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 * *
“이곳으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일이 바빠서 진작 찾아오지 못했네요. 공주님.”
“바, 바쁘면 그럴 수도 있죠.”
카밀라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람으로 식히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는 필립 오라버니의 친누이시라 저와는 가족이나 다름없으니 부디 편하게 대해 주세요. 괜찮다면 이름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네요….”
왕족인 카밀라가 먼저 나서서 족보를 정리했다.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행동이었다.
“어차피 아카데미에 편입하시게 되면 저절로 그리되겠지만, 공주님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사실 오스왈드 백작가 정도 되는 가문이면 어차피 왕가의 혈통이 어느 정도는 섞이기 마련이었다. 일단 현 가주의 모친이 본래 공주였었고, 촌수를 꼼꼼히 따지고 들면 필립과 펠리시아는 카밀라의 먼 친척이었다.
“루아, 정령석 어디에 뒀니?”
“저기요.”
필립이 묻자 루아가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당장 쓸 곳이 없던 탓에 루아의 수련에 도움이 될까 싶어 방에 놓은 것이었다.
정령석이 풍기는 자연력은 앞으로 그녀가 쌓을 오러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자루 하나에 가득 담긴 정령석들의 품질은 제각각이었다. 이전 계약에 쓴 것만큼 대단한 물건은 없었으나, 상급 정령석만 세 개가 넘었다.
필립은 그것을 자루째로 펠리시아에게 내밀었다.
“선물이야. 누나.”
펠리시아는 잠깐 좋아했지만 이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하지만 엘페니아 숲까지 갔다 왔는데, 다른 선물은 뭐 없어?”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펠리시아는 기껏 생각해서 챙겨 온 선물을 이런 식으로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 기념품 달라고. 하긴 뭐 정령석은 자기 돈으로도 얼마든 살 수 있으니.’
곧 깨달음을 얻은 필립이 이내 다시 루아를 불렀다.
“루아, 그건 어디 있니? 엘프들 옷 말이야.”
“으음… 아! 저기 저쪽 옷장에요.”
루아는 곧 녹색 천으로 지은 원피스 한 벌을 꺼냈다. 화려하거나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제법 맵시가 있고 입기에 편해 보였다.
‘코스튬은 못 참지.’
라고 생각하며 몇 벌 받아둔 것이 다행이었다.
그걸 받아든 펠리시아는 그제야 만족하며 기뻐했다.
한편 헤이즐 교관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외향적인 사람들 사이에 껴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것 같았다.
빨리 어디든 좁고 아늑한 곳에 들어가 쉬고 싶었다. 자기 기숙사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곳에 갈 수 없었다.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필립이 그녀를 손님 방으로 안내했고, 그녀는 최고급 침대에 눕자마자 며칠은 자지 못한 사람처럼 곯아떨어졌다.
“우리도 좀 쉬자고.”
필립의 제안에 펠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며칠 동안 새 교육 과정을 짜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는데, 여기 오니까 마음이 좀 편하긴 하네. 네 방에서 좀 자도 되지? 너도 잘 거야?”
남들이 열심히 일할 때 쉬려던 남매는 곧 별장 밖에서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소리를 들었다. 대충 들어도 누군가 싸우는 소리였다.
“이건 또 뭔 소리래니?”
“…몰라, 나가 봐야지.”
서로를 마주 보며 한숨을 내쉰 남매는 곧장 별장을 나서 밖의 상황을 살폈다.
* * *
밖은 난장판이었다.
교관 무리 열 명 정도와, 왕실 기사단으로 보이는 인원 네다섯 명 정도가 하필이면 필립의 별장 앞에서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아니, 이건 경우가 아니지. 우리가 당신네 작전에 협조하는 거지, 당신들이 우리를 뭐 징발하기라도 한 거요? 사람 기분 나쁘게 왜 지시를 해요?”
검술 학부 고학년 교관, 테론 가로스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왕실 기사단에게 삿대질했다. 그는 화가 꽤 많이 난 듯 보였다.
“지시를 한 게 아니라, 협조를 요청한 거요. 원래 우리가 수행하던 작전이니 우리가 더 잘 아니까. 그게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하오만, 누군가는 수색 작전을 주도해야 하지 않겠소?”
파견된 왕실 기사단의 대장 한 명이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했으나, 테론 교관에겐 통하지 않았다.
“원래 수행하던 작전? 그게 실패해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아닌가? 그러면 우리 아카데미 측에 조언을 구해야지. 협조를 요청한답시고 교관들을 그쪽 마음대로 배치하면 그저 인원이 모자라니 끌어다 쓰는 그림이 되지 않나?”
슬슬 기사단의 캡틴 또한 화가 치미는 듯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틀린 말은 아니오만 말을 좀 함부로 하는군.”
“아아, 그쪽한테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지. 어찌 고매하신 캡틴께 함부로 말하겠습니까?”
테론 교관이 살살 긁자 캡틴의 넓은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지금 뭐 싸우자는 거요?”
“그럴 리가요? 그냥 좀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는 겁니다. 우리는 알아서 움직일 테니, 그쪽 기사단 여러분이 알아서 보조하는 게 어떻습니까?”
기사단과 교직원 무리의 대치를 지켜보던 필립과 펠리시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령을 괜히 소멸시켰군, 당장 위협이 없으니 저러고 있지.’
사령을 지닌 사령술사였다면 지금쯤 쥐새끼 한 마리도 나다니지 못할 만큼 삼엄한 경계 속에서 작전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선 저렇게 싸우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터였다.
필립이 나가서 중재하려 하자 펠리시아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말리게? 우리 지금 요령 피우고 있어서 좋은 말은 못 들을 텐데.”
“그럼 무시하자. 저러다 말겠지 뭐.”
필립은 그들을 무시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별장 안으로 돌아갔다. 펠리시아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필립이야 세운 공이 있으니 상관없었으나, 그녀는 저들의 눈에 띄면 골치 아팠다.
물이나 한잔 마실 생각으로 식당으로 향한 필립은 마침 근처를 서성거리던 프리비아와 마주쳤다.
“…프리실라 교관? 아, 아닌가?”
프리비아를 마주한 펠리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인상이 좀 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애 언니인데.”
설명하기 귀찮았던 프리비아가 대충 둘러댔다. 펠리시아는 그제야 아, 하고 감탄했다. 쌍둥이처럼 닮은 탓이었다.
프리비아는 펠리시아를 무시하고 필립에게 물었다.
“출출해서 그런데 간식 같은 건 없느냐?”
필립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상점이 다 닫아서 하녀들이 사오질 못했답니다.”
프리비아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왜 닫았는데?”
“사령술사 때문이죠 뭐. 어디 숨어 있을지 모르니 출입을 막아야 하니까요.”
“아니, 네놈이 사령을 없앴는데 고작 그거 하나를 못 찾아서 상점까지 닫는단 말이냐? 그러면 오늘 저녁 식사는?”
“어제 남은 걸 요리해야죠. 어쩌겠습니까?”
필립의 별장에서 며칠이나 온갖 고급 음식과 간식을 섭렵한 프리비아는 지금 상황이 불만스러웠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중얼거렸다.
“모르는 사이에 인간 놈들이 많이 무능해졌군. 거기 아가야. 잠깐 이리 와 봐라.”
그녀가 풍기는 흉포한 분위기에 펠리시아는 흠칫 놀랐다. 나름대로 강한 검사인 펠리시아의 감각은 결코 그녀에게 까불어선 안 된다고 주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내…내가 왜 이러지?’
“저…저요?”
“저 애송이가 사령을 없앴으니, 누나인 네가 공을 세울 차례다. 사령술사가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 줄 테니, 잡아 오든 목을 베어 오든 네 마음대로 하거라. 십중팔구는 죽었겠지만.”
프리비아는 손을 휘저어 포탈을 열었다. 잘 먹고 잘 쉰 덕에 어느 정도 가진 마력이 회복되었기에 딱히 불편함은 없었다.
반투명한 포탈이 열리자 펠리시아는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아니, 저 여자는 누군데….’
“동생하고는 달리 느려터졌구나. 직접 집어넣어 주랴?”
프리비아가 다그치자 깜짝 놀란 펠리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펠리시아는 필립을 바라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필립은 프리비아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은 뒤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세 글자를 말했다.
‘드, 래, 곤.’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누이의 안색을 보며 필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런 식으로 프리비아의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었지만, 드래곤이 제멋대로 한 행동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잘 다녀와. 누나.”
포탈 안으로 진입하는 펠리시아를 배웅한 필립은 프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정체를 밝혀도 됩니까?”
프리비아는 뭘 그런 걸 따지냐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저 애가 날 보는 눈이 너무 건방지더구나. 끔찍이 아끼는 동생에게 웬 날파리가 붙었냐는 듯한 기색이던데, 한 대 때려줄까 하다가 너무 허약해서 참았느니라.”
“저보고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이 상황에 대해 설명을 어떻게 하라고….”
필립이 불만을 토로하자 프리비아는 자기가 알 바 아니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몸만 멀쩡했어도 설산 한가운데에 며칠 정도는 던져 놨을 거다. 네놈 얼굴을 봐서 참은 줄 알아라.”
할 말이 없어진 필립은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저 업보를 다 어떻게 청산하려고 저러나.’
몇 년 뒤 펠리시아가 얼마나 강해질지 알고 있는 필립은 프리비아의 명복을 미리 빌었다. 그가 생각한 대로 펠리시아가 정령검을 익히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프리비아도 우습게 볼 수 없을 만큼 성장할 터였다.
포탈이 닫히기도 전에 펠리시아가 돌아왔다. 그녀는 옷과 머리카락이 그을린 채였다.
“…이상한 실험실이었는데, 안에는 시체 한 구밖에 없었어요. 제가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불이 크게 나더니, 모든 게 다 타버렸어요.”
프리비아는 온몸에 검댕이 묻은 펠리시아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 네 동생이었더라면 그런 마법 정도는 진즉에 눈치채고 대처했을 텐데. 당연한 것 아니냐?”
“죄…죄송해요.”
자신이 왜 사과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펠리시아는 처량히 고개를 푹 숙였다. 프리비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펠리시아의 몸 전체에 하얀빛이 번쩍이더니 타버린 머리카락과 옷이 원래 상태로 복구되었다.
그 말도 안 되는 현상에 펠리시아는 숨을 삼켰다.
“그래도 말대꾸를 하지 않는 걸 보니 아예 써먹지 못할 수준은 아니구나. 아가야. 내가 드래곤이라는 걸 믿느냐?”
“네? 아, 네. 믿어요.”
프리비아는 펠리시아가 귀엽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 뺨을 쓰다듬은 뒤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잠깐 짜증을 내긴 했으나 필립과 외모가 비슷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정이 갔다. 게다가 감이 좋은 탓인지, 본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은근히 순종적인 면도 마음에 들었다.
비슷한 외모인 필립은 마치 능구렁이 같아 놀리거나 핍박하기가 부담스러웠는데, 이 어린 여자는 이상하게 타격감이 좋았다.
“종종 찾아오거라. 정령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정령사인 모양인데, 네게 도움이 될 지식을 알려주도록 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