디사는 느릿느릿 입술을 깨물었다.
“……알면 안 돼?”
조금쯤 아트리스의 냉정한 얼굴에 금이 갔다. 당황함에 흔들리는 아트리스의 금색 눈동자는 이내 냉정함을 되찾았다.
“아니. 그저 궁금해서.”
“그냥…… 이거 다 옮기고, 나도 도와주러 갈게.”
그가 발톱의 수장이 됐다고 하더라도 사적인 부분까지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더욱이 같은 동기를 예전부터 알았다는 게 큰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비록 그를 만나게 된 경위는 떳떳하다고는 할 수 없다만. 그조차 군에 들어오기 위해 금화를 빌린 것이니, 말만 늘어놓고 보자면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다만 혹시 모를 훗날을 생각해 그간의 사정을 다 알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디사는 모르는 척하며 바깥에 울타리 조각을 쌓아 버렸다. 작은 탑이 된 나무 조각을 바라보던 아트리스는 그만 발을 떼려 했다.
“그나저나.”
그러나 완전히 떼지지 않는 검은 구두가 빙글 돌아서 나디사를 향해 섰다.
“마벤 로사는 어디에 있지? 왜 너 혼자 일하고 있어.”
“안에…….”
마구간서 자고 있다고 말하면 저 냉혹한 남자가 마벤과 또 싸울 것이 분명하기에. 나디사는 허리를 펴며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청소하고 있어.”
“그래?”
“응.”
그러나 그렇게 떠날 줄 알았던 것은, 그녀가 아트리스 메놈에 대해 얕보았던 것이었다.
아트리스는 지체 없이 걸어와 나디사의 앞까지 왔다. 멀리에 있던 이가 이렇게 확 다가올 줄은 몰라 뒷걸음질을 쳤다.
가까워진 그에게서 향긋한 과일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이 상황에서 이런 유의 향기를 풍기리라곤 상상 못 한 나디사는 약간 놀라고 말았다.
“비켜 봐.”
아트리스는 일말의 주저함 없는 손길로 마구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의 얕은수 따위는 먹히지 않는다는 듯이 그 걸음이 어찌나 거침없는지.
마구간 앞에 보초처럼 서 있던 나디사는 헛웃음을 흘리며 따라 들어갔다.
역시나. 아트리스는 누워서 자고 있는 마벤을 찾아내곤 팔짱을 꼈다.
“마벤 로사.”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마구간에 떨어졌다.
듣는 이의 가슴이 시리게 만드는 목소리에 마벤의 잠도 달아난 모양이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난 마벤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잔 거야, 잠깐!”
“너에게 누가 잠깐을 허락했지? 이왕 잠깐 잔 것, 이 일도 잠깐만 하고 관두지 그래. 적성에 안 맞아 보이는데.”
“뭐? 네가 뭔데…….”
예상한 그대로의 싸움이 벌어졌다. 개구리처럼 튀어 올라 아트리스에게 삿대질하는 마벤을 보자마자 나디사는 천천히 마구간을 빠져나와 문간에 섰다.
라드군을 너무 단순하고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인가.
마구간 안에서 오고 가는 욕설을 들으며 나디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시선을 뒀다.
왜 이리 쉽게 가는 일이 없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