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 *
직장인의 삶이란 본래 이런 식이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삶.
필립은 이런 삶이 생각보다 익숙했다. 하지 않을 자유와 능력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편한 점도 있었다.
물론 괴수들이 우글거리는 대평원으로 향하는 일은 조금 선을 넘었다고 봐도 좋았으나 다행히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처지의 직장인이 꽤 많았으니까.
이번 괴수 토벌 실습에 참여하는 학생은 스무 명 정도였다.
3학년과 4학년 학생 중에서 지원자를 받아 이루어지는 실습이었으나 안전이 완전히 보장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참여율은 꽤 저조했다.
특히 지난 실습에서 4학년생 한 명이 교관의 지시에 불응하고 멋대로 행동한 탓에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기에 올해의 참여율은 특히 끔찍했다.
필립은 덜컹거리는 마차에 몸을 실으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여인을 마주 바라보았다.
‘오필리아’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교관이었는데, 그녀는 필립과 시선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제게 뭔가 할 말이 있나요?”
“딱히 없습니다만, 교관님이야말로 제게 할 말이 있어서 저를 보신 게 아닙니까?”
필립이 되묻자 그녀는 다시 생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별 뜻 없이 본 거예요. 그냥, 어떤 분이실까 싶어서요.”
누가 봐도 뭔가 관심이 있어 보이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는 실습에 동원된 교관 중 홍일점이었고, 마차에는 필립과 그녀만 타고 있는 게 아니었기에 질투 섞인 시선이 필립에게 집중되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사람입니다.”
“설마요. 외모부터 특별하신데. 아, 그리고 오늘 밤 잘 부탁드려요. 제가 잠버릇이 좀 심해서 혹시 실례를 하지 않을까 두렵네요.”
조신하게 이야기하는 붉은 머리 미녀를 보며 필립은 어이가 없어져 하마터면 헛웃음을 뱉을 뻔했다.
‘아니, 당신 이런 성격 아니잖아요.’
그녀의 정체는 북부 변경백의 딸이자 헤일리 바로운의 누나인 크리스틴 바로운. 젊은 여검사 중에서는 펠리시아와 함께 한 손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대놓고 말하자면 아카데미 교수 수준에 근접한 강자라고 봐도 좋았다.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성격 탓에 엑스트라에 가까운 조연임에도 제법 인기가 많은 캐릭터였기에, 필립은 그녀의 성격이 저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나한테 이러는 거지? 저렇게 배시시 웃는 사람이 아닌데.’
아카데미 외부 에피소드를 진행할 때 조력자로 등장하는 캐릭터인 그녀는 성향을 따지자면 분명히 선에 속하는 사람이었으나, 기사로서 교육받은 만큼 엄한 면이 있었고 전장에서 오래 구른 남자 기사처럼 호탕하기도 했다.
“크흠, 흠. 교관님들. 아무래도 괴수 토벌 실습이 처음이신 교관님들께서 있으시니, 가는 동안 제가 내용을 좀 설명해도 괜찮겠습니까?”
중급 검술 과목의 교관인 테오도르 교관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다른 교관들이 동의하자 그는 헛기침을 몇 번 더 한 뒤 본격적인 실습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실습은 마차로 이동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이동 중 마주치는 괴수들에게 즉각 대응하여 토벌하고, 사후처리까지 하는 모습을 채점하면 됩니다. 만일 학생들이 감당할 수 없는 괴수가 등장한다면 우리가 나서고, 그럴 일은 없겠으나 교관 선에서 감당할 수 없는 괴수라면 동행하신 교수님들께서 나서실 겁니다.”
이번 실습에 참여한 교수는 둘이었다.
고급 검술 과목을 담당하는 알테어 교수와 마법 학부의 중급 이론을 담당하는 케슬러 무르엘라 교수.
“스무 명의 학생들은 다섯 명씩 네 조로 이루어질 겁니다. 교관이 총 여덟이니 둘씩 짝지어 한 조씩 맡으면 됩니다. 혹시 질문 있으신 분?”
“맡으라는 게 그 조를 계속 따라다니라는 겁니까?”
마법 학부의 스노벨 교관이 질문하자 테오도르 교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즉시 반응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면 됩니다.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지켜볼 수 있는 거리 말입니다. 혹시 학생들이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즉시 제지하도록 하며, 배부된 채점표에서 감점 처리를 하면 됩니다.”
“잘못된 선택이라고 하시면?”
“위험한 괴수를 자극하는 행동이라거나, 혹은 불화를 조장하는 행동을 말하는 겁니다.”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필립이 문득 서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실습이 조금 빨리 시작될 모양이었다.
오필리아 교관은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필립을 발견하곤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필립의 걱정과 달리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진짜 잘생겼네.’
* * *
“오크 무리다!”
쟈니스 무르엘라는 마부석에 앉은 검술 학부 3학년생이 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딱히 겁먹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단지 상상 이상으로 큰 목청에 놀랐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쟈니스 무르엘라. 고작 오크 따위잖아?”
같은 3학년 검술 학부 학생인 보리안 허비트가 피식 웃으며 쟈니스에게 말했다.
그는 3학년 중에서는 가장 강한 축에 속했으며, 성적으로 치면 수석은 아니었으나 수석이라고 알려진 엘리야 힐트를 대련에서 매번 이기고는 했다.
쟈니스는 이동하는 내내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래. 고맙기도 해라.”
그녀는 성의 없이 대답하며 옆자리에 앉은 셰릴을 쳐다보았다.
“네가 좋은가 봐. 쟈니스.”
셰릴이 킥킥대며 속삭였다.
“어쩌면 널 좋아할 수도 있지. 날 통해서 너와 친해지고 싶다거나. 아, 스테판이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 몸살에 걸려서….”
항상 함께 다니는 스테판 브레이가 실습을 이틀 앞둔 날 독한 감기에 걸렸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몸살에 걸린 게 도련님… 아니, 걔 잘못은 아니잖아. 쟈니스. 어서 내리자. 점수 깎이면 어떻게 해.”
만티코어까지 만나 본 셰릴과 쟈니스에게 오크 무리 따위는 위협도 되지 않았다. 여유롭게 마차에서 내린 그녀들은 곧 마차 행렬을 둘러싼 한 무리의 오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는 대략 서른.
관도에서 한참 벗어난 지역이라 치안이 불안정하다곤 해도 이렇게까지 많은 수의 오크가 나다닐 정도는 아니었기에 쟈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취익… 인간…… 짐과… 취익, 말을 내놓아라….”
“짐! 취익! 말!”
녹슨 무기로 무장했으나, 인간에 비해 근력과 체력이 뛰어난 오크 서른이라면 궁수가 포함되지 않은 비정규 전투원 마흔쯤은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뭔가를 매우 잘못 먹은 돼지처럼 험악한 얼굴과, 끔찍한 체취, 그리고 날것 그대로의 흉포함을 마주한 학생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멍청이들아, 포위당했으니 마차를 중심으로 뭉쳐! 마법사들은 곧바로 지원을 준비하고!”
보리안 허비트가 소리쳤다. 그의 가문인 허비트 자작가의 영지에는 오크가 자주 나타났고, 어린 시절부터 자주 접했던 탓에 그는 오크를 보고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쟈니스 무르엘라는 곧바로 부유 마법을 시전하려다가, 출발 전 필립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너는 이미 학생 수준을 뛰어넘었으니 네가 직접 나서기보단 다른 학생들을 보조하는 식으로 실습에 임했으면 좋겠구나. 네 실력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굳이 뭘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 말을 들은 쟈니스는 바보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압!”
보리안이 먼저 움직였다. 나름대로 세련된 솜씨로 뛰쳐나간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포위망을 유지하고 있던 오크 전사 하나의 어깨를 깊게 베었다.
“취이이익!”
“취익! 취익! 인간이 먼저 공격했다! 다 죽여라!”
그 즉시 오크들이 마차를 향해 돌격했다. 교관들은 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마차에서 내려 학생들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저렇게 합의 없이 움직이면 곧바로 감점입니다. 비록 오크 한 명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기는 했으나, 아직 호흡이 제대로 맞지 않는 아군과 함께라면 저런 행동은 알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혼자 뭘 해볼 생각이었으면 저것보다는 더 많은 타격을 입혀야 했습니다.”
테오도르 교관의 설명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옳은 말이었다.
조별로 행동하는 건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였기에 지금 상황에서의 채점은 개개인으로 이루어졌다. 필립은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는 학생 몇 명을 발견했다.
쟈니스 무르엘라는 이런 상황에선 더 볼 것도 없었다. 적당히 위력이 약한 파괴마법이나 시의적절한 보조 마법을 이용해 아군을 훌륭히 보조했으니 경험만 조금 더 쌓이면 적어도 교관에 준하는 실력을 낼 수 있을 터였다.
셰릴은 생각보다 센스가 좋았다. 얌전한 외모와는 달리 언제 어느 순간에 상대를 방해하는 편이 상대의 멘탈을 더 건드리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듯 보였다.
사용하는 마법은 화염 화살이나 번개 화살 같은 1위계 하급 마법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몫 이상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애는… 차냐 우제추였나.’
그리고 필립이 눈여겨보는 학생은 피부색이 조금 어둡고 머리가 부스스한 소녀였다. 필립이 보기에 그녀는 전투 감각의 화신이었다. 본능적인 싸움에 대한 감각만이라면 오히려 루아보다 더 뛰어날지도 몰랐다.
마치 한 마리의 늑대처럼 오크 무리 가운데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녀 덕에 학생들은 오크를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물론 가장 많은 오크를 해치운 학생은 보리안 허비트였으나, 그는 단지 깔린 판에서 기댓값만큼 해줬을 뿐이었다.
‘차라리 저 소년이 훨씬 낫지.’
필립은 공명심을 내려놓고 마법사들에게 눈먼 공격이 날아오지 않도록 지키고 있는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는 점수 따위엔 관심이 없고 이 전투에만 집중하겠다는 생각인 듯했다.
‘벤트너 피어슨. 저렇게 성실한 학생은 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일 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만에 서른이 넘었던 오크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피비린내와 죽어가는 오크들이 흘린 배설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승기를 거의 완벽히 잡은 그 순간, 학생 측에서 실수가 일어났다.
“꺄아아악!”
집중력을 잃어버린 검술 학부 학생 한 명이 마법 학부 학생이 마무리하려던 오크 앞을 모르고 가로막아버린 것이다. 마법 학부 학생이 날린 화염 화살이 검술 학부 학생의 등판에 정확히 명중했고, 그 불쌍한 여학생은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어야 했다.
그리고 그 머리통 위로 녹슨 도끼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여학생이 공포에 질려 눈을 질끈 감는 그 순간, 쟈니스의 마법이 날아들었다.
3위계 파괴마법인 화염 광선이 여학생을 노리던 오크의 상체를 그대로 휩쓸고 지나갔다. 곧 하체만 남은 오크의 시체가 몇 번 꿈틀거리더니 쓰러졌고, 급히 다가간 쟈니스가 그녀를 감싸며 방어막을 활성화했다.
“정신 차려! 뭐 하는 거야? 죽고 싶어?”
“아…아파… 너무 아파….”
“일단 일어나서 뒤로 빠져. 등은 괜찮아?”
화염 마법에 직격당한 등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쟈니스는 여학생을 부축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시전한 방어막에 녹슨 도끼와 글레이브가 날아들었으나 쟈니스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달라붙은 여학생의 다리로 피가 섞인 진물과 여학생이 흘린 소변이 흘러내려 쟈니스의 로브를 적셨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리 훈련을 받았다지만 성인 남성조차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 만한 부상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필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열여섯 열일곱 먹은 어린애들인데.’
아무리 환경이 다르다고 해도 아직 앳된 소년 소녀들이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투 속에서 부상당하는 걸 보고 있자니 저절로 가슴이 무거워졌다.
“네리스! 너 괜찮아?”
여학생의 친구로 보이는 학생 한 명이 그녀를 넘겨받았다.
“뭐 해? 부상자는 전투 끝나고 챙겨! 당장 죽을 것도 아니잖아!”
“지금 애가 저렇게 다쳤는데…!”
보리안이 다그치자 그 학생은 숨이 턱 막히는 분노로 몸을 떨다가 다시 검을 쥐었다. 분하지만 보리안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취이익!”
숫자가 줄어든 오크들은 학생들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었다. 곧 마지막 오크의 숨이 끊어졌고, 지금껏 대장 노릇을 했던 보리안이 앞으로 나섰다.
“주변을 정리하고 부상자를 옮겨. 마법사들은 불로 시체를 태우고….”
“…미안한데 입 좀 다물래? 그거 모르는 사람 여기 없잖아. 너 때문에 전투가 훨씬 어려워졌는데 왜 나서는 거야?”
듣다 못한 쟈니스가 보리안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내가 가장 많은 오크를 베었지 않나? 네 마법도 물론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이 전투에서 공을 가장 많이 세운 건 나라고 생각하는데.”
보리안이 반박하자 쟈니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그냥 그러고 살아. 셰릴. 상처 치료 주문 좀 저 애한테 걸어줄래?”
“물론!”
셰릴은 급히 여학생의 등에 미리 챙긴 연고를 바른 뒤 회복 주문을 외웠다. 상처 치료 주문은 자상이나 열상에 더 효과적이었으나, 화상에 좋은 연고를 바른 뒤 사용하면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아아악! 끄아아아!”
여학생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화상으로 녹은 피부가 재생되어가는 과정에서 끔찍한 고통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화염 화살 마법이었기에 치명적인 부상은 입지 않았다. 그러나 최소한 내일까지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터였다.
‘…교관님. 저 답답해 죽을 것 같아요.’
쟈니스는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필립에게 시선을 돌렸다. 필립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힘내라는 의미로 팔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쟈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닿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