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안타깝게도 이것은 비싼 값에 편견을 파는 사기극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와 달리 플란 종족의 눈, 피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그저 그렇게 또 만만한 소수 종족에게 씌워진 편견일 뿐이었다.
70여 개의 종족이 모여져 만들어진 나라, 수비타 왕국. 그러나 그중 사람 대접을 받는 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툰 종족뿐이었다.
이번 라드군에 뽑힌 사람들 중에 사툰 종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것은 단 세 사람뿐이었으니 말은 다 한 셈이다.
“그럼 돈은 언제…….”
이만 악수를 끝내고팠으나 그녀의 손은 자유를 찾지 못했다.
“난 거기에 조건 하나를 더 붙이고 싶어. 그러면 조금 내가 악랄해 보일까? 라고 했잖아.”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물살처럼 밀려 들어왔다. 말이 길어질수록 손을 옥죄는 힘도 과해졌다.
“나는 죽어도 돈이 되는 눈이나 피 같은 건 없는 종족인데 딱 하나 골 아픈 게 있어.”
그는 입술에 딱히 골이 아파 보이지 않는 웃음을 올렸다.
“시체 주겠다는 말은 안 지켜도 네 명복을 빌어 줄 수 있는데. 이건 지켜 주면 좋겠어.”
감았다 뜬 남자의 눈은 밤에 취한 것처럼 풀려 있었다.
초점이 나간 눈으로 이야기하는 그를 어떤 식으로든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나디사는 얌전해져 설교를 듣듯이 그의 말을 들었다. 남자는 지금 자기가 손을 잡고 있다는 의식도 없는 듯했다.
“여기가 중요한 부분이야.”
“어떤 게요?”
“살다가 내가 저 여자야, 저 여자가 나를 이상하게 만들어. 약속 지켜. 라고 말하면 그 여자를 어떻게 해야겠어?”
퀴즈를 내는 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나디사는 설마설마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죽여 달라고요?”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해 빼빼 마른 자신보단 누가 보아도 근육질에 키가 큰 그가 살인자로서는 적성이 맞아 보였다.
눈치가 예사롭지 않은 남자는 나디사의 눈빛을 정확히 이해했다.
“아마도 열에 아홉은 그랬으니까. 나도 못 죽이려나. 그래, 아마 나도 그러겠다.”
열에 아홉은 못 죽이는 여자. 마혼과 계약한 것처럼 보이는 남자도 못 죽일 여자.
일이 꼬여 가고 있었다.
조건과 금액이 명확하지 않아서, 이 거래를 잘 이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남자의 손은 담백하게 그녀를 놓으며 어느 틈엔가 금화 주머니를 쥐여 줬다.
홀린 것처럼 받아 든 주머니를 연 그녀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건, 각오한 것보다 액수가 컸다.
몇 년 동안 세탁물을 만져 대도 벌지 못할 금액이 한 방에 수중으로 들어왔다. 웃고 싶지 않았는데 속물처럼 웃음이 나왔다.
반응을 지켜보던 남자는 허리 숙여 그녀와 키를 마주쳤다.
“몇 개인지 안 세어 봐도 돼?”
술 냄새가 날 거란 예상과 달리 남자에게선 달큼한 포도 향이 났다.
코를 감싸 쥘 수 없어 얼굴을 살짝 물렸다.
“안 세도 알 것 같은데요.”
주머니를 꽉 여민 뒤 옆구리에 묶어 두었다.
“많잖아요. 많으면 됐습니다.”
뼈 빠지게 세탁소에서 일해도 이만한 돈은 구할 수 없었다.
흡족한 웃음을 흘린 남자는 회중시계를 꺼냈다. 사연 있는 시계인지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어느덧 남자의 세상은 그 자신과 회중시계만으로 가득 찼다.
“거래는 끝인가요?”
문득 말 몇 마디를 나누고 이만한 금화 주머니를 받아 가는 게 걱정이 됐다.
남자는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응, 안녕. 가 봐.”
뒤를 돌면 칼을 든 남자가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했지만 비스듬히 서서 시계와 눈맞춤 중인 남자는 사람이 가든지, 말든지 관심 없어 보였다.
이 거래를 지켜본 샛노란 달빛이 스산한 밤길을 밝혔다.
확실히 꾸물대다가 검문소 문이 닫히면 큰일이었다. 아침 해가 뜨기 전 샤포드로 돌아가야 하는 터라 이만 걸음을 서둘렀다.
불빛 속으로 걸어가며 열 걸음에 한 번씩 뒤돌아 그를 확인했다. 남자는 책에 한 페이지처럼 자세 한 번 바뀌지 않고 있었다.
꽃 자수 새겨진 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돌아보다가,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지켜보다가, 밝은 롯소의 번화가로 나오고 나서야 앞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검문소로 뛰어가는 그녀의 발소리는 히아신의 귓가로 들어왔다.
“뛴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가 봐.”
누구 하나 말을 받아 주는 이 없는 전당포 앞에서 혼잣말하고 있었다. 회중시계와 대화한다고 착각할 만도 했다.
마침내 나디사가 롯소의 검문소를 통과할 즈음 히아신은 느긋이 기지개를 켰다.
“일이 쉽게 풀리는 것 같아 싫다. 조금 더 어려웠으면 좋겠어.”
오늘 본 달빛이 유난하게 아름다워 회중시계에 입을 맞췄다. 오래된 은의 냄새가 입술로부터 번졌다.
조용한 전당포 거리는 손님이 없었다. 그러니 아무도 없어야 할 그의 가게에서 똑, 똑, 물이 새는 건 손님이 왔다는 뜻이다.
입술에 대고 있던 회중시계는 히아신의 주머니로 돌아갔다.
“아.”
기쁜 일이 잔뜩 생길 것 같았다. 죽인다고 하는 듯한데 이 정도 소음이면 그에겐 귀에 대고 소리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당포로 돌아가 발로 슬쩍 문을 밀었다.
연기력이 어지간해야지 죽은 척도 먹히는 것인데. 수줍게 안으로 넘어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달칵, 문에 걸쇠를 거는 소리가 나자 시신이었어야 할 남자가 움찔거렸다.
“아, 내가 여기 주인인데. 누구람.”
이것 봐라. 가슴이 들썩거리는 시체는 없지. 히아신은 천천히 내려와 앉아 남자의 무릎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여기서 자면 안 돼.”
조금 더 손가락에 힘을 주어 무릎 관절을 누르자 더는 못 버티겠는지 상체를 들었다.
“내가…….”
시체놀이를 끝낸 남자와 눈인사라도 하는 게 어떨까 싶은 차였다.
그런데 뒤로 내빼는 주머니에서 꺼낸 것이 고작 칼이라니.
“여기 주인은, 나야!”
그 말이 제일 억울했나 보다. 일어나 그토록 자랑하는 전당포 내부를 둘러봤다.
히아신은 의뢰를 받고 엊저녁 이곳에 도착했다.
목표물은 파르난 사람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다가 걸린 전당포 주인, 아스였다.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으로 아스의 행세를 하긴 했다만.
잠시 후 구경을 마친 히아신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닌데? 나야.”
“당신, 당신 파르난 쪽 사람이지? 어?”
마혼과의 계약을 치른 이들은 파르난이라는 땅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구조가 그랬다. 몸에 난 문양 때문에 그 어떤 국가도 그들을 제 나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파르난의 사람들과 엮이면 재수 없다, 저주를 받는다, 마혼에게 영혼을 판 놈들이니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파르난의 누구도 그 소문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로 마혼에게 영혼을 바친 게 맞았다. 그리고 정말로 그들은 재수가 없는 편이었다.
“지금은 내가 주인이지만, 전 주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뭐, 뭐?”
“플란 종족의 눈하고 피는 얼마 정도 해? 많이 비싸? 나 비싸게 샀는데.”
“파, 판다는 사람이 있어? 방금 그 손님이야?”
이해가 가지 않는 것과 별개로 남자는 우물쭈물 계산을 마쳤다. 전당포를 운영한 경력이 어디 가지는 않는 듯했다.
“비싸구나. 잘됐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땅을 짚으며 일어났다. 칼은 등 뒤에 숨겼다.
“금화, 필요하지 않아?”
“음.”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그깟 재산이 아까울까.
하지만, 고의는 아니지만, 히아신은 뻔한 말을 들을수록 웃지 않는 병에 걸렸다.
“수비타 왕국은, 경비가 삼엄해서 돌아다니기 힘들지? 난, 친구가 많아. 이번 한 번만 나를 살려 주면…….”
“싫어.”
“……그럼, 어리고 예쁜 여자…….”
“싫어.”
“그러면…….”
“그것도 싫을 것 같아.”
파르난의 사람들을 상대로 돈놀이하다가 반 죽게 생겨도 그는 여전히 이 족속을 몰랐다.
그들은 왕국에 속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금이 아쉽지도 않았다.
종족을, 나라를 버리고 마혼의 힘을 선택하지 않았나.
그런 이들에게 가장 달콤한 것은 행복, 안전, 소망, 사랑과 머나먼 곳에 있겠지.
“저는, 조금만 재미를 보려고 했던 겁니다. 제 행동이 무례했다면…….”
“아스?”
“네?”
“당신 이름이, 아스.”
전당포 주인인 아스는 허벅지에 땀을 문질러 닦았다.
찰랑, 은색의 회중시계가 히아신의 손에 걸렸다. 좌우로 흔들리는 회중시계가 나타난 타이밍은 다소 뜬금없었다.
“아스, 여기 봐.”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있는 건 그였음에도 웬일인지 숨이 가빠 왔다.
손가락 사이에 시계를 걸고 흔드는 행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머리가 그에겐 없었다.
퇴로를 생각하며, 어떻게 이 전당포에서 빠져나가 롯소에 주둔하고 있는 경비병을 부를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면도 크림을 눈에 바른 것처럼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는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볼 수 있는 범위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뒷걸음질 쳐 봤자 어둠이 성큼 다가와 그를 덮쳤다.
“금도 여자도 왕국도 필요 없어.”
“눈이, 어두워서…….”
“나를 놀래켜 줘, 아스.”
손 써 볼 새도 없이 시력을 잃었다. 가판대 위에 껄렁하게 앉아 있는 히아신도, 피가 흥건한 바닥도, 전부 허기진 안개에 잡아먹힌다. 영원한 악몽 속에 갇히도록.
제가 발을 디딘 곳조차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달려들어 먹어 치우는 것은 실체가 없었다.
맥없이 쓰러지는 전당포 주인을 본 히아신은 한 손으로 드르륵 창을 열었다.
이 가게는 다 좋은데 케케묵은 먼지가 많다.
“나디사 마로닌.”
히아신은 주머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바람에 팔랑거리는 편지 봉투엔 보라색의 그녀와 같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곧 만나겠다, 우리.”
오늘 재미있는 손님은 더 없으려나 보다.
하긴, 그런 손님은 매일같이 오지 않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