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 * *
“상인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드물어요.”
오슬레이 유세프가 돌아간 뒤, 리즈리엘은 필립에게 그렇게 충고했다.
“하지만 리즈. 너도 상인이잖아.”
“아, 아니! 전 상인이기 이전에 당신의……친구인걸요. 하지만 제 아버지는 그렇지 않잖아요.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보세요. 아버지께서 당신께 언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요? 언니는 지금 후작 가문의 지하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길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죠.”
옳은 말이었다.
혈육, 그것도 친딸인 델루안 유세프가 저런 신세가 된 데에는 필립의 영향이 가장 컸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은 것으로 봐선, 오슬레이 유세프가 가족 같은 걸 중요하게 여기는 이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당연히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필립을 배신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난 차라리 그가 배신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리즈 네가 바로 유세프 상회의 주인이 될 수도 있어.”
리즈리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곤 필립을 째려보았다.
“당신이 천재적인 검사라고 해서 상인을 얕보면 안 돼요. 진정한 강자는 돈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해도, 아주 많은 돈은 대단히 강한 사람마저도 휘두를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건 그렇지. 주의할게.”
말은 그렇게 했으나 필립은 유세프 상회가 동원할 수 있는 강자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믿을 만한 사람과 함께 갈 생각이니 아마 별일은 없을걸.”
“…뭐 그렇다면야. 저도 저 나름대로 아버지가 뭔가 음모를 꾸미지는 않는지 조사해 볼게요.”
“그래. 부탁해.”
리즈리엘이 돌아가자 필립은 그제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서재로 돌아가 책을 펼치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별장 대문에서부터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교관님! 교관님! 이것 좀 보세요!”
루아의 목소리였다. 필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책을 덮고 홀로 나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은색 늑대의 위에 올라탄 루아가 꺄르륵 웃으며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뭐 고결한 전사 종족 어쩌고 하더니?’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월랑족 전사 로로를 바라보았다. 그 크고 아름다운 암컷 늑대는 필립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눈치채곤 조용히 고개를 돌린 뒤 중얼거렸다.
“…아이를 낳고 나니 다른 집 애들도 예뻐 보여서요. 원래는 이런 성격이 아니랍니다.”
“아니, 뭐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좋게 보이니 앞으로도 잘 지내도록.”
“네, 작은 주인님….”
* * *
오슬레이 유세프의 방문 이후 나흘이 더 지났다. 아카데미의 수업은 나름대로 문제 없이 잘 진행되었고, 상승한 교육의 질과 효율적으로 편성된 시간표는 학생과 교직원 모두의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부터 카밀라 벨로페르 칼라리아 공주가 정식으로 아카데미의 학생이 되었다.
이 누구나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은 순식간에 아카데미 전체를 휩쓸었으며,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직원들까지 왕가의 핏줄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카밀라를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 여기 온 거니? 교직원 휴게실에 학생은 출입 금지인데.”
필립은 교직원 휴게실로 찾아온 카밀라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생각보다 정도가 심했다.
카밀라는 막내였고, 게다가 여자아이였기에 왕위 계승권에서 가장 멀다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왕족 중 현 국왕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국왕이 그녀를 총애한다고 해서 카밀라를 견제할 만한 귀족이나 왕족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 너무 부담스러워요. 오라버니. 영애들이 화장실까지 쫓아와선 말을 걸잖아요.”
카밀라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검술 수업을 듣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외투를 벗는 순간부터 모두가 절 쳐다봐요. 마치 공주의 맨살이 어떤지 꼭 보고 말겠다는 것처럼….”
“…고생이 많았구나.”
필립은 안쓰럽다는 듯 카밀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물론 카밀라가 말하는 ‘모두’는 여학생들이었겠지만, 그런 상황에선 같은 여자의 시선이라 해도 수치심이 들기에 충분했다.
“내가 말해둘 테니 당분간은 펠리시아 누님의 연구실에서 옷을 갈아입도록 해.”
카밀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도 될까요? 너무 폐가 될 것 같은데.”
“그래. 아마 시간이 지나면 다들 네게 익숙해질 테니, 그때까지만 좀 견디렴.”
이건 특혜라기보다는 배려에 더 가까웠기에 필립은 시원스레 결정했다. 그때 디아나 교관과 길모어 교관이 뭐라고 떠들며 교직원 휴게실로 들어왔다.
“교관님께선 기초 검술의 뜻을 모르십니까? 검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듣는 수업이란 말입니다. 체력 단련과는 그 목적이 다릅니다. 체력 단련 시간에는 학생들을 엄하게 다룰지언정, 기초 검술 시간에는 그래선 안 됩니다.”
“아니…그게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파렌할 교관님. 초보자일수록 더 확실히 붙들고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닙니까?”
“학생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학생 잘못이 아니라 교관 잘못이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이해할 때까지 반복시키는 건 대체 어디서 배운…… 하아….”
‘고생이 많구만.’
디아나 파렌할은 길모어 교관을 교육하느라 바빴다. 본래는 필립이 해야 할 일이었으나, 디아나가 필립 대신 나섰다.
“원래 기초는 반복 숙달로 쌓이는 것 아닙니까? 저는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거 아닙니까? 억지를 부려서 절 길들이려는 겁니까?”
학생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복도였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꽤 컸다. 그들은 곧 테이블에 앉은 필립과 카밀라를 발견했다.
“교관님. 여기 계셨습니까.”
“예. 오셨어요?”
디아나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필립 또한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존중받을 만한 교육자였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길모어 교관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필립은 대충 손을 들어 인사에 답했다.
“그런데 여긴 학생 출입 금지 아닙니까? 저 학생은…어?”
길모어 교관은 카밀라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더니 깜짝 놀라 탄성을 질렀다.
“고…공주님? 세상에.”
“카밀라. 넌 이만 돌아가렴. 집에서 마저 이야기하자꾸나.”
“네. 오라버니.”
그렇지 않아도 이 자리가 부담스러웠던 카밀라는 필립과 가벼운 포옹을 나눈 뒤 교직원 휴게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본 길모어 교관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공주님과 무슨 관계입니까?”
“제 의자매입니다. 교관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니니 다음 수업이나 준비하시죠. 파렌할 교관님 좀 그만 괴롭히시고요. 당신이 기사단 출신인 건 알겠지만, 이곳은 아카데미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아, 예. 뭐. 그러겠습니다.”
필립은 길모어 교관의 성의 없는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딱히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아, 교관님. 수석교수님께서 오늘 저녁 검술 학부 교직원들 모두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디아나가 휴게실을 나가려는 필립에게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어, 왜입니까?”
“친목 도모를 위해 모임을 열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도 한 번 전달한 것으로 압니다만.”
“…아, 그랬죠. 그런데 그걸 왜 갑자기 지금 한답니까.”
교관 중 사분지 일이 갈려 나간 탓에 언제 한 번 자리를 가져야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을 필립 또한 기억했다.
“그거야 저도 모를 일입니다. 장소는 옆 도시의 하얀 거위 살롱입니다, 펠리시아 교수님께서 수업이 끝나고 같이 출발하자고 하시는데 어쩌시겠습니까?”
“같이 가죠, 뭐.”
“그러면 저는 어떡합니까?”
길모어 교관이 물었다. 디아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 사이에 굳이 끼려는 이유가 궁금했으나, 생각해 보니 같은 수업에 들어가는 교직원들 사이에서 따돌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교관님도 같이 가시죠. 교수님이 싫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겠지만.”
길모어 교관의 표정이 밝아졌다. 디아나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 *
작은 거위 살롱은 아카데미 상점가에서 마차를 타고 삼십 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었다. 크기는 작았으나 제법 운치가 있었고, 살롱 중에서는 제법 건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필립과 펠리시아, 그리고 디아나와 길모어 교관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교관이 모인 뒤였다.
“어, 저분들은 마법 학부 교수님들 아닙니까?”
길모어 교관의 말대로 살롱에는 검술 학부만이 아니라 마법 학부의 교직원들도 모여 있었다. 무슨 파벌 싸움을 앞둔 것처럼 끼리끼리 모여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저희끼리 모이는 게 아니었나 봅니다.”
디아나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펠리시아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선 항상 작아지곤 했다.
적당히 구석진 자리를 찾아 들어간 그들은 곧 에밀 파노이 수석교수가 본래 살롱의 무대로 쓰이는 단상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들 모인 모양이군. 주목하도록.”
‘은근히 관종이라니까.’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수석교수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깜짝 파티 같은 느낌으로 계획한 모임인데, 어떤지 모르겠군. 다들 놀라지 않았나? 하하.”
그는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껄껄 웃으며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필립과 펠리시아는 가만히 있었으나 다른 교직원들은 억지로라도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이번에 우리 아카데미는 대대적인 체질개선을 성공적으로 이뤄냈지. 대륙의 모든 아카데미를 통틀어도 우리만큼 선진적인 교육체계를 이룩한 곳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네. 그 과정에서 자네들 또한 활약했음을 내 잘 알고 있으니, 다들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오늘 이렇게 자네들을 모이라고 한 건, 앞으로 대륙의 교육계를 이끌어나갈 인재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게 좋지 않나 싶어서일세. 마음껏 먹고 마시며 서로 친해지는 시간을 갖도록 하게.”
필립은 뭔가 익숙한 기분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중요한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게 억울할 정도였다.
“그전에 새로 합류한 교수들을 소개하도록 하지. 자, 다들 올라오도록.”
수석교수의 지시에 마법 학부와 검술 학부의 새 교수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필립은 마법 학부의 새 교수를 보곤 눈을 부릅떴다.
알테어는 필립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나, 마법 학부의 교수마저도 아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여기 알테어 교수는 내가 잘 아는 사람으로, 그 실력만큼은 검술 학부의 교수 중에서도 발군일세. 고급 검술 과목을 담당하고 있지. 보기보다 나이가 좀 있으니 실례하지 않도록 주의하게.”
“….”
알테어의 하얀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여기 모인 사람 중 얼로이 후작 부인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있었으나, 화장법과 헤어 스타일을 바꾼 것만으로도 그녀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저 노인네가…?’
그녀는 입술을 짓씹더니 이내 필립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
그녀 또한 양심이 있었기에 필립을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양심보다도 필립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드래곤이 무서운 게 더 컸다.
잘못 건드렸다간 이번에야말로 끔찍한 최후를 맞을지도 몰랐기에, 그녀는 아쉬움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여기 마법 학부의 새 교수는 여러분도 잘 아는 무르엘라 가문의 아들이지. 적색 마탑의 쿼터마스터이기도 하고. 아마 자네들 중에도 익숙한 이가 있겠지?”
지목된 교수는 30대의 청년이었고, 가벼운 안경을 걸친 미남이었다.
“반갑습니다. 캐슬러 무르엘라입니다. 교육자로서는 첫 발자국을 내디딘 셈이니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겠습니다.”
그는 여유롭고 부드러운 말투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중급 마법 이론을 담당할 걸세. 보이는 대로 젊은 교수이지만, 저 나이에 적색 마탑의 쿼터마스터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다들 알 거라 믿네. 자, 그러면 이제 다들 즐기도록.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각오하도록 하고.”
소개가 끝나자 필립은 펠리시아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알테어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 것 같았다.
“나…난 알테어 교수님과 이야기하고 올게. 디아나 언니…가 아니라 교관도 같이 가자.”
“아는 분입니까?”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저분께 교관을 꼭 소개하고 싶어.”
두 여인이 양해를 구하고 테이블을 떠나자 곧 마법 학부 교직원들이 모인 곳에서부터 캐슬러 무르엘라가 필립을 향해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교관님.”
필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교수님이시라 저보다 직급이 높으신데 말씀을 편히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캐슬러 무르엘라 또한 기분 좋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옆에 계신 분은?”
캐슬러의 질문에 눈치를 보던 길모어 교관이 냉큼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북부 기사단에서 봉신하던 길모어 템스입니다. 저로 말하자면…….”
“신입 교관입니다.”
필립은 길모어의 자기소개를 가로막고 요약했다.
“아, 그랬군요. 누님분께선?”
“학부의 새 교수님과 이야기하러 갔습니다. 예전부터 알던 사이거든요.”
“이번 기회에 소개받고 싶었는데, 안타깝군요.”
“그러면 끝나고 따로 모여서 한잔하시죠.”
“하하, 좋습니다.”
소외된 길모어는 불만을 느꼈으나 자신이 이곳에 낄 수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제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소개할 기회마저 박탈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필립이 자신을 오히려 도와준 셈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로 웃는 표정을 억지로 지었다.
“교수님? 여기 계셨습니까?”
그때 페렉 교관이 다가왔다. 그는 꽤 유능한 교관이었기에 이번 구조조정에서도 안전했다. 그는 필립을 발견하곤 반가워했다.
“…교관님도 계셨군요?”
“오랜만입니다. 페렉 교관님.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하…하하… 프리실라 교관이 말도 없이 그만두고 나서 이렇게 죽나 싶었습니다만… 다행히 교육 과정이 개편되는 바람에… 겨우 살았습니다.”
“이미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까? 페렉 교관은 이번에 저와 함께 중급 마법 이론을 담당할 교관입니다. 교육자로서는 저보다 훨씬 나은 분이시더군요.”
캐슬러의 말에 페렉 교관은 부끄럽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 무슨 말씀을…?”
“페렉 교관님께서 훌륭한 교관이라는 건 저 또한 잘 아는 사실입니다. 함께 하시게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렉 교관은 필립의 평가가 기쁜 듯 어색하게 웃었다.
곧 마법 학부 교직원들이 본래 자리로 돌아갔고, 그 틈을 노려 검술 학부의 신입 교관 한 명이 필립에게 다가왔다.
‘…어?’
필립은 이번에도 아는 얼굴이 나오자 깜짝 놀라 눈을 비볐다.
‘아니, 이 여자가 왜…?’
“처음 뵙겠습니다. 오스왈드 교관님. 고급 검술 과목의 교관인 오필리아입니다.”
그녀는 붉은 머리칼에 꽤 아름다웠으나 조금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필립은 그녀의 뺨 아래에 살짝 나 있는 칼자국을 확인하고선 눈을 의심했다.
오필리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 교관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필립을 바라보자, 길모어 교관은 고개를 돌렸다.
“동료 교관님들께 들으니, 오스왈드 교관님께서 실력이 아주 뛰어나시다고 하더군요. 기회가 된다면 제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필립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오필리아가 아니었고, 평민 또한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틴 바로운. 바로운 변경백 가문의 영애이자 헤일리 바로운의 누나였고, 같은 세대에서 펠리시아 다음으로 유명한 여검사였다.
“…저 같은 게 가르침을 내릴 주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번 검을 섞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왜 정체를 숨기고 교관 같은 걸 하는 거지?’
“어머, 화끈하신 분이네요. 그러면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녀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사라졌고,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외모야 얼마든 닮을 수 있겠으나 풍기는 기도 자체가 교관 같은 걸 하기엔 터무니없이 강했다.
펠리시아와 비교해도 조금 처지는 정도.
거기에 외모적인 특징을 조합하니 이건 분명히 크리스틴 바로운이었다.
아무래도 변경백 가문에서 뭔가 꾸미고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