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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5화 (5/210)

5화

샤포드를 떠나는 그녀의 걸음은 철근을 단 것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안개에서 벗어난 해가 제 역할을 할 즈음엔 그녀의 발소리도 샤포드를 떠나 있었다.

사방이 설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겨울이 오면 매년 얼어 죽는 사람이 나오는 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다 보니 나디사는 따듯한 지역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땀을 흘리며 깨어난 그녀는 눈을 끔뻑거렸다.

마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어 눈살을 찌푸렸다.

어지러이 흔들리는 마차 때문에 멀미가 나기 직전임을 알았는지 내내 조용하던 마부가 입을 열었다.

“다 왔어. 아가씨가 준 돈 덕분에 검문소는 빠르게 통과했어도 길이 많이 밀려서 그래.”

나디사는 자세를 고쳐 앉고서 주먹으로 마차 안을 세게 쳤다.

“내려 주세요.”

이름만 마차일 뿐이지 사실상 수레나 다름없었다.

샤포드에서 멀쩡한 마차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말이 끄는 짐수레를 예의상 마차라고 불렀다. 당연 승차감은 최악이었다.

사흘간의 여정을 끝내고 마차는 목적지 앞에서 멈추어 섰다.

나디사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누르며 직접 문을 열고 내렸다.

미리 삯을 치른 마차는 손님이 내리자마자 자갈길 건너로 넘어갔다.

짐을 옆구리에 끼고 샛길을 벗어나 번화한 거리로 들어섰다.

서둘러 가면 약속된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들어갈 수 있을 듯싶었다.

질서 있게 돌아다니는 마차들 건너편에 목적지가 있었다. 나디사는 마차가 사라지는 때를 기다리며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도란도란한 말소리, 활기 띤 웃음소리,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느긋한 오후를 즐기는 신사들. 빵이 담긴 누런 봉투를 안고서 바쁘게 걸어가는 여인들.

부유한 수비타 왕국의 사람들은 얼굴에 그늘이 없었다. 그들 모두가 금발에, 금안이라는 점은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금색 물결 한가운데에 표류해 있는 나디사는 이 거리에서 튀고 있었다.

검은 머리를 한 그녀의 낡은 웃옷을 보며 코를 싸쥐고 가는 이도 있었다.

사람을 태우고 떠나는 마차의 행렬이 멎자 나디사는 앞으로 뛰었다.

푸른 지붕이 있는 공관은 샤포드에서 보기 드문 4층 건물이었다.

횃불을 켜 둔 철장 문 앞으로 가 구겨진 편지를 꺼냈다.

낯선 방문자가 철장 문 앞에서 얼쩡거리니 허리에 검을 찬 남자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권태로워 보이는 군인은 나디사의 행색을 눈으로 쭉 훑었다. 별다른 대꾸 없이 편지를 보였다.

“아, 신병이시군요.”

곧바로 남자는 미소 비슷한 것을 얼굴에 띄웠으나 철장 문을 열면서도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인장이 확실한 편지를 두세 번 확인하는 태도가 그 증거였다.

“들어가시면 가장 작은 건물이 보일 겁니다. 다른 분들은 먼저 와 계십니다. 조금 늦으신 편이라서요.”

“네.”

깍듯이 말하지만 눈빛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예의 바른 편이지.

나디사는 챙겨 온 상자를 안고 철장 문 안으로 들어섰다.

나뭇가지가 벽으로 뻗도록 내버려 둔 공관 내부는 소박한 듯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앞에 보초 선 감시관들의 무심한 눈빛이 나디사를 지나쳤다.

네까짓 게 함부로 올 장소가 아니라는 듯한 무언의 압박을 견디며 다른 공관보다 크기가 월등히 작은 합숙소에 도착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내인도 없으며, 감시관은 남 일인 양 멀리서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합숙소 앞에 네 명의 사람이 있었다. 계단에 걸터앉아 있거나, 나무 앞에 서 있거나, 아니면 단지 누워 있거나.

딱 보아도 서로 초면인 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어.”

남자 셋에 여자 하나. 그중 누워 있던 여자가 멀찍이 선 나디사를 발견하고 알은체를 했다.

“왔나 본데. 마지막.”

여자의 말에 남자 셋이 나디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 갈색 머리, 주황 머리. 라드군의 다수가 사툰 종족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사툰 종족으로 보이는 사람은 저 여자 하나뿐이었다.

“신입?”

유일하게 말을 걸어 준 건 갈색 머리의 남자였다. 선뜻 다가서기 힘든 인상만큼이나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이쪽으로 와. 인사나 하지.”

나디사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그들에게로 다가섰지만, 무리 중에 환영의 인사를 건네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얘도 사툰이 아니네. 뭐야, 역시 오합지졸이 맞잖아.”

여자는 금발을 하나로 묶으며 비웃듯이 말했다.

이 복잡한 상황에서 갈색 머리의 남자만이 나디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트리스 메놈. 같은 동기. 아트리스라고 불러.”

고조 없는 목소리와 무심한 눈동자. 갈색 머리에 금안인 그는 아트리스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그와 손을 마주 잡고 간단한 악수를 마친 나디사는 짧게 제 소개를 했다.

“나디사 마로닌입니다. 플란 종족이고, 나이는 스물이에요.”

계단 앞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도 플란 종족입니다. 그리사 데이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적당히 예를 갖춰 인사하고 있지만 그의 눈은 이 상황을 지루해하고 있었다.

한 명씩 자기소개하는 분위기가 되자, 구석에 숨어 있던 주황 머리 남자도 소심하게 나섰다.

“시네라 칸이에요. 종족은 팃이고, 저는, 그, 군인은 처음이에요.”

그러나 그 작은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금발의 여자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여기 군인 두 번 하는 사람도 있나? 나는 로사 가문의 마벤이야. 보다시피 사툰이고.”

자리에 모인 모두가 한 명씩 인사를 마쳤다. 그러나 어색한 소개가 끝나자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서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올해 합격한 신입 모임답지 않게 삭막한 분위기만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문득 군복으로 갈아입은 신입을 보며 나디사는 제 꼴을 돌아봤다. 사복 차림은 저 혼자뿐이었다.

개중 그나마 사교성이 있어 보이는 아트리스에게 다가가 질문했다.

“어디서 갈아입는 겁니까?”

팔짱을 끼고 주위를 살펴보던 아트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저기. 그런데 사람이 있어.”

“맞아. 누가 자고 있더라. 걔도 신입 아니야?”

“내버려 둬. 알아서 하겠지.”

“아트리스인지 아트리사인지. 너 조금 매정하다.”

대화인지 다툼인지 모를 이야기에서 나디사는 한 발 빠졌다. 상자를 들고 합숙소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커다란 나무의 마른 가지가 드리운 작은 문. 그 문을 열자마자 1인용 침대 위에 누운 남자가 있었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남자는 키가 커서 침대 밖으로 다리가 빠져나와 있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그를 깨워야 하는 건지, 아니면 자고 있는 틈을 타서 얼른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건지.

잠시 고민하던 나디사는 남자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 옷을 벗었다.

웃옷의 단추를 채우고 있는데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흘끔 돌아본 나디사는 두 팔을 만세하고 자는 남자의 은발 때문에 잠시 멈칫했다.

그 남자 머리칼과 비슷했다. 막대한 금화를 빌려준 전당포의 주인과.

얼굴이 가려진 남자를 바라보며 마지막 망토까지 꺼내어 달고 있을 때 잠긴 문이 덜커덩거렸다.

‘아직 준비는 멀었나.’

본인을 감시관이라고 밝힌 남자는 정확히 1분 뒤에 설명을 시작한다고 했다.

시간이 없어 푸른 망토를 어설프게 묶고 문밖으로 나섰다.

“다 됐습니다.”

검은 군복을 입고 있는 감시관의 시선은 시계에 가 있었다.

“밑으로 내려가.”

일렬로 서 있는 동기들을 본 나디사는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계단 끝에 올라서 있는 감시관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모인 건가?”

“합숙소 안에 한 사람 더 있습니다.”

“그래?”

그러나 감시관은 눈으로 합숙소 안을 훑을 뿐, 들어가 그를 깨우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감시관은 이내 시선을 돌려 자리에 모인 신입들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입문식이 있다. 수비교에서 온 신관과 왕자님이 참석하실 거다. 가만히 지시 사항에 따르면 되기에 특별히 주의할 사항은 없지만, 너희는 다른 신입들과 다르게 입문식을 따로 열 거다.”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 없어 한 귀로 흘려듣고 있던 나디사는 친절치 못한 감시관과 눈이 마주쳤다.

“소속된 곳이 어딘지는 내일 알게 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너희는 미리 알려 주라는 상부에 지시가 있었다.”

소름 끼치게 조용한 눈길들이 감시관을 올려다봤다.

“너희들은 라드의 발톱이다. 망토에, 이 배지를 달면 돼.”

발톱 모양의 배지를 들어서 보여 준 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 동작은 빠르게 이 일을 끝내고 쉬고 싶은 사람처럼 성의가 없었다.

“질문 있나?”

있을 리가. 라드의 발톱. 나디사는 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몇 달 전 만난 라드군 시험관의 말이 떠올랐다.

‘나디사 마로닌. 신입 중 최고의 성적이군.’

그런데도 자신은 말단 중의 말단으로 배정되었다.

오합지졸만 모아 놓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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