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 *
“살려준다고 했잖아요! 이건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에이샤는 공포에 떨며 소리쳤다. 필립은 그것참 안되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사실 아직 구두계약도 맺기 전이었지 않습니까? 그러게 처음 손을 내밀 때 즉시 받았어야죠. 나는 당신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는 잘 압니다.”
애초에 그녀를 받아들인 뒤에는 정보 수집이나 시키려고 했다. 그녀의 근본적인 사고방식 자체가 용병의 그것이라는 사실을 자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에이샤는 동료를 방패로 삼아 자기 자신을 구하는 데 별 망설임이 없을 터였다.
“그리고 애초에 당신은 자신이 왜 쫓기는지 잘 알고 있었잖습니까. 인간으로 치면 국가 기밀을 들고 도주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합당한 벌은 받아야죠. 그럼 잘 가시고.”
필립은 이번엔 다크엘프 집행자 라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도 뭐 이야기가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변 정리 잘 하시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리 작별 인사 정도는 건네 두시고….”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죽는 것 같잖아! 말을 해도!”
라니는 버럭 소리친 뒤 스스로도 깜짝 놀라 입을 가렸다. 프리비아는 딱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크엘프 장난감이 새로 생겨 꽤 만족스러운 듯했다.
“잊지 말아라. 엿새다. 그 안에 날 찾아오지 않는다면 네 동족은 새로운 숲을 고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알아서 오지 않으면 브레스로 숲을 지져버리겠다는 협박에 라니는 헛숨을 삼켰다.
“너무 겁주지 마십시오. 불쌍하잖습니까.”
필립이 프리비아를 만류했다. 라니는 그렇게 말해 주는 필립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이 인간은 대체 뭐길래 저 흉포한 드래곤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거지? 목숨이 세 개라도 되나? 그리고 저 드래곤은 왜 그냥 넘어가는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그녀는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본래 인류는 드래곤과 맞닥뜨릴 일이 잘 없으나, 숲에 사는 엘프나 다크엘프, 그리고 수많은 아인종은 드래곤의 보호 아래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리비아가 월랑족과 친하게 지낸 것처럼, 그녀의 동족은 블랙 드래곤과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은룡의 횡포를 막아 주지는 않을 터였다.
본래 드래곤끼리는 서로에게 잘 간섭하지 않았으니까.
제아무리 그녀가 수십 년 동안 병기로 키워진 집행자라고 해도 고작 다크엘프 계집애 한 명 때문에 같은 드래곤과 마찰을 일으킬 리가 없었다.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라니는 프리비아의 눈치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려다 참았다.
“기다리고 있으마. 너는 꽤 좋은 시종이 될 것 같구나.”
“네? 아… 네. 그…그럼요. 헤헿.”
“네가 귀엽게만 군다면 나는 너를 제법 잘 대해 줄 것이다.”
‘엿새 안에 나라 하나를 왕복하라면서… 뭐라고? 똥 쌀 시간도 없이 달려도 시간을 맞출까 말까인데… 이게 다 이 빌어먹을 배신자 년 때문이야.’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으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적어도 앞으로 수십 년 동안은 고달프리라 예상했다.
* * *
“쟈니스. 그게 무슨 옷이니?”
캐슬러 무르엘라는 필립의 별장에 놀러 갔다가 돌아온 쟈니스가 이상한 옷을 입고 있자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뭐지? 다람쥐 꼬리가 달린 옷이라니?’
“교관님이 입으라고 줬어요. 루아 건 토끼 귀가 달렸던데.”
“이런 걸 만드는 공방이 있었던가? 신기하구나.”
옷의 형태는 매우 편한 잠옷 같았다. 제법 귀엽기는 했으나 딱히 실용적인 부분은 없었고, 귀족 영애에겐 그리 어울리지 않는 잠옷이었다.
“어머, 어머!”
그러나 부인인 신시아 무르엘라의 반응은 달랐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동물을 보는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어쩌면 저렇게 귀여울까?”
사실 쟈니스는 마냥 귀엽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나이였다. 열여섯이라는 나이는 소녀가 여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었고, 쟈니스는 이제 소녀보다는 여인에 가까웠다.
저런 걸 준다고 입을 만큼 유치하지는 않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필립이 줬다는 이유만으로 어린아이 취향의 인형 같은 옷을 입는다니.
‘…매파를 보내야 하나?’
잠깐 막냇동생과 은인과의 결혼에 대해서 생각하던 캐슬러는 이내 그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렇다기엔 저 잠옷을 입고 있는 쟈니스가 너무 행복해 보였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자신의 아내도 옷에 달린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좋아하고 있었다.
‘여자들끼리만 통하는 뭔가가 있는 건가.’
“히힛. 귀엽죠? 아, 그러고 보니 교관님이 오라버니 선물도 준비했다고 하던데.”
곧 쟈니스는 자신의 방에서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이런 걸 다 준비하시다니.”
캐슬러는 감동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서 나온 건 한 벌의 갑옷이었다. 잘 모르는 캐슬러의 눈에도 뭔가 방어력이 좀 낮아 보일 만큼 빈 부분이 많았다.
“이건… 무슨 갑옷일까요?”
배와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는 디자인에 착용법 자체가 남다른 갑옷이었다. 입었을 때 부끄러워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았다. 색감이나 외형 자체에는 여심을 뒤흔드는 매력이 있었으나 이런 걸 입고 어떻게 싸울 수 있을지는 몰랐다.
“교관님께서 입어보면 안다고 하셨는데.”
필립이 그녀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 이런 걸 보냈을 리는 없었다.
“……뭔가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기는 해요.”
“그러면 한번 입어볼까요?”
신시아는 즉시 옷을 갈아입었다. 필립이 보낸 갑옷을 몸에 걸치는 그 순간 그녀는 묘한 힘이 자신의 몸을 감싸는 걸 느꼈다.
“…아. 이건….”
평소보다 몸이 훨씬 가벼웠다. 그리고는 뿌리를 알 수 없는 힘이 몸을 가득 채웠다. 신시아는 그제야 이 갑옷이 범상치 않은 아티팩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티팩트네요. 이걸 입으면 평소보다 훨씬 잘 싸울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이런 걸 주시다니….”
“그런 걸 입고 몸을 격하게 움직이면서 싸울 수가 있나요…?”
신시아의 배꼽을 빤히 쳐다보던 쟈니스가 물었다. 신시아는 남편의 동생을 바라보며 웃었다.
“실력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는데 부끄러운 건 전혀 중요하지 않죠. 아가씨. 그래도 가릴 곳은 다 가려 주잖아요? 이미 결혼한 저야 이걸 입고 싸울 일이 잘 없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그, 그래요?”
“정말 강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것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 입을 수 있을걸요?”
“그것보다 더요……?”
쟈니스는 결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교직원 기숙사의 어느 구석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없었다.
* * *
“…히익!”
사막의 무희 코스튬을 입은 펠리시아는 바람이 들면 안 되는 곳에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자 즉시 손으로 몸을 가렸다.
―킁… 킁킁.
오랜만에 소환해 둔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가 그녀에게 흥미를 보였다. 필립의 설명대로였다. 이 옷 같지도 않은 옷을 입으니 불 원소에 대한 친화력이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상승한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아, 제발… 이그니스. 거긴 안 돼… 응?”
늑대 형상의 이그니스는 펠리시아의 둔부에 코를 가져다 대며 냄새를 맡았고, 펠리시아는 기겁하며 물러났으나 상급 정령의 호기심을 이길 수는 없었다.
“풉… 푸흡….”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디아나 파렌할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가렸다.
“아, 웃지 마!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기나 해? 차, 착하지? 거긴 안 된다니까? 제발!”
“내가 입는 것도 아니잖니. 펠리시아. 차라리 속옷 차림인 게 덜 부끄럽긴 하겠네. 하지만 네 동생이 기껏 널 생각해서 준비한 건데 이 기회를 좀 더 이용해 보는 게 어때?”
“지금 그러고 있잖아!”
―조 은 냄 새 가 나
이그니스가 중얼거렸다.
“거기서 날 거라곤 구린내밖에 없을 텐데. 좋은 냄새가 난다고? 어디 나도 한번 맡아볼까.”
“아, 좀!”
디아나가 비아냥거렸다. 얼굴이 새빨개진 펠리시아는 눈을 질끈 감고 수치심을 견뎌내기 위해 애썼다. 저게 정령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부끄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처음 필립이 이 사막의 무희 복장을 내밀며 이걸 입고 정령과 부대껴 보라는 말을 했을 때는 정말이지 미친놈인 줄만 알았다.
옆에 있던 드래곤이 효과를 보장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는 절대 이 옷을 입지 않았을 터였다.
차라리 벌거벗은 것보다 더 부끄러웠으니까. 몸에 딱 맞기라도 했다면 그나마 덜했겠지만, 몸매가 좋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옷인지 공간이 좀 많이 남아 잘못 움직이면 벗겨질 것만 같았다.
수선을 하자니 이 옷의 효과가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러지도 못했다.
‘이……이걸 몇 주를 하라고?’
어차피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펠리시아는 자신의 동생이 너무나도 잘났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본래도 알았으나, 최근 들어 생긴 사건 속에서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을 뿐 필립에게 열등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할지언정 결코 휘둘리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법을 찾아내어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필립의 모습은 한때 그를 가문의 수치로 여겼던 그녀에겐 충격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이런 걸 구해 왔다는 건 누나인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소에 대한 친화력을 올려주는 물건이 있다는 건 평생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 애는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해온 걸까?’
무슨 모험을 해야 이런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분명히 이야기책에나 나올 법한 역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극복하고 얻어낸 것이리라.
동생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선 그녀 또한 멈출 수 없었다. 펠리시아는 입꼬리가 부르르 떨릴 만큼 억지로 웃으며 이그니스의 불타는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래. 착하지? 응?”
우연히 들어간 상점에서 쇼핑해 왔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달랐겠지만, 펠리시아는 이미 각오를 다졌다.
언젠가 필립 혼자서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이 닥친다면, 동생의 옆에서 단단히 한몫을 해내고 말리라고.
* * *
주말이 지나고 필립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바뀐 교과 과정 덕에 교관과 교수의 여유 시간은 대폭 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신입 교관의 업무가 편해졌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예? 괴수 토벌 실습이요? 그걸 왜 제가 갑니까?”
수석교수에게 불려간 필립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학과 일정 중 가장 귀찮은 것 중 하나에 자신이 참여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였다.
“…본래 이건 베테랑 교관 한 명에 나머지는 신입 교관으로 채워지는 게 관례일세. 자네 선배들도 다 했던 일이고. 검술 학부에선 자네와 템스 교관, 그리고 오필리아 교관이 가게 될 걸세. 정 싫다면 자네는 제외해 주지.”
“으음….”
필립은 정말이지 싫다는 표정을 대놓고 지었으나, 그렇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가기 싫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로 갑니까?”
“던소어 평원으로 갈 예정이지. 왕실 기사도 참관한다고 하니, 그리 귀찮은 일은 없을 걸세.”
“예? 던소어 평원이요? 그 돌기둥 유적이 있는 장소 말입니까?”
“잘 알고 있군. 왜, 문제라도 있나?”
실습 장소를 들은 필립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툭 떨궜다.
“어쩔 수 없군요. 저도 가야겠습니다.”
“정 싫으면 빼준다니까?”
수석교수가 재차 물었으나 필립은 정말 싫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가겠습니다. 천막이나 보존식 같은 것이나 좀 고급으로 준비해 주십시오.”
수석교수는 이 새끼가 왜 지랄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잘… 생각했네? 아, 그리고 이번에 오필리아 교관만 유일하게 여성 교관인데, 혼자 텐트를 배정할 수 없으니 누군가와 같이 사용해야만 하네. 그녀는 자네와 함께 쓰고 싶다고 하더군. 물론 자네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게. 뭐 다른 교관 교수들, 그리고 왕실 기사까지 듣고 있는 상황에서 일을 치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필립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