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 * *
순식간에 저 높은 곳까지 뛰어오른 신수는 입을 크게 벌려 가지 끝에 매달린 황금색 열매를 물어뜯으려 했다.
그 순간 놀랍게도 세계수의 가지가 크게 움직여 신수의 입질을 피해내었다.
당황한 신수는 몸을 비틀어 땅에 착지한 뒤 앞발을 크게 굴렀다.
“아니, 진짜 안 된다니까요. 그게 그렇게 쉽게 먹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필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세계수는 본디 베푸는 존재거늘? 신수인 내가 열매를 취하는 걸 거부할 리가 없을 텐데….
“놔두면 알아서 떨어지고 썩는 열매랑 그게 같답니까? 세계수도 아까운 건 압니다.”
필립은 세계수가 인간의 상식을 훨씬 초월하는 수준의 고등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아가 존재하는 채로 생태계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부터 이미 신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 본체와 실제로 마주한 지금 필립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경외. 그리고 이유 모를 친밀함.
그것은 이상하게 남 같지 않은 듯한, 묘한 친근감이었다.
“…네가, 감히, 날 무시하느냐?”
한편 프리비아는 화가 많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살짝 몸을 떨었고, 그 모습을 본 신수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딱히 죄를 지은 게 없는데, 당신을 두려워할 건 또 뭐지?
드래곤은 강대한 만큼 제약이 많은 존재였다. 숲과 산의 수호자나 다름없는 신수를 죽이기라도 했다간 꽤 큰 대가를 치러야 했기에 프리비아는 부들부들 몸을 떨며 필립에게 지시했다.
“가서 저 개새끼를 검으로 몇 대 긁어 놓거라. 저놈이 반항하며 널 공격하는 순간 내가 저놈을 천 갈래로 찢어놓고 말겠다. 아예 확 죽여버리던가.”
그녀의 보호 아래 있는 필립이 공격당한다면 최소한의 명분은 생기기 때문에 내린 지시였다. 필립은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거절했다.
“싫습니다. 저번에 마족과 싸울 때 안 도와주셨잖아요? 그리고 신수를 공격하는 건 좋지 않은 일입니다.”
얼로이 백작 사건 때 프리비아가 도와주지 않은 걸 따지고 들자 그녀는 배신감을 느낀 듯 필립을 째려보았다.
“사내놈이 고작 그런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느냐?”
“언제는 애송이라면서요? 애송이라 배포가 작아서 그렇죠. 너무 그러지 마시고 일단 좀 진정해 보세요. 어차피 세계수는 저 신수에게 황금 사과를 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라. 저 보잘것없는 개새끼가 감히 날 무시했잖느냐?”
“…오래 살다 보면 무시도 좀 당할 수도 있고 그런 거… 윽!”
필립이 능글맞은 태도로 일관하자 프리비아가 그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애송이 놈이 오냐오냐 봐 줬더니 한참을 기어오르는구나.”
말은 그렇게 해도 프리비아는 딱히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로 화가 났다면 발길질이 아니라 마법이 날아왔을 테니까.
“흥! 네놈이 알아서 하거라.”
프리비아는 그렇게 투덜거리듯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필립이 신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지 말고 좀 비켜 주시죠. 예? 먹지도 못하는 열매를 수십 수백 년 동안 쳐다보고만 있을 겁니까? 이곳이 당신 영지도 아니잖습니까.”
―건방진 인간아. 그건 네 알 바가 아니다.
“그러면 알 바로 만들어 드리죠. 뭐. 당신 영지는 여기서 북쪽으로 한나절 거리에 있는 숲 아닙니까? 계곡이 하나 있고, 샘도 하나 있는 곳 말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아주 돈이 많은 귀족입니다. 기간을 넉넉히 잡고 두 달 정도면 그 숲을 통째로 밀어버리고 성을 한 채 세울 수도 있죠.”
필립의 말뜻을 알아차린 신수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늑대의 얼굴로 저런 표정이 가능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 짓을 하겠다고? 그 숲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살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
“그거야말로 제 알 바가 아니지 않을까요? 걱정되시면 직접 가보면 될 일 아닙니까? 아무튼 그렇게 아시고, 두 달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짧지만 두 달 정도야 얼마든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영지를 잃은 신수는 곧 모든 힘을 잃고 평범한 짐승으로 되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제아무리 황금 사과가 탐난다고 해도 자신의 자아를 걸고 취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곧 신수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갑시다. 가자, 얘들아.”
필립이 그렇게 말하며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려 하자 신수가 컹, 하고 크게 한 번 짖었다.
―그만! 그만둬라!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놈아!
이 자리에 프리비아가 없었더라면 신수는 필립을 당장 공격했을 것이었다. 신수는 원독에 찬 눈으로 필립을 한 번 노려보더니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네놈은 나를 다시 만나지 않길 바라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죠. 뭐.”
필립이 빨리 가보라는 듯 손짓하자 거대한 늑대는 신경질적으로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는 마치 끔찍한 악당을 보는 듯한 센티넬 유르실의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왜 그럽니까?”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설마 정말로 숲을 밀어버리려 했겠습니까? 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필립의 변명에도 유르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필립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필립은 한숨을 내쉬며 루아와 쟈니스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오렴.”
“네에.”
“네. 교관님.”
필립은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세계수에게 완전히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아니더라도 저 둘 중 한 명에겐 세계수가 황금 사과를 기꺼이 내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필립은 세계수의 줄기에 손바닥을 대며 중얼거렸다.
“그 열매를 제게 주시면 잘 써먹겠습니다.”
마치 산신령에게 비는 듯한 느낌으로 몇 마디 더 중얼거리자 황금 사과가 매달린 가지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곤 빨리 가져가지 않고서 무엇을 하냐는 듯 필립의 눈앞에 황금 사과를 내어놓았다. 필립이 홀린 듯 그것에 손을 뻗자, 곧 세계수의 가지가 무수히 뻗어 나와 필립과 루아, 그리고 쟈니스의 몸을 휘감았다.
“…음?”
딱히 악의가 없었기에 필립은 얌전히 몸을 내맡겼다. 어차피 세계수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꺅?”
루아 또한 약간 놀랐을 뿐 곧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쟈니스의 경우는 좀 달랐다. 그녀는 곧바로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어…어어? 꺄아아악!”
곧 세계수의 가지는 필립과 여자아이들을 붙든 채 저 높은 곳을 향해 솟구쳤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땅에 내려선 필립은 눈을 깜빡였다.
방금 행동에 별 의미는 없어 보였다.
어른이 어린 아기를 높이 들어 올려 놀아주는 것과 비슷한 행위.
말하자면 친밀함의 표현이었다.
‘왜 이러지?’
필립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열매를 품에 갈무리했다.
“…세계수님께서 저러시는 건 처음 봐요.”
센티넬 유르실은 경악한 표정으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세계수가 네놈을 꽤 좋아하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애송이 네가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할 모양이다. 수천 년 전에도 너처럼 세계수에게 사랑받는 놈들이 있었지. 그놈들은 인생의 말년까지 수백 년 동안 개고생을 하다가 머리가 하얗게 세고 나서 편해졌다.”
그사이 평범한 열매를 몇 개 챙긴 프리비아가 열매를 로브에 달린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킥킥댔다.
“…아. 그러셔요.”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진 필립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눈 착하게 뜨거라. 맞기 싫으면.”
“예. 예.”
필립은 대충 대답하며 아직도 벌벌 떨고 있는 쟈니스를 챙겼다. 그녀는 아무래도 고소공포증이 있는 듯했다.
“저, 교, 교관님. 그….”
“왜?”
“저분은 대체 누구시죠…?”
루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 같았지만, 쟈니스는 프리비아의 정체를 꽤 궁금해하는 듯했다. 필립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나중에 직접 물어보렴. 친해지기 어려운 분은 아니란다. 프리실라 교관님의 언니기도 하잖아.”
“하지만 너무 느낌이 다른데요. 프리실라 교관님께선… 음…… 그러니까, 정말 친근하신 분인데.”
“저분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 아마도?”
의문문으로 끝난 필립의 대답에 프리비아는 피식 웃었고, 쟈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곧 필립의 코에서 흐른 피가 자신의 옷에 떨어지자 깜짝 놀라 필립의 상태를 살폈다.
“교관님, 코피가 나잖아요!”
용언을 들을 수 없었던 그녀와 루아, 그리고 유르실은 필립이 왜 피를 흘리는지 알 수 없었다. 필립은 별것 아니라는 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금 피곤했던 모양이지. 옷을 더럽혀서 미안하구나. 이제 돌아가자.”
* * *
장로의 방으로 돌아온 필립 일행은 곧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리즈리엘과 마주쳤다.
“특별히 더 품질이 좋은 것들로 준비했어요. 어떤가요?”
그녀는 엘프 장로가 가지고 온 물건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듯 보였고, 필립의 눈에 그 물건들의 정체는 미스릴 주괴였다.
미스릴은 오직 엘프가 가진 기술로만 정련할 수 있는 금속.
수백 년 동안 기술을 익힌 엘프 야장이 아니라면 그 뛰어난 드워프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리즈리엘은 주괴들의 상태를 살피곤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님 말씀대로 평소보다 품질이 더 좋네요. 거의 완벽한 미스릴이라도 봐도 되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미스릴들은 리즈리엘이 엘프들에게 필요한 도구와 자재들을 분기마다 날라 주는 대신 받는 대가였다.
“어머, 돌아오셨네요? 갔던 일은 잘되셨나요?”
리즈리엘의 질문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지. 이제 여기 일은 다 끝난 건가?”
“네. 그렇죠. 돌아가는 길이 순탄할지는 모르겠지만요. 내일 아침에 출발하려고 하는데, 뭐 할 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리즈리엘의 질문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이곳까지 온 김에 찾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이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정령석이나 좀 찾아보려고.”
그 말을 들은 엘프 장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령석을 말인가요? 그건 인간이 찾을 수 없는 물건일… 아!”
타고난 정령사가 아닌 이상 인간이 정령의 기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필립의 곁에 드래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또 날 부려먹을 셈이라면, 이번엔 정말로 가만히 두지 않을 줄 알아라.”
프리비아의 경고에 필립은 손을 내저었다.
“같이 갈 생각도 없었습니다. 정령석 정도야 저도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같이 갈 생각도 없었다고? 네놈이 감히?”
프리비아가 버럭 화를 내자 필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아만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귀찮게 하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대단히 심심하거나.
간만에 루아와 오붓하게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었던 필립은 프리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은 같이 가고 싶었는데, 프리비아 님께서 귀찮으실까 봐 일부러 그랬습니다. 드릴 말씀도 있고 한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네놈이 원한다면 그러지 못할 것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