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 * *
‘이거 잘못 먹으면 진짜 몸이 터지는데.’
오러를 단련했으니 죽지야 않겠지만 최악의 경우 전신불수가 될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그럴 확률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선 돌발 상황에서 올바른 대응을 해 줄 수 있는 도우미가 필요했고, 필립이 판단하기에 그 역할에 가장 알맞은 사람은 드래곤인 프리비아였다.
“자, 얌전히 앉으렴. 귀염둥아.”
그렇다고 알테어가 베푼 호의를 함부로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건 그녀의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였다. 오러마스터로서의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뭐 설마 실패하기야 하겠어?’
필립은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름대로 반출에 민감한 영약을 이렇게 쉽게 들고 오는 걸 보니 그녀는 아직 왕가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엘릭서 같은 거라도 하나 내어 주겠지.’
곧 응접실 의자에 앉은 필립이 알테어에게서 천사의 눈물을 건네받았다. 내용물을 완전히 밀봉한 뚜껑을 손으로 비틀어 따자 톡 쏘는 향이 느껴졌다.
“그건 왕가가 가진 보물 중에 그리 귀한 게 아니야. 그걸 마신다고 해서 검술 실력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마력의 절대량을 늘려주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네겐 의미가 좀 다르겠지. 한 번에 쭉 들이키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렴.”
“아, 예. 감사합니다.”
필립은 그녀의 말대로 크리스탈 병의 주둥이를 입술에 대었다. 발광하는 액체가 그의 입술에 막 닿으려는 순간, 응접실 한가운데 포탈이 열렸다.
“멈춰라! 지금 뭘 하려는 게냐?”
드래곤 프리비아의 등장이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와 필립이 든 크리스탈 병을 빼앗았다.
“이건 네놈이 생각하는 영약 같은 게 아니다. 천 년 전 마법 실험의 시료로서 만들어졌으며, 마력을 늘리겠답시고 직접 마시는 놈들은 병신 취급을 받았다. 영약으로 쓰고 싶다면 여러 과정을 거쳐야만 하느니라.”
필립은 그녀의 설명을 듣고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그가 아는 아이템 설명과 프리비아가 오랜 세월을 살며 실제로 쌓은 지식과는 그 질이 달랐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딱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을 생각은 없었기에 필립은 다시 병을 닫았다.
알테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검을 뽑은 채였다. 그녀는 눈앞의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 탓에 검을 뽑은 자세 그대로 손가락도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 당신은 누구죠?”
프리비아는 심기가 매우 불편한 듯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알테어를 노려보았다.
“네년은 뭐길래 감히 내 앞에서 주둥이를 여느냐? 죽고 싶은 게로구나.”
드래곤은 말로 할 생각이 없는지 그녀의 두 손에 새까만 불꽃을 피워 올렸다. 필립은 그걸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지옥의 불꽃, 헬 파이어.
목표물을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 영원히 타오르는 마법이었다.
대현자라 불리는 이들이 자신의 모든 마력을 태우더라도 흉내를 내기 힘들 만큼 수준 높은 마법이었기에 필립은 프리비아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뻗었다.
저 불꽃에 당하면 오러마스터고 나발이고 한 줌 재가 되고 말 것이었다.
“잠깐만요. 프리비아 님. 저분은 제게 호의를 베풀려는 겁니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프리비아는 필립에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내 눈에는 새 인생을 사는 김에 새살림을 차리려는 노처녀가 한 명 보이는구나. 그렇게 순진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느냐? 영약을 흡수하는 중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데, 네놈이 그동안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필립은 프리비아가 왜 다급히 달려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날 지켜보고 있었군.’
그녀는 아마 필립의 일거수일투족을 대부분 감시하고 있을 터였다.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한 건 아니었다. 프리비아는 수천 년을 산 드래곤이었고, 월광검의 후계자를 지킬 의무를 가졌으니 나쁜 의도로 그를 지켜본 건 아닐 테니까.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게 그런 모욕을 하고서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마세요. 제가 저 아이를 추행하려고 하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분노가 본능을 조금 억눌렀는지 알테어가 입을 열었다. 프리비아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요즘 저 애송이를 구경하는 게 삶의 낙인데, 감히 어디서 굴러먹던 계집이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어?’
그녀는 필립의 주변에 여자가 많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랑과 육욕 때문에 인생을 망친 천재들을 수도 없이 봐 왔던 탓이었다.
‘얼마 만에 나타난 월광검의 계승자인데….’
필립이 그럴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녀로서는 월광검이 온전히 계승되는 데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배제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 그래. 네깟 게 과연 뭘 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따라 나오거라.”
“…못할 줄 알고요?”
난데없이 성사된 오러 마스터와 드래곤 사이의 대결이었다.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 * *
“타니아, 여기야, 여기!”
“미야아옹….”
뒷마당에선 루아가 타니아와 놀아주고 있었다. 루아는 필립이 만들어 준 깃털이 달린 고양이 장난감을 흔들며 타니아를 유혹했고, 타니아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으나 본능 탓에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참으로 흐뭇하고 보기 좋은 광경이었으나 저 소녀들은 자리를 비켜야만 했다.
“교관님!”
필립이 나타나자 루아는 조건반사적으로 쪼르르 달려오다가 모르는 여인 두 명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멈췄다.
“이리 오렴. 루아, 타니아. 여기서 잠깐 할 일이 있단다.”
“이분들은 누구세요?”
루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프리비아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마법 학부 교관이고, 네 교관님 친구란다. 아가야. 네가 루아구나?”
“네에, 안녕하세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프리비아를 보며 필립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의 이름을 딴 아카데미가 세워진 것도 그렇고, 이전에 타니아를 대하는 태도를 봤을 때도 그랬고, 아무래도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들에겐 꽤 약한 듯했다.
“나는….”
알테어 또한 소개를 하려고 했으나 프리비아가 가로막았다.
“네년은 어차피 시체가 될 텐데 왜 소개를 하려고 하느냐? 괜히 정들어서 좋을 게 없느니라.”
“뭐, 뭐라고요?”
저 두 여인 중 필립이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딱히 저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필립은 루아와 타니아를 데리고 멀찍이 물러섰다.
“저 언니들 왜 저러는 거예요?”
루아가 까치발을 들고 필립의 귓가에 속삭였다.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나도 모르겠구나.”
루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필립이 뭔가를 모른다고 하는 걸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필립에게도 모르는 게 있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은 듯했다.
프리비아와 알테어는 서로를 노려보며 마주 섰다.
“어디 한번 재주를 부려 봐라. 뭘 할 수 있는지 궁금하구나.”
프리비아의 도발에 알테어는 이를 악물었다. 분노가 치민 그 순간 프리비아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심상찮은 기세가 느껴지기는 했으나 왕족으로서, 오러마스터로서 그런 수준의 모욕을 받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곧 알테어가 밟은 땅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오러를 모은 알테어의 검에 찬란한 검강이 깃들었다.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수석교수인 에밀 파노이보다 적어도 한 단계는 높은 수준이었다.
“…후회할 거예요.”
알테어는 그렇게 말한 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정확히는 인간의 인지능력을 벗어난 속도로 프리비아에게 돌진한 것이었다. 알테어는 훤히 열린 프리비아의 급소를 보며 아주 찰나 동안 그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할 방법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검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 일어나곤 하는 현상이었다. 그 감각이 든 그 순간 알테어는 승리를 확신했다.
‘별것도 아니면서, 감히?’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체감상 몇 초가 지났음에도 멈춘 시간이 흐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게… 왜 이래?’
알테어는 자신의 육체가 완전히 정지했음을 느꼈다. 오직 심장과 폐, 그리고 호흡기만이 기능할 뿐 몸의 모든 근육이 석고처럼 굳어버린 것이었다.
“미야아옹.”
필립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타니아가 필립의 정수리 위로 자리를 옮겼다. 새끼고양이에게나 허락된 특권이었다.
필립은 식은땀을 한 방울 흘리며 조용히 프리비아에게 다가갔다.
“…죽이신 건 아니죠?”
필립의 질문에 프리비아가 피식 웃었다.
“내가 무슨 마룡이냐?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그녀는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완전히 굳어버린 알테어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인간 계집아. 너를 이대로 한 이십 년 정도 세워두면 좀 고분고분해질까?”
알테어는 그제야 자신이 상대를 잘못 골랐음을 인지했다. 그녀와 프리비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몇 개나 존재했다.
그녀의 눈빛이 여물을 눈앞에 둔 소처럼 순해진 걸 확인한 프리비아가 그녀에게 걸린 마법을 해제했다.
“나름대로 쓸만한 걸 가져왔으니 이쯤에서 용서하마. 썩 꺼져라.”
끄덕끄덕,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알테어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곧바로 도망쳤다. 필립은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사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라고 해서 프리비아에게 뭐라고 함부로 말할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필요까진 없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는 대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어 보는 길을 택했다. 프리비아는 언짢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계집이 생각하는 건 뻔하다. 얌전히 부탁한 일이나 해주면 될 걸, 괜히 네놈을 위한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간섭하다가 네놈을 뜻대로 움직일 생각이니라. 미리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콧대를 꺾어 놓을 필요가 있다.”
“…그런 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필립은 살짝 놀라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내가 왜? 나는 단지 네놈이 이상한 걸 주워 먹고선 탈이 날까 봐 막으러 온 것이다. 영약을 먹고 싶다면 날 찾아올 것이지 왜 저런 어설픈 계집에게 맡기려는 것이냐?”
프리비아의 반응에서 필립은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을 도와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신 것 같은데.’
그는 이 솔직하지 못한 드래곤이 점점 친밀해지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이용할 구석이 있는 대상일 뿐이었으나 가면 갈수록 호감이 가는 행동을 보여주니 정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내가 재료를 적어 줄 테니, 이걸 구해서 내게 가져오면 네게 맞는 영약을 만들어주마. 완성된 영약을 통째로 주는 건 인과율적인 부담을 져야 하지만, 재료를 네가 직접 구한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프리비아는 어차피 일에 끼어든 김에 조금 더 선심을 쓰기로 했다.
그녀의 지금 심정은 드라마의 내용에 직접 간섭할 수 있게 된 시청자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온 김에 몇 마디 더 하자면, 대체 네놈은 일을 키우지 않고서는 뭘 하질 못하는 성격이냐? 이번에도 그렇다. 그냥 귀족 몇 명을 움직여서 정치적으로 압박만 했어도 끝날 일을 왜 이렇게 크게 키운 게냐? 그리고, 가장 우선되어야 할 건 네놈의 성장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테어 님은 아카데미 교수로 초빙해야겠어. 그러려면 얼마 전에 내게 시비를 건 그 교수를 쫓아내야겠지.’
필립은 이어지는 프리비아의 잔소리를 진지한 표정으로 들으며 열심히 다른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