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립은 어떻게든 월랑족 부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곳에서 마력이든 오러든 쓸 수 없다는 건 월랑족들 또한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판단을 보류하겠다. 말해두는데, 정말로 거짓말을 했다면 너는 물론이고 너와 함께 왔다는 인간들까지 모두 물어 죽이고 말 테다. 네게서 그분의 흔적이 느껴지지만 않았다면….”
수컷 늑대가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내자 펠리시아는 흠칫 놀라며 필립의 팔을 끌어안았다.
“속고만 사셨습니까? 저는 정말로 월광검을 익혔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필립이 그렇게 말하자 수컷 월랑족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감히 월랑족을 속이려 드는 미친놈은 천 년 전에 오직 한 명뿐이었지. 그 빌어먹을 놈 덕에 지금 우리 일족은 뿔뿔이 흩어져 봉인되었지만. 본래라면 인간은 보는 족족 찢어 죽였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살벌한 눈으로 필립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래서 인간 너는 네가 그분의 후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셈이냐? 증명하지 못한다면 너는 거짓말쟁이가 되는 셈이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제가 마스터 오템의 기술을 익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 천 년 전, 우리 종족은 대를 이어 그분을 섬기기로 했으니. 그분의 독문 기술인 월광검이야말로 ‘달의 아이들’의 희망 그 자체다. 만약 네가 정말로 월광검의 후계자라면, 너는 마땅히 온 세상에 흩어진 ‘달의 아이들’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응?’
필립은 월랑족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언급한 달의 아이들이란 이 시간대의 대륙에선 사용하지 않는 단어였다.
먼 과거, 인간이 마나를 모르던 시절. 대륙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들이었다.
밝은 낮에 활동하는 ‘태양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종족들. 그리고 어두운 밤에 활동하는 ‘달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종족들.
그들은 강대한 힘을 지닌 드래곤과 대륙을 함께 수호하였고 마족들은 감히 대륙을 넘보지 못했다.
그러나 천 년 전, 마스터 솔베인이 인간의 시대를 연 이후로 그들은 대륙에서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다.
물론 흑묘족 같은 예외도 있었으나, 흑묘족은 애초에 그 시절에도 숨어 지내던 이들이었기에 경우가 조금 달랐다.
‘…내가 모르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필립은 검성 마스터 솔베인과 마스터 오템에 관한 숨겨진 정보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저 월랑족들은 아마도 천 년 전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이…이거. 잘만 하면?’
만약 월랑족의 말이 사실이라면 필립은 아주 강력한 아군을 얻는 셈이었다.
“…잠깐, 아주 잠깐만 마나를 다룰 수 있다면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곳을 나간다거나, 혹은 마나를 다룰 방법을 찾는다면 말이죠.”
필립의 말에 수컷 월랑족은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그런 방법을 알았으면 나와 내 아내는 지금쯤 이 빌어먹을 공간에서 벗어나 인간의 도시를 신나게 부수고 있었을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암컷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남편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난폭한 말 좀 그만둬요. 여보. 정말로 그러지도 않을 거면서. 그리고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이제 곧 놈이 나와요.”
아내의 말에 수컷 늑대는 빠드득 이를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랬지. 지난 천 년 동안 수백 번을 시도했지만, 한 번도 잡지 못한 그놈이 나오는군. 용암도 몇 초를 견뎌내는 내 털가죽을 몇 번이나 까맣게 태운 그놈이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저 약해빠진 인간들을 데리고 그 빌어먹을 불새를 사냥하자는 말이야?”
이번에는 암컷도 참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화를 내는 거예요? 난 당신의 반려인데…?”
부부싸움이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필립은 급히 앞으로 나섰다.
“일단 무슨 일인지 말부터 해 주시겠습니까? 혹시 저희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습니까. 어떤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모르는 방법을 알 수 있을지 누가 압니까?”
“…흠. 그럴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내 등에 타라.”
아내가 화가 난 듯하자 조금 겁이 난 듯한 수컷 늑대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 * *
월랑족 부부는 필립과 펠리시아를 등에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들은 매우 민첩해서 한달음에 나무를 타고 올라 순식간에 숲을 빠져나갔다.
‘으아아앙!’
펠리시아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월랑족의 존재 자체도 무서웠으나 그들의 등에 탄 지금이 훨씬 더 무서웠다.
바람을 가르고 상승할 때는 눈을 질끈 감으면 되었으나, 다시 낙하할 때 아랫도리가 서늘한 그 감각만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목적지는 바로 섬 중앙에 솟은 산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기에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 도착했다.”
필립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나, 펠리시아는 허벅지를 달달 떨며 암컷 늑대의 등에서 겨우 내렸다.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네. 불쌍해라.”
월랑족 암컷은 펠리시아에게 모성애 같은 걸 느꼈는지 혀를 내밀어 그녀의 뺨을 핥았다. 펠리시아는 그 행위가 마치 한입에 그녀를 잡아먹기 전 맛을 보는 것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겁쟁이 계집애는 내버려 두고, 저길 봐라. 저 불타는 알이 보이나?”
수컷의 주둥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필립은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환하게 빛나는 뭔가를 보았다. 그 물체를 본 그 순간 필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스가 피닉스였군. 천만다행이네.’
피닉스는 이런 무작위 필드에 나타나는 보스 중 그나마 쉬운 놈이었다. 상대법만 제대로 알고 있다면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종류였기 때문이었다.
“예. 피닉스의 알 같은데, 상태를 보니 나흘 정도면 부화하겠군요.”
피닉스는 수백, 혹은 수천 년을 주기로 다시 태어나는 환수였다. 원작에서 은근히 자주 나타나는 존재였기에 필립은 저 환수의 상대법을 여섯 가지는 넘게 알고 있었다.
‘무력이 필요한 방법을 모두 제외하면… 것뿐인가?’
“나와 내 아내는 이곳에 갇힌 천 년 동안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수도 없이 고민했지. 그리고 저놈을 죽이는 것 말고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 봤다.”
“옳은 판단입니다. 아마도 저기서 깨어날 피닉스의 몸속에 이곳의 마나를 동결시키는 뭔가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저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해치울 수 없죠.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다시 알로 돌아가 버리고, 알이 된 상태일 때는 열 때문에 접근조차 쉽지 않으니까요.”
필립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펠리시아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그러면 너는 저걸 어떻게 할 방법을 안다는 말이냐?”
“물론입니다. 갓 부화한 상태라면 더 간단하죠. 지금부터 방법을 설명할 테니, 제 말대로만 하면 쉽게 성공할 겁니다. 실패하는 게 오히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근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월랑족 부부는 점점 기대에 찬 표정으로 필립이 다시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닉스가 부화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막대한 양의 불의 자연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만약 피닉스가 부화 장소로 산을 선택했다면, 그 산은 용암이 잠든 화산일 수밖에 없습니다. 피닉스가 환수로서 이름 높은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활화산에서 발생하는 자연력을 흡수하기 때문에 피닉스가 존재하는 한 화산이 폭발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늑대와 사람을 포함해서 그 자신뿐이었으나, 필립은 아무렇지 않게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만약, 저렇게 알 속에 갇혀 부화를 기다릴 때 화산이 폭발하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피닉스는 완전한 부화를 포기하고 알을 깨고 나와야만 합니다. 알 상태에서 용암에 삼켜지면 그대로 화산의 일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죠. 이게 무슨 말이냐? 우리는 알 상태인 저 피닉스가 화산이 폭발한다고 착각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만 합니다.”
“…쉽게…쉽게 설명해라.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만 말해 주면 안 되나?”
수컷 늑대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앓는 소리를 냈다. 암컷 늑대는 중간부터 필립의 말을 걸러 듣고 있었다.
필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황. 많은 유황. 더 많은 유황이 필요합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 전조 현상이 유황 가스의 누출이기 때문에, 우리가 유황 광석을 모아 저 알 근처에 던지기만 해도 피닉스는 알아서 껍질을 깨고 나올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피닉스는…….”
“본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약해진 개체라는 말이지? 필립?”
펠리시아의 말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유황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 걸까?”
필립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수컷 월랑족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땅을 파야지. 아주 열심히.”
* * *
수컷 월랑족이 유황 냄새를 찾아 땅을 앞발로 땅을 파는 동안, 암컷 월랑족은 필립과 펠리시아, 그리고 동굴에 남은 학생들과 교수를 위해 커다란 노루 몇 마리를 대신 사냥해 주었다.
게다가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개천까지 안내해 주었으니 필립으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난폭한 수컷과 반대로 암컷은 꽤 온순했고 어느 정도 사람을 좋아하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필립은 바닥에 엎드린 그녀의 배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부자연스럽게 볼록했다.
‘……임신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과식해서 나온 배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암컷 월랑족이 쓸쓸한 목소리로 긍정했다.
“아이를 가진 게 맞으니 그렇게 눈치 안 봐도 돼요. 이젠 이 아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거든요. 천 년을 품고 있었으니….”
“출산하지 못한 겁니까?”
필립이 묻자 암컷 월랑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곳에서는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남편과 이곳에 봉인되었을 때 저는 이미 임신하고 있었고, 몇 년, 수백 년이 지나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거든요. 어쩌면, 이곳을 나가면 낳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었어요.”
늑대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만약 이곳을 나가게 된다면 제가 직접 알아보겠습니다.”
“이 아이가 살아서 들판을 뛰노는 모습을 제가 볼 수 있을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저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시 모르니 유황을 캐는 걸 돕지는 마십시오. 유황 가스가는 태아가 기형적으로 태어날 확률을 높입니다.”
“…그러면 그이 혼자 백 근이 넘는 유황을 캐야 하는데요?”
“그래야지 뭐 어쩌겠습니까?”
이 시점에서 암컷 월랑족은 필립이 정말로 오템의 후계자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마나만 다룰 수 있으면 틀림없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는 필립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으나, 필립이 자신의 남편을 어떻게 괴롭힐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은근히 속이 좁으시구나. 나라도 잘해야겠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토끼 몇 마리를 더 잡기 위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