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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87화 (87/119)
  • 087화

    * * *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쌓여 있는 업무가 많을 경우, 우선순위를 정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부터 서순에 맞게 해결해야 한다는 건 일을 좀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하지만 필립처럼 벌인 일이 많은 사람에겐 그 순서를 정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보자, 일단 엘릭서를 만들어야 하고, 유나에게 받은 구슬로 네리아를 강화해야 하고, 황금 사과도 써먹어야지. 게다가 국왕과 유세프 상회 대표의 방문도 받아야 해.’

    현시점에서 남은 방학은 보름 남짓, 그 안에 이 모든 걸 해결하려니 벌써 어질어질했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엘릭서 제조였다.

    요즘 들어 은근히 상냥해진 프리비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고, 이곳 별장에서 지내다 편안함에 취해 눌러살 마음을 먹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상전을 모시고 살 생각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재료들을 방치해 두면 상태가 나빠져 제대로 된 엘릭서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빨리 고쳐주고 쫓아내든 해야지.’

    게다가 루아나 카밀라 같은 어린애들과 달리 성인 여성이었기에 이곳에 오래 있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내가 이 노가다를 다시 하게 될 줄이야.”

    필립은 엘페니아 숲에서 얻은 재료들을 급조한 실험대 위에 늘어놓았다. 든든한 물주를 둔 필립마저 손이 절로 떨릴 만큼 비싼 재료들.

    그중 가장 비싼 건 ‘뇌주’였는데, 본래 이건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뇌 속성의 강대한 자연력이 담겨 있는 재료였기에 마탑들이 보기만 해도 침을 흘릴 만했고, 당장 필립도 엘릭서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방법을 일곱 가지는 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다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재료였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뇌주가 지닌 번개의 기운이 아니면 다른 재료들을 정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뇌주의 형태는 동그란 구슬이었다. 반투명한 회색 구슬 안에 휘몰아치는 번개가 담겨 있었는데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면 천둥소리가 들렸다.

    필립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잘못 건드리면 골로 갈 것 같은데….’

    일단 실험 삼아 뇌주에 손을 올린 필립은 오러를 움직여 뇌주를 자극해 보았다. 곧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거대한 에너지가 팔을 타고 밀려들었다.

    손과 팔에서 전류가 파지직 소리를 내며 솟았고,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악!”

    필립은 급히 손을 떼었다. 감전의 여파로 몸을 부르르 떨며 그는 생각했다.

    ‘뒈질 뻔했군.’

    팔과 몸에서 까만 연기가 흘렀다. 오러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감전당해 죽었을 터였다.

    그 시점에서 필립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어도 번개 저항 마법의 도움 정도는 받아야만 했다.

    가장 먼저 선택된 조력자는 쟈니스 무르엘라였다. 엘페니아 숲에 다녀온 뒤 며칠 정도를 집에서 쉬던 쟈니스는 요즘 자기 집보다 별장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전격 저항 마법 말씀이세요?”

    “그래.”

    “뭘 하려고 그러시는 건가요?”

    “이 구슬에 담긴 번개를 이용해서 재료들을 정제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힘이 강해서 번개 저항 마법이 필요해졌거든.”

    쟈니스의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전문 분야가 나오자 이 기회에 필립에게 입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흐응, 그런 건 마법사에게 맡기셔야죠. 교관님. 전 어렸을 때부터 요정의 날개나 유니콘 갈기 같은 희귀한 재료들을 다뤄 왔거든요.”

    ‘뇌주는 못 다뤄봤을 것 같은데.’

    무르엘라 가문의 가주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도 뇌주를 직접 다룬 적은 없을 것이었다. 전격 마법을 전문으로 다루는 황색 마탑에서도 보물로 취급되는 물건이었으니까.

    필립은 쟈니스의 정수리에 손을 얹으며 부드럽게 달랬다.

    “이건 네가 다루기엔 좀 버거울 것 같으니, 내게 마법이나 좀 걸어주면 될 것 같다.”

    자존심이 제대로 긁힌 쟈니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흥! 고작 이런 구슬 같은 건 눈을 감고도 다룰 수 있거든요!”

    쟈니스는 뇌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설마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 몰랐던 필립은 곧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

    다행히 필립이 발로 밀어서 금세 떼어냈기 때문에 쟈니스는 크게 짜릿하기만 했을 뿐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크게 당하지는 않았다.

    “으기기긱…!”

    쟈니스의 몸에서 전류가 빠져나가자 조금 경련하기 시작한 그녀는 몇 초 정도 실신한 뒤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이걸… 어…어띃게… 다룬다에요? 아, 아니, 다루다는 겠어요…?”

    충격 탓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필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엄한 눈으로 쟈니스를 바라보았다.

    필립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쟈니스는 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쟈니스. 내가 안 된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알겠지?”

    “…네. 교관님.”

    잔뜩 혼이 난 강아지처럼 축 처진 쟈니스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면 교관님. 저희 오라버니께 부탁해 볼게요. 이건 제가 할 줄 아는 저항 마법으로는 안 될 것 같아요.”

    * * *

    “하하,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니 다행입니다.”

    필립의 실험실에 초대된 캐슬러 무르엘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여유를 보였다.

    최근 얻은 깨달음 덕에 그의 경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수준에 이르렀다. 본래도 한 마탑의 쿼터마스터였던 그는 본래도 나이에 비해 매우 뛰어난 실력을 지녔었다.

    지금 그는 한 마탑에 많아야 세 명뿐인 하프 마스터들과 비슷한 수준에 달했다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었고, 몇 년 뒤에는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필립이 미안한 표정을 짓자 캐슬러 무르엘라는 손까지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니,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어 저는 오히려 마음이 편합니다. 전격 저항 마법이라면 얼마든지 걸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가져온 물건들을 풀어놓았다. 필립도 알 만한 물건들이었는데, 마법의 효과를 높여 주는 촉매들이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한다고?’

    고작 전격 저항 마법을 쓰기 위해 금화 수십 개짜리 촉매들을 흔쾌히 투척하는 모습에 필립은 감탄했다.

    캐슬러 무르엘라는 지팡이를 손에 들고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외웠다. 촉매에서 빛이 사라지고, 마법의 힘이 더욱 강화되었다. 필립은 자신의 몸 주변에 신비한 힘이 응집되는 걸 느끼곤 자신감을 재충전했다.

    “그런데 대체 저게 어떤 재료입니까? 저는 저런 구슬을 본 적이 없습니다.”

    견문이 넓은 캐슬러조차도 뇌주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만큼 희귀한 소재였고 또한 다룰 수 있는 이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뇌주입니다.”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뇌주에 손을 뻗었다.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던 캐슬러가 크게 놀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건 고작 전격 저항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을….”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필립의 손이 뇌주에 닿는 순간 어마어마한 전격이 지하 실험실을 가득 채웠다. 황급히 방어 마법을 시전한 캐슬러는 필립의 안위부터 살폈다.

    “으그그그극!”

    ‘아니 저걸 버티네?’

    마치 번개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필립은 강력한 전격 속에서 이를 악문 채 버티고 있었다. 전격 저항 마법이 있다고 해도 저걸 맨몸으로 버티는 건 인간이 아니라 훨씬 고등한 종족이라도 어림없을 터였다.

    ‘…제어하고 있다고, 저걸?’

    몸에 지닌 오러로 전류를 통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치명적인 장기를 피하고, 오직 오러로 강화할 수 있는 뼈와 힘줄, 그리고 근육으로 저 강대한 힘을 제어할 수 있다는 건 기본적으로 마력에 대한 감각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였다.

    “괘, 괜찮으십니까? 교관님?”

    ‘이게 괜찮아 보이냐?’

    한편 필립은 죽을 맛이었다. 집중이 아주 잠깐만 풀려도 전류가 심장을 태울 것만 같았다. 드래곤 하트를 한번 경험하지 못했다면 결코 통제하지 못했을 만큼 강한 힘이었다.

    뇌가 근육과 관절에 내리는 신호 또한 전류로 이루어졌기에, 필립은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팔꿈치를 움직이려 하면 발가락이 움직였고,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하면 입술이 움직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어느 정도 신체의 통제권을 회복한 필립은 실험대 위의 재료 중 몇 가지를 골라 재빨리 다듬기 시작했다.

    ‘이젠 진짜 죽겠군.’

    본래 원작라면 번개 속성의 데미지를 줄여주는 장비와 장신구를 있는 대로 착용한 뒤 해야 할 작업이었으나, 이 세상에선 괴수를 잡는다고 아이템이 나오는 곳이 아니었다.

    마지막 힘을 다해 뇌주를 저 멀리 던져 버린 필립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헉…헉….”

    “세상에, 정말로 대단합니다. 어떻게 저 강력한 번개를 의지만으로… 황색 마탑의 마스터라도 교관님처럼은 하지 못할 겁니다.”

    캐슬러는 마냥 필립이 대단해 보일 뿐이었다.

    * * *

    캐슬러를 돌려보낸 필립은 다음 과정을 진행했다. 빠른 손을 타고난 그였으나 엘릭서의 제조법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난이도가 높은 것도 그랬지만, 들여야 하는 정성이 만만치가 않았다.

    서른 가지가 넘는 재료들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손질하고, 배합하는 건 기본이었고 정확한 온도에서 며칠이나 용액을 끓여야 하기도 했다.

    사흘 밤낮 동안 엘릭서 제조에 매달린 필립은 그 강인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매우 지친 것처럼 보였다.

    “네놈… 아니, 너… 괜찮은 게 맞느냐? 조금 쉬어 가면서 해도 될 것을.”

    프리비아마저도 필립이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녀의 몫인 엘릭서였고, 아무 대가 없이 제공받는 것이었기에 저만큼이나 정성을 쏟는 모습을 보니 최근 몇백 년 동안 존재마저 잊고 있던 드래곤의 양심이 간만에 제 역할을 하려는지 쿡쿡 쑤셨다.

    “아… 뭐라고 하셨습니까?”

    필립은 퀭한 눈으로 프리비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드워프제 강철로 만든 솥을 열심히 젓고 있었다.

    “조금 쉬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프리비아의 말에 필립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조금 쉬면 지금까지 한 게 전부 날아갑니다. 왜 고대에도 엘릭서가 최고의 영약이었는지 아십니까? 뛰어난 정신력과 체력을 지닌 이가 며칠 동안이나 단 한 번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제작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원작에서도 그랬다. 수십 가지가 넘는 최고 난이도의 미니 게임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클리어해야 엘릭서를 만들 수 있었다.

    즉사하지 않은 캐릭터를 한순간에 회복시킬 만큼 대단한 효과였기에, 필립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한 회차를 진행할 때마다 두 개씩은 만들었었다.

    프리비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냄비를 젓는 필립의 팔이 정확한 강도로, 정확한 속도로 벌써 반나절 동안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이 쉽지 저건 인간의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집중력이었다. 저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만 해도 보통 사람은 몇 번이나 기절하고도 남을 터였다.

    “…고맙다.”

    필립을 바라보던 프리비아는 뭔가 감정이 울컥 올라오는 걸 느끼며 감사의 말을 뱉었다.

    한 세상의 정점으로 불리는 종족으로 태어난 그녀는 평생 남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없었다.

    당연히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고생하는 모습 또한 본 적이 없었다.

    ‘저 녀석은 굳이 저럴 필요가 없을 텐데.’

    땀이 눈에 들어가는데도 묵묵히 냄비를 젓는 필립을 보며, 프리비아는 그에게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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