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화
* * *
나무로 된 방은 정갈했으며,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목재라 지은 건물이 아니라 나무 그 자체가 건물이 된 구조물이라 할 수 있었다.
“…아까 그 마법사 여인. 그 여인은 대체 누구죠?”
일행을 방으로 안내한 센티넬 유르실이 리즈리엘에게 질문했다. 리즈리엘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분은…저도 잘 모르는 분이에요. 필립 오스왈드라고, 제 친우의 지인이라 함부로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센티넬 유르실은 그녀가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자 어딘지 불편한 기색이었다. 리즈리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지금껏 쌓아온 그녀의 호감도가 이번 일로 조금 내려간 것처럼 보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상황을 지켜보던 캐슬러 무르엘라가 물었다. 유르실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장로님께서 그냥 조금…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할머님께서 아직 살아있는 인간 마법사와 인연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쟈니스와 루아는 어른들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그러나 곧 필립이 프리비아, 그리고 장로와 함께 일행들에게로 돌아왔다.
“유르실. 내가 손님들을 극진히 모시라고 했을 텐데. 왜 아직 여기서 손님들을 불편하게 하는 거니?”
일행들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본 장로가 급히 유르실을 나무랐다. 그녀는 프리비아의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을까 극도로 두려워하는 듯했다.
수호룡인 아우베스가 수면기에 든 지금 다른 드래곤인 프리비아를 막아 줄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봐도 좋았으니까.
“…죄송합니다.”
“손님들은 내가 모실 테니, 너는 이 두 분을 세계수 근처로 안내해 드리렴. 이분들께서 그곳에 머물고 계신 신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시니.”
유르실은 장로의 말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예에? 인간을 그곳에요?”
장로는 현기증을 느끼는 듯 이마를 짚으며 손을 내저었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어서 움직이렴.”
그러나 장로는 손녀를 아끼는 할머니였다. 그녀는 바람의 정령을 불러 유르실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했다.
―저 마법사님은 드래곤이시니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렴. 다행히 그리 무서운 분은 아닌 듯하니 널 해치지는 않을 거야. 규칙 같은 걸 들먹이며 답답하게 굴었다간….
그제야 유르실이 가졌던 의문이 모두 풀렸다.
‘…드래곤이라고?’
그녀는 가볍게 몸서리치며 떨리는 눈동자를 프리비아에게로 향했다.
“뭘 봐요? 어서 안내해요.”
프리비아가 툴툴거리자 유르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 묻은 고양이처럼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곧바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녀 또한 신병처럼 바짝 얼어붙었다.
‘…뭐지?’
리즈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엘프들이 뭔가 공손해지고 군기가 바짝 든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껏 여행한 일행 중 드래곤이 있으리라곤 그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루아도 데려가죠?”
필립이 프리비아에게 제안했다.
“아이를 데려가자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
‘경험치 먹이려고요.’
라고 대답하려던 필립은 잠시 생각한 뒤 프리비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최대한 많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서 그럽니다.”
“뭐, 네 마음대로 하거라.”
“들었지. 루아? 이리 오렴.”
필립이 손짓하자 쟈니스와 함께 구석에 앉아 있던 루아가 튕기듯이 일어나 필립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난데없이 혼자 남겨진 쟈니스가 울상이 되어 물었다.
“교관님. 저는요?”
“쟈니스 너는…….”
잠깐 고민하던 필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도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쟈니스는 어쩐지 루아와 영혼의 단짝이 될 것만 같았기에 미리 같이 행동하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었다.
쟈니스 또한 벌떡 일어나 루아의 옆에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본 캐슬러 무르엘라와 신시아 무르엘라가 헛웃음을 뱉었다.
“저 애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아뇨. 저러는 건 처음 봐요. 여보.”
그들이 아는 쟈니스 무르엘라라는 소녀는 만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귀족 청년에게 저렇게 살갑게 굴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특히 신시아 무르엘라는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했던 노력을 떠올리자 상대적인 박탈감마저 느꼈다.
곧 필립과 프리비아, 그리고 두 소녀는 센티넬 유르실을 따라 높이 자란 세계수가 있는 곳, 엘페니아 숲의 중심부 깊은 곳을 향해 걸었다.
루아는 마치 장난감 병정처럼 어색한 동작으로 걷는 엘프 정찰대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교관님. 엘프 언니 어디 아파요?”
“…직접 물어보렴?”
대답할 말이 애매했던 필립이 그렇게 말하자 루아가 유르실의 바로 옆까지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엘프 언니.”
유르실은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네?”
“혹시… 몸이 아파요?”
“아뇨. 아니에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걱정과 염려가 가득 담긴 그 질문에 유르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루아는 다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혹시 쉬 마려운 거예요?”
마침 수통을 입에 물고 물을 마시고 있던 쟈니스가 그 질문을 듣고서 푸흡, 하고 물을 뿜었다. 앞에서 걷고 있던 필립은 등허리가 축축해지는 걸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죄, 죄송해요. 교관님.”
“…괜찮다.”
옷이 좀 젖은 것 정도야 별일도 아니었고, 쟈니스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기에 필립은 괜찮다고 말한 뒤 유르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할지 조금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는 뭐라고 대답하지 않고,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아, 바로 저기랍니다. 저희 엘프는 저곳을 ‘과수원’이라고 부르는데, 세계수의 열매를 딸 수 있는 곳이에요. 최근 몇 년 동안은 신수님께서 이곳에 자리를 잡은 탓에 전혀 그러지 못했지만요.”
신수라고 하면 보통은 일각수나 천마, 혹은 순혈 인어처럼 강대한 힘을 지닌 짐승을 의미했지만, 오래 살아 영혼과 육체의 힘을 쌓은 짐승들도 보통 신수라고 불렸다.
필립은 조금 떨어진 이곳에서도 신수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세계수의 나뭇가지 끝에 맺힌 열매를 지키듯, 그 근처에서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몸을 말고 있었다. 탐스러운 은색 털을 가진 늑대였다.
“정말로 늑대군. 네놈은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안 것이냐?”
프리비아가 신기하다는 듯 필립을 바라보았다.
“아는 신수입니다. 저쪽은 저를 모르겠지만요.”
필립의 대답에도 프리비아의 의문은 더 깊어질 뿐이었다. 필립은 성큼성큼 거대한 늑대 신수에게 다가갔다. 체고가 3미터는 되어 보이는 늑대는 일행의 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누가 감히 내 잠을 방해하느냐?
낮은 울음소리에 루아와 쟈니스가 힉, 하고 작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필립은 손을 들어 올려 늑대의 주의를 끌었다.
“접니다.”
늑대는 앞발로 땅을 긁으며 필립을 노려보았다.
―작은 인간이로군. 인간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이곳은 엘프의 영역 아닌가?
“그건 당신이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겁니까? 듣자 하니 세계수의 열매를 따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 같던데.”
―…건방진 인간아. 너는 조금 공손해질 필요가 있겠구나. 감히 내가 하는 일에 너처럼 하잘것없는 인간이 왜 간섭하려 드느냐?
필립은 늑대의 어깃장에도 피식 웃을 뿐이었다.
“…산과 숲, 그리고 들판을 수호해야 할 신수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거든요.”
필립의 말을 들은 프리비아가 조금 놀라며 필립을 바라보았다.
“애송아, 너도 설마 느끼고 있는 게냐? 여기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저기 보이잖습니까. 가지 끝에 매달린 황금색 열매가요. 안 봐도 뻔합니다. 저걸 독점하고 싶은 거죠. ‘황금 사과’를 말입니다.”
세계수의 열매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노폐물을 제거하고, 그 열매 자체에 꽤 많은 양의 마나가 깃들어 있어 제대로 된 수련법을 익힌 검사라면 세계수의 열매를 통해 가진 오러를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열매 중 특별한 것이 있다는 건 극소수의 지식인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일명 ‘황금 사과’.
그 향기로운 과육을 한 입만 베어 물더라도 불로장생을 이룰 수 있다는 신비의 열매.
필립은 그 열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원작 게임에서도 희귀하기 그지없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걸 먹으면 육체가 천천히 재구성되지.’
총 4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대상이 된 학생들은 그 성장세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또한 특수 능력을 각성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나, 그리고 루아, 타니아. 그리고… 쟈니스에게 먹이면 되겠군.’
강력하고 뛰어난 아이템은 이 세상에 차고 넘쳤으나, 성장 그 자체에 도움이 되는 물건은 드물었다. 게다가 ‘황금 사과’는 세계수 마음대로 내어놓는 열매였기에 언제 다시 나타날지도 미지수였다.
‘저건 내 거다.’
고작 신수 따위가 저 귀한 걸 함부로 먹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늑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다가오지 마라. 경고한다.
“다가가면 뭐 어쩌실 건데요? 절 공격하고 마수가 되실 겁니까?”
―고작 네깟 놈 하나를 죽인다고 마수가 될 것 같으냐? 마을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켜도 그럴 일은 없을 터.
그들의 대화를 듣던 프리비아가 나섰다.
“멍청하고 모자란 것. 천 년은 넘게 살았을 놈이 욕망에 눈이 멀어 인과율도 제대로 못 읽는구나. 신수인 네가 그걸 먹는다고 해서 뭔가 바뀌는 게 있을 것 같으냐?”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그녀는 이내 입을 열어 용언을 발했다.
[어리석은 것. 당장 물러나라.]
그러자 필립이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용언은 대단히 함축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였다. 표음 문자도, 표의 문자도 아니었고 고도의 암호에 가까웠다.
인간의 지능으로는 결코 해석할 수 없으며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인간을 초월한 수준의 정신력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게 왜 들리지?’
그러나 필립은 용언을 들을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스스로도 몰랐으나, 그 사실은 프리비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용언을 들었느냐?]
“아… 예.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만하십시오.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요.”
곧 필립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누군가가 뇌를 직접 만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화들짝 놀란 프리비아가 입을 다물었다.
―드래곤? 드래곤인가? 완전한 생물로 태어난 드래곤마저 이 열매를 탐내는가?
프리비아가 직접 나선 건 그리 효과가 없어 보였다.
―…내가 틀리지 않은 모양이군.
늑대는 환희에 찬 표정을 지으며 황금색 열매를 향해 높이 점프했다. 한입에 집어삼킬 생각인 듯했다.
그 모습을 본 필립이 크게 놀라 소리쳤다.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