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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94화 (94/119)

094화

* * *

“이렇게 우리를 찾아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곳에서 나간다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바네사 비톨로는 30대 중반의 여인이었다. 제법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일 그녀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 탓에 꽤 쇠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방금 같은 상황에서 조악한 나무로 만든 창 한 자루에 의지해 아이들 앞을 막아선 것만으로도 그녀는 존경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습니까?”

“저희는 아마도 여러분이 들어왔을 통로로 입장했고, 절 마지막으로 그 통로는 닫히고 말았습니다.”

비톨로 교수가 묻자 필립이 대답했다. 비톨로 교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으나, 절망은 엿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검을 다룰 줄 아는 교수와 교관들이 합류했다는 것만으로도 꽤 안심한 듯했다.

“일단 시체를 좀 정리해야겠습니다. 피 냄새를 맡고 짐승들이 몰려들 수도 있거든요. 늑대의 피라 그것들보다 약한 놈들은 오히려 피하겠지만 곰이나 호랑이 따위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필립의 제안에 따라 동굴 주변을 정리했다. 그가 자연스럽게 상황을 주도하는데도 불구하고 비톨로 교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해변에서 이 동굴까지 오는 동안 다친 학생도 있었고, 대부분 겁에 질린 채였다. 녹색 마탑 출신의 마법사인 교수조차도 단지 한 명의 나약한 여인이 된 지금, 학생들이 침착함을 유지하기 바라는 건 무리라고 할 만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셰릴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고,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들어오는 방법이 있었으니 나가는 방법이 있을 것 같기는 하구나.”

나름대로 희망적인 견해였다. 비톨로 교수 또한 필립의 말에 동의했다.

“이곳은 아무래도 마법적인 힘으로 만들어진 아공간인 듯 보인다. 필립 교관의 말대로 어딘가에는 나갈 수 있는 장치가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가 왔으니 고작 짐승들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호랑이든 곰이든 전부 쫓아내 줄 테니까.”

펠리시아 또한 말을 보탰다. 검술 학부의 교수인 그녀였기에 학생들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나 혼자였거나 검술 학부 교직원들과 함께였다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마법 학부 학생들이 껴 있으니 난이도가 제법 높아. 아이들이 안전하도록 대비하면서 이 넓은 섬에 무작위로 생성된 탈출 포탈을 찾아내야 하니까. 그리고 어쩌면….’

필립은 최악의 경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고개를 털어 떨쳐냈다.

이런 공간에 종종 나타나곤 하는, 재앙에 가까운 집단. 그들을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필립 자신의 안전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식량을 구해야 하고, 불을 피워야 합니다. 깨끗한 식수 또한 확보해야 하고요. 이곳에 얼마나 있게 될지 모르니 모든 걸 주의해야 한다는 걸 다들 명심하세요.”

* * *

마른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이용해 모닥불 두 개를 만든 필립은 디아나에게 땔감을 구할 것을 부탁한 뒤 펠리시아와 함께 근처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식수를 구할 수원지를 비롯해 찾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필립. 대체 이런 것들은 어디서 배운 거야? 불을 피우는 거나 캠프를 설치하는 건 그렇다 치고, 이런 상황에서 뭘 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아는 것 같은데?”

펠리시아의 칭찬에 필립은 어깨를 으쓱했다.

“책을 좀 열심히 읽었거든.”

그가 어렸을 때, 온갖 자연 속에서 살아남는 내용의 책이 어린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필립은 단지 그것들을 열심히 읽었을 뿐이었다.

동굴로부터 조금 더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자, 필립과 펠리시아는 곧 길이라고 불릴 만한 흔적을 찾아내었다.

발자국으로 다져져 풀이 자라지 않게 된 길이었기에 헷갈릴 수가 없었다.

“우리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걸까? 어쩌면 우리처럼 이곳에 갇혀서 오랜 시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펠리시아가 중얼거렸다. 필립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신발이 아니라 맨발로 다닌 흔적이잖아.”

그는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찬 검의 상태를 다시 한번 살폈다.

‘좋됐군.’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던 경우의 수가 드러난 사실로 나타나자 필립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제발 말이 통하는 종족이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즉시 필립과 펠리시아가 선 곳 주위로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늑대 울음소리였다.

“그르르르….”

“으르르….”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것만 같은 하울링에 펠리시아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은색 털을 지닌 늑대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늑대보다 덩치가 더 컸고, 발톱이나 이빨이 훨씬 날카로웠다.

‘…하필 이놈들이냐? 아니, 오히려 다행인가?’

“내가 오른쪽 놈을 맡을게.”

펠리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고, 필립은 급히 그녀를 만류했다.

“아니, 잠깐만. 그냥 늑대가 아닌 것 같아. 우리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관찰하는 것 같지 않아? 일단 공격하지 말고 기다려 보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던 펠리시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늑대들은 지금 당장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때 늑대 중 한 마리가 주둥이를 열었다.

“…뭐냐, 너희는? 인간이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냐?”

거친 사내의 목소리였다. 늑대가 난데없이 공용어로 말을 걸자 펠리시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여보. 마누라. 저 인간들 좀 보라고. 인간을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이지?”

마치 신기한 구경거리를 본다는 듯한 말투였다. 옆에 서 있던 암컷 늑대가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백 년은 넘은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본 인간은 시체였잖아요. 새끼 밴 곰의 점심밥이 되었지 않았던가요?”

“그래. 그랬었지. 오래 살다 보니 별의별 것이 다 헷갈리는군. 그래서 저것들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죽여야 하나? 그놈들이 보냈을 수도 있으니.”

필립은 저 늑대 부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원작 세계관에서 ‘월랑족’이라 불리는 고대 종족으로, 수인의 특징을 가졌으나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이들이었다.

수집할 수 있는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자면, 월랑족 전사 다섯 명이 모이면 어린 드래곤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저 은색 털가죽은 오러 마스터의 검강도 어느 정도는 견뎌낼 수 있었고, 기본적으로 항마력을 보유하고 있어 마법도 잘 통하지 않았다.

가장 까다로운 건 저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신체 능력이었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데다 저 발톱은 미스릴이 섞인 금속으로 제련한 갑옷조차 아무렇지 않게 찢어발겼다.

오러를 쓸 수만 있다면 어떻게 이길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필립은 현재 오러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싸워 이기는 방법은 지금으로선 실행할 수 없다고 봐도 좋았다.

“…당신들은 누구길래 우리를 죽이니 살리니 마음대로 말하는 거죠?”

펠리시아가 결국 검을 뽑았다. 필립은 그녀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그녀의 앞을 막고 나섰다.

여기서 잘못 까불었다간 당장 오체분시가 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우연히 이곳에 들어온 거지, 딱히 무슨 목적을 가지고 온 게 아닙니다.”

필립이 앞으로 나서자 두 마리의 월랑족은 필립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코를 킁킁대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저 인간은 냄새가 좋아요. 죽이는 건 나쁜 생각인 것 같아요.”

“그렇군. 신기한데? 어린 월랑족 냄새가 나. 어떻게 인간에게서 이런 냄새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암컷 늑대는 필립의 근처까지 다가와 그의 목덜미와 겨드랑이의 냄새를 맡았다. 필립은 미친 듯이 부담스러웠으나, 티를 내지 않고 그들이 하는 대로 두었다.

오히려 펠리시아가 검을 휘둘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굴렀다.

암컷 늑대는 필립을 탐색하는 행위를 마치더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필립은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곧 늑대들의 몸뚱이에서 환한 은색 빛이 터져 나오더니, 곧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다. 마치 흑묘족이 변신하는 것과 같은 과정이 끝나자 가죽옷을 입은 남녀가 나타났다.

“원래는 그냥 죽이려고 했는데, 그쪽 인간에게서 죽이면 안 될 것 같은 냄새가 나는군. 너는 뭐냐? 네 어미가 월랑족 도망자라도 되는 거냐?”

그중 날카로운 인상의 은발 사내가 물었다. 필립은 그들의 질문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하려 노력했다.

“제가 알기로 월랑족은 천 년 전에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아닐 겁니다.”

“그래?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뭐 그런가 보지. 그러면 왜 이런 냄새가 나는 걸까?”

그의 아내로 보이는 부드러운 인상의 은발 여인이 눈을 깜빡이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어쩌면 그분의 먼 후계자가 아닐까요?”

“뭐라고!”

그 발상이 꽤 놀라웠는지 월랑족 사내가 탄성을 질렀다. 그는 필립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필립은 하마터면 견갑골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까불었으면 뒈졌겠군.’

식은땀을 한 방울 흘리며 필립은 월랑족 사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인간아. 마스터 오템, 그분을 아느냐?”

갑자기 언급된 마스터 오템의 이름에 필립은 눈을 부릅떴다.

그는 필립이 익히고 있는 월광검의 창시자이자, 검성 마스터 솔베인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오러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제가 그분의 기술을 익히고 있기는 합니다만…….”

필립이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월랑족 사내는 갑자기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크하하하! 그래! 어쩐지 냄새가 좋더라니!”

“그분의 후인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다니…이럴 수가….”

그의 아내는 가슴에 손을 모은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필립은 말없이 옆을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니? 필립?’

눈빛만으로 그렇게 질문하는 펠리시아의 얼굴이 보였다.

필립은 어깨를 으쓱하려고 했으나 강한 힘으로 눌리고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나도 몰라. 누나.’

두 월랑족 남녀는 다시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필립의 앞에 배를 대고 엎드렸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을 지키려는 개와 같았다.

“당신이 그분의 진정한 계승자라면, 당신은 저희가 그분께 바쳤던 충성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으십니다. 부디 그분의 뒤를 이었다는 증거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수컷 늑대가 갑자기 정중해진 말투로 말했다.

“증거라면, 월광검을 말하는 겁니까?”

“네, 맞아요. 월광검!”

필립이 되묻자 암컷 늑대가 기쁜 나머지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그… 아니… 그게.”

필립은 땀을 삐질 흘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어떻게 들릴지 잘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뻔히 들통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좀 곤란한데요…?”

필립이 그렇게 말한 순간 늑대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뭐라고? 지금 우릴 속인 건가?”

“만일 거짓말이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죠. 안 그래요, 여보?”

당장이라도 물어 죽일 것만 같은 흉험한 늑대의 눈빛을 마주한 필립이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는 오러를 못 쓰는데 뭐 어쩌라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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