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98화 (98/119)

098화

* * *

황금 같은 주말이었다.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난 필립은 가슴팍에 올라온 작은 생명체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이러는군.”

부드러운 은색 털의 작은 강아지였다. 태어난 지 고작 나흘이 된 이 생명체는 이미 어느 정도 성장한 상태에서 태어났기에 겉으로 보면 생후 몇 주는 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엄마 품을 탈출해서 필립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대체 문은 어떻게 열었대?”

요 며칠 사이 이런 습격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필립은 자기 전 분명히 문을 닫아 놓았다. 급한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잠그지는 않았다 해도 이런 조그만 게 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었다.

필립은 강아지를 안아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 작은 주인님. 제 아이가 혹시 또 거기로 갔나요?”

얼마 전 함께 무인도를 탈출한 월랑족 로로의 목소리였다.

“그래.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일단 들어와.”

곧 편한 옷차림의 은발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필립의 침대를 차지한 강아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요 말썽꾸러기 같으니….”

“혼내지는 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사람 말은 다 알아듣는 것 같더라고. 곧 말문이 트일 것 같은데….”

그녀는 필립의 별장에 머물게 된 이후 본래는 하녀로서 부려지길 원했다. 그러나 필립은 전문가가 아닌 이에게 집안일을 맡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경비원으로 고용하기로 했다.

‘꽤 훌륭한 경비견……아니, 경비원이지.’

정보를 전달하러 왔던 흑묘족 몇 명이 갑자기 나타난 은색 늑대 탓에 기절한 걸 제외하면 그녀는 꽤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다.

필립이 정한 그녀의 임무는 ‘사고를 치지 않고 아이를 돌보며 잘 먹고 잘 쉬는 것’이었다.

실제로 균형 잡힌 식사와 충분한 휴식을 취한 그녀는 무인도에 있던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아이는 제가 데려갈게요. 부디 푹 쉬시길.”

로로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물러났다. 필립은 하녀가 준비해 준 물로 세수를 한 뒤 방을 나섰다. 어차피 잠은 다 잤기 때문이었다.

바람을 쐬기 위해 뒷마당으로 나가자 루아가 목검을 들고 검술을 수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필립은 잠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을 쥐는 법조차 모르던 초보의 모습은 간데없고, 이제는 제법 검을 다룰 줄 아는 태가 났다. 고작 몇 달 동안 얻은 성과라곤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으나, 필립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천재는 저게 맞지.’

천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수준에 맞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필립에겐 그녀를 가르칠 능력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검술을 점검하고, 그녀가 수련 중에 느낀 의문을 해결해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어차피 그녀의 수준에선 지금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기초 검술, 그리고 고급 검술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 교관님!”

필립을 발견한 루아가 쪼르르 달려와 필립의 앞에 섰다. 필립은 손으로 그녀의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주었다.

“많이 늘었구나. 루아.”

‘이 속도로 계속 성장한다면, 올해 안에 오러 정도는 대충 다룰 수 있겠는데. 그때쯤 검신전에 데리고 가면 되겠지.’

이상하게도 원작에서 그녀를 죽도록 굴려서 성장시킬 때와 그리 다르지 않은 속도였다.

‘게임에선 기분 수치를 신경 써서 굴려야 했지. 시간표까지 만들고 온갖 이벤트를 계산한 루트까지 짜서. 그런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것만으로도 저런 성장 속도라니. 이래서 아이들한테 가장 중요한 건 성장 환경이라는 말이 나온 건가.’

필립은 만일 루아가 화목한 검술 명가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지 궁금해졌다.

“네! 요즘 들어 검이 가벼워진 것 같아요. 교관님.”

“…그래? 잘됐구나. 보다가 느낀 건데, 발이 조금만 더 가벼우면 훨씬 좋을 것 같다.”

“발이요?”

루아는 필립의 말을 듣더니 제자리에서 발을 콩콩 굴렀다. 그 귀여운 모습에 필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그런 느낌으로. 쿵, 하고 딛는 게 아니라 콩, 하고 짚는 것처럼 말이다. 임팩트를 줄 때만 무게를 실으면 된다.”

남이 듣는다면 무슨 개떡 같은 설명이냐고 탓할지 몰랐으나 루아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네!”

그때 뒷문에서 카밀라가 나오더니 필립과 루아를 발견하고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오라버니… 느, 늑대가! 늑대가 나타났어요! 응접실에 늑대가!”

“그거 그냥 늑대가 아니라 타니아처럼 말이 통하는 늑대니까 가서 인사나 좀 하렴. 며칠 전에 여기 온 은색 머리카락의 여인을 기억하니?”

“네? 아…네. 그 예쁜 사람이요? 귀여운 강아지를 안고 있던.”

“그 언니가 바로 그 늑대다.”

이미 타니아가 어린 여자아이로 변하는 모습을 보았던 카밀라는 금세 필립의 말을 이해했다.

“아… 타니아처럼요?”

“그래. 친해지기도 할 겸 함께 상점가에라도 갔다 오는 게 어떠니? 루아 너도 같이 가렴. 그녀는 사회와 좀 많이 떨어진 곳에서 오래 지냈으니 요즘 세상에 대해선 잘 모를 거다.”

필립은 그렇게 제안한 다음 자신의 잔머리에 감탄했다. 이렇게 되면 루아와 카밀라, 그리고 두 월랑족 모녀가 전부 별장을 떠나게 된다.

‘간만에 조용히 쉴 수 있겠는데.’

아이들이 귀찮은 건 아니었으나 가끔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휴식을 즐기고 싶은 날도 있었다.

“어… 그럴게요.”

“그러면 전 목욕하고 올래요!”

루아와 카밀라가 별장으로 들어가자 필립은 씨익 웃으며 오랜만에 보낼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프리비아 님도 내일이나 되어야 자기 둥지에서 나올 테니 오늘 하루 정도는 푹 쉬어도 괜찮겠지. 서재에 틀어박혀서 책이나 좀 읽을까.’

* * *

필립은 서재에서 책을 읽기 시작한 지 고작 한 시간 만에 중요한 손님의 방문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미리 알린 방문은 아니었고, 거의 급습에 가까운 방문이었다.

“아아, 나는 오슬레이 유세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황금 인장의 주인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손님은 갈색 머리카락의 노인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의 소유자였고, 그가 가진 재력치고는 허름한 옷을 입었으나 평범하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유세프 상회의 회주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미안해요. 하지만 워낙 바쁜 분이라….”

리즈리엘이 그녀의 부친 대신 사과했다. 필립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한번 만날 사람이었으니 그게 오늘이라도 상관없겠지. 이런 식으로 방문할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회주님께서 절 방문하신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단지 황금 인장의 주인을 한 번 보려는 건 아닐 테죠?”

노인, 오슬레이 유세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주도하는 필립을 보며 생각했다.

‘철이 없는 건가? 아니면….’

유세프 상회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이종족과 거래하는 상단이었다. 대륙에 미치는 영향력이 한 국가의 왕가보다도 더 큰 집단의 수장을 앞에 두고도 저렇게 여유로울 청년이 세상에 많지는 않을 터였다.

‘한번 찔러봐야 하는가.’

“이 사람의 목적을 밝히기 전에 먼저 하나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오슬레이 유세프의 질문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십시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필립 오스왈드. 당신은 황금 인장이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 아는 겁니까? 그게 상인이 아닌 이에겐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필립은 오히려 묻고 싶었다.

원작에서 저 노인은 대부분 맏딸인 델루안 유세프에게 살해당한다. 플레이어가 개입하지 않으면 보통은 그렇게 된다고 보면 되었다.

과연 저 노인은 황금 인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필립은 손가락에 낀 인장을 내밀며 피식 웃었다. 하필 가운뎃손가락이었으나, 이 세상에는 다행히 그 손 모양에 상응하는 욕설이 없었다.

“한 나라의 왕보다 만나기 어렵다는 유세프 상회의 회주가 직접 만나러 올 만큼 대단한 물건이란 건 압니다.”

그 모습을 보던 리즈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말을 안 들으셨어. 쓸데없이 자극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그녀는 필립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자부했기에, 자신의 부친에게 필립을 자극하지 않는 게 좋다고 조언했었다.

필립은 기본적으로 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말이 상당히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상대가 평범한 귀족 청년이었다면 저 정도 뉘앙스의 질문은 자극이 아니었겠으나 필립처럼 총명한 사람은 말의 속뜻을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지금 상황만 봐도 상인이 아닌 이에게 무용지물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조금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오슬레이 유세프는 헛웃음이 피식 나오는 걸 느꼈다. 막내딸의 말대로 저 잘난 청년은 보통 젊은이는 아닌 듯 보였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황금 인장을 양도받고 싶습니다. 물론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작전을 바꿔야 했다.

“…정당한 대가 말입니까?”

필립이 흥미를 느끼는 듯하자 오슬레이 유세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그게 아니라면 돈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 가지를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오스왈드 가문에 사병 만 명을 거느릴 수 있는 재화를 증여할 수도 있고, 유세프 상회의 개인 계좌에 그만한 돈을 예치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칼라리아 왕가에서 이 땅 전부를 사들일 수도 있고 말입니다.”

“오….”

역시 대륙 최고의 상회 대표라 그런지 스케일이 남달랐다. 하지만 필립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어차피 나중에 마족들이 본격적으로 행동을 시작하면 금화 같은 건 지금처럼 큰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되었으니까.

“원하는 게 한 가지가 있긴 합니다만.”

필립이 그렇게 말하자 오슬레이 유세프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고, 리즈리엘은 숨을 삼켰다.

‘아잇! 왜 또 저러는 거야…?’

황금 인장이 부친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그녀가 상회주가 되는 건 거의 불가능해졌다. 델루안 유세프가 사라졌다 해도 아직 오빠 한 명이 남았고, 그가 가진 세력은 여전히 리즈리엘이 가진 것보다 훨씬 많았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그러면 뭐… 옆에 막내 따님에게 상회주 자리를 넘기고 완전히 은퇴하십시오. 그러면 황금 인장을 양도해 드리겠습니다.”

필립은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는 듯 말했고, 오슬레이 유세프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필립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건 돈으로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만.”

필립은 그에게 다시 가운뎃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이 반지는 돈으로 사려고 하셨잖습니까.”

오슬레이 유세프는 필립의 말에 이번엔 눈썹을 꿈틀했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것이었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입니다. 회주님. 애초에 이 물건이 왜 제게 있겠습니까? 이게 우연히 얻을 만한 물건은 아니잖습니까. 존재를 알고, 용도를 알지 않고 찾아낼 수 있는 물건입니까? 날로 먹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제 마음에 드는 부탁이나 제안이 나오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을 적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저 건방진 핏덩이가….’

오슬레이 유세프는 저 단도직입적인 말에 잠깐 분노했으나, 이내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감정에 휘둘리고 살아도 될 만큼 만만한 삶을 살진 않았기에 먼저 필립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겁이 없는 건 아니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겁이 많았다. 오슬레이 유세프가 판단하기에 필립은 겁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범국가적 상회의 주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생각이 없는 건 더더욱 아니고. 그렇다면… 아쉬운 게 없는 건가?’

필립의 신분과 환경을 생각했을 때, 출세를 지향적이거나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저런 식으로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먼저 건네서 상대방의 반응을 보려고 하거나, 혹은 어설프게 주도권을 잡으려고 들 테지.’

적어도 저렇게 대놓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라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잠깐 고민하던 오슬레이 유세프는 곧 정답을 찾아냈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기에.

‘아쉬운 게 없다는 건가. 저렇게 어린 놈이 벌써?’

상인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상대가 바로 아쉬운 것도 없고 딱히 원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상대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그는 두 가지나 알고 있었다.

하나는 힘으로 압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패배를 인정하는 것.

그러나 힘으로 압박하기엔 필립의 배경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오스왈드 백작 가문은 칼라리아의 여러 귀족이 우러러보는 명문가였으며, 왕가와도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가문의 아들과 원한을 쌓아서 좋을 게 없었고, 무력을 동원해 인장을 빼앗을 수도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이렇게 방문하기 전에 진작 시도했어야 했다.

오슬레이 유세프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소파에서 일어나 필립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황금 인장의 주인이여. 상회는 당신이 그 인장의 정당한 소유자임을 인정합니다. 당신이 가진 그 인장은…….”

“예, 예, 압니다. 알아요. 유세프 상회에서 일 년에 한 번 개최되는 본회의에서 회주님과 같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고, 후계자 경쟁에 공식적으로 간섭할 수 있죠. 그리고 또….”

말꼬리를 늘이며 필립은 오슬레이 유세프의 반응을 살폈다. 만일 그가 황금 인장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알고 있다면 그와 나눌 대화가 늘어날 것이었다.

“…초대 회주의 비밀 금고를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사람은 십여 년 전 그 금고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며, 그것을 열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당신을 인장의 주인으로 인정하였으니 미리 밝혀두는 겁니다.”

오슬레이 유세프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의 반응을 살피려던 필립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곧 오슬레이 유세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눈가의 주름이 펴질 정도였다.

“알고… 있던 겁니까? 그 금고의 존재를?”

‘그 할아버지 참 눈치 한 번 예술적으로 빠르시네.’

역시 대상인다운 눈치라고 생각하며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도 물론이거니와 행동력 또한 남달랐다. 저런 비밀을 스스로 밝혀 버리는 결정은 아무나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장을 얻은 곳에 초대 회주가 남긴 마법 화상이 있더군요. 그분께 들었습니다.”

필립은 그렇게 말한 뒤 리즈리엘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냐는 듯 배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필립을 째려보다가, 필립과 시선을 마주치자 홱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삐졌군.’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아십니까?”

필립이 묻자 오슬레이 유세프는 고개를 저었다.

“단지 보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압니다만.”

“아마 그럴 겁니다. 참고로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아는 건 위치 정도죠.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금고를 여는 걸 돕겠습니다. 그리고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솔직히 저도 보물 같은 건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가문이 좀 잘 살아서요. 그러니 흥미가 가는 몇 가지만 챙길 생각입니다. 만약 상회 측에 중요한 물건이라면 포기하도록 하죠. 그 대신 그곳에는 리즈리엘 유세프도 동행할 겁니다. 그리고 그녀 또한 뭔가 하나 골라서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오슬레이 유세프는 필립의 그 제안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무래도 금고의 존재를 미리 밝힌 건 정말이지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사고방식이 다르군. 크게 될 놈이다. 이렇게 되면 다음 후계자는….’

“그렇게 합시다. 언제쯤 방문하실 생각입니까?”

“평일에 수업이 있으니 주말이 좋겠습니다. 다음 주도 좋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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