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 * *
“재생을……하네요?”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알테어 얼로이는 강자로서의 품격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녀는 날아간 백작의 팔의 단면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젠 완전히 괴물이 됐네요. 여보? 혹시 목을 잘라도 재생하려나?”
“이 미친년이!”
백작은 바동거리면서 그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으나, 그녀는 땅에서 꿈틀거리는 백작을 한 걸음씩 따라 걸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나요? 코빙턴. 다시 말해 봐요. 우리 예쁜이한테 뭘 어쩐다고요?”
백작의 팔다리를 무참히 썰어내는 공주를 보던 펠리시아는 문득 필립의 안위에 생각이 미쳤다.
“필립. 내 동생!”
한편 한참이나 멀리 날아갔던 필립은 만신창이가 된 채 절뚝거리며 전장에 복귀하는 중이었다.
“…아이고.”
펠리시아가 다가가 부축하자 필립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너 괜찮아?”
필립의 상태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왼팔이 탈구되었는지 덜렁거렸고, 이마와 뺨에서 꽤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렸다.
“혹시 내가 괜찮아 보여?”
“…아니, 안 괜찮아 보여.”
펠리시아는 곧바로 입고 있던 상의의 소매를 뜯어 필립의 이마에 감았다.
곧 필립의 시선이 알테어 얼로이를 향했다. 그녀는 18년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풀겠다는 듯 얼로이 백작을 거의 회 치듯이 칼로 쑤시는 중이었다.
“…나는! 너 때문에 20년을 처녀로 살았어! 코빙턴, 그거 알아요? 당신이 죽인 첫째 아들이 날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언젠가 나를 찾아와서는 외로움을 달래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말이나 되냐고!”
“크아아아악!”
깜짝 놀란 필립이 소리쳤다.
“그거 죽으면 안 됩니다! 멈추세요!”
백작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으려던 알테어가 멈칫했다.
“…어째서니?”
“왜긴요. 살아있는 마족을 생포할 기회가 어디 흔하답니까? 그거 창성회에 넘기면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텐데요. 정 화가 안 풀리시면 종종 찾아가서 놀아주시면 되고요. 지금 여기서 죽이면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팔다리가 모두 잘린 백작은 그가 펠리시아에게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입을 열었으나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언어가 되어 나오는 일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알테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귀염둥아. 내 전남편은 쉽게 죽어선 안 될 종자이긴 해. 정말 고맙구나. 너도, 우리 예쁜이도. 너희는 내게 새 인생을 선물했어. 그건 목숨을 살려준 것보다 더 큰 은혜겠지?”
알테어는 철검으로 백작의 배를 꿰뚫고 땅에 못처럼 박았다. 그리고는 필립에게 다가와 그를 세게 끌어안았다.
“앞으로 내게 부탁할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렴. 그 무엇이든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으아아악!”
필립은 탈구된 왼팔에서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고, 알테어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세상에, 많이 다쳤구나….”
“괘,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뭐.”
“잠깐만 기다려.”
펠리시아는 급히 상의를 벗었다. 그리곤 필립의 왼팔을 맞춘 뒤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주워 임시 부목을 만들었다. 속옷 차림이 된 그녀를 보며 알테어가 킥킥댔다.
“우리 예쁜이, 거긴 여전하네?”
“그게 무슨 말이세요, 공주님….”
얼굴을 붉히며 속옷 차림이 된 상체를 가린 펠리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아주 염병들을 하는군… 이대로 모든 게 끝난 줄 아느냐? 나와 계약한 마계 대공 테흐트라가 가만히 있을 줄 아느냐는 말이다!”
정신을 차린 백작이 으르렁거렸다. 필립은 개구리 표본처럼 땅에 박제된 그의 모습을 보며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아들 교육에 신경을 좀 쓰시지 그랬어요? 이게 다 당신 둘째 아들 탓입니다. 블러핸이 제게 반항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될 일이 아니지 않았어요? 가정교육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지랄하지 마라, 애송아. 난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는다.”
“지랄은 당신이 했고, 지랄한 결과가 이겁니다. 당신은 이제 영원히 하늘을 볼 수 없을 겁니다. 마족의 생명력은 질기니, 아주 오랜 세월 우리 인간에게 살아 움직이는 교보재가 되겠죠. 궁금하긴 하네요. 마족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죽으려나?”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떨어진 어느 장소를 바라보았다.
“저기, 저기다! 기사단은 전투를 준비하라!”
사라졌던 알레시오스 왕자가 기사단을 이끌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확인한 알테어가 급히 외쳤다.
“…난 여기 없던 걸로 해주렴. 나중에 아카데미로 찾아갈게.”
그녀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펠리시아는 멍청히 서 있다가 필립이 급히 끌어당기자 곧 자신이 상의를 탈의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 나… 에이, 몰라!”
그녀 또한 급히 몸을 숨겼고, 필립은 혼자 남아 왕자와 기사단을 맞이했다.
알레시오스 왕자는 팔다리가 사라진 채 땅에 박혀 있는 백작과 필립을 발견하곤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이 되었다.
“…공자, 당신이 한 겁니까?”
필립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그런가 보죠. 뭐. 하하.”
* * *
아픈 몸을 끌고 별장으로 돌아온 필립은 루아와 타니아의 격한 환영을 받았다.
“교관님! 왜 이렇게 다치셨어요? 누가 그랬어요? 네?”
잠깐 장례식에 다녀온다던 사람이 전신에 부상을 입고 돌아왔으니 놀랄 만도 했다. 루아는 필립에게 매달려 그의 상처를 살폈다.
“…난 괜찮은데.”
“미야아옹! 야아옹!”
필립의 시선이 타니아를 향했다. 그는 일단 타니아에게 들어야 할 것이 있었다. 이전에 물었을 때는 답하지 않았으나, 얼로이 백작을 어떻게 암살했는지는 꼭 확인해야만 했다.
‘얼로이 백작이 어떻게 마족으로 전생했는지 알아내려면 저 고양이 입을 열긴 해야 하는데.’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지금 당장은 목욕을 한 뒤 누워서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필립은 루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좀 피곤해서, 이야기는 내일 해도 될까? 난 목욕을 하러 갈 테니, 펠리시아 교수님과 좀 놀아드리렴.”
필립은 그렇게 말하곤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가 사라지자 루아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교수님 목욕탕에 계신데.”
목욕탕에 들어간 필립은 요정 유나의 환영을 받았다.
“어서 오세요.”
“요즘 좀 어때요?”
그녀는 요즘 별장 생활에 적응한 듯 보였다. 사실 적응할 것도 없었다. 그녀가 하는 거라곤 목욕탕 안에 얌전히 앉아 방문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었으니까.
“전 좋아요. 사실, 호수에 있을 때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해요. 거긴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보다 선객이 있는데, 괜찮아요?”
요정의 말에 필립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객?”
그러자 평평하던 수면에서 뭔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건 미리 목욕을 즐기고 있던 펠리시아였다.
“누나?”
“…어 …응. 안녕?”
그녀는 급히 근처에 있던 수건으로 몸을 가렸다. 필립 또한 유나 때문에 아랫도리에 수건을 감고 있었기에 다행히도 그리 민망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미안, 누나가 있는 줄 몰랐네. 조금 있다 들어올 테니 천천히 하고 나와.”
필립이 그녀를 배려해 자리를 피하려 하자 펠리시아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아니야! 난 다 했으니까. 그보다 너 괜찮아? 피가 그렇게 났는데 물에 들어가도 되는 거야?”
“알레시오스 왕자님이 내 머리통에 들이부은 포션만 해도 네 병이 넘어. 상처 같은 건 진작 아물었지. 빠졌던 왼팔은 아직 좀 아프지만.”
“…며칠 휴가를 줄 테니까 편히 쉬어. 그보다 네 목욕탕 너무 마음에 든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피로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야.”
“그래? 다행이네. 언제든지 놀러 와서 써도 돼.”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필립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조금 뻔뻔해지기로 했다. 펠리시아는 필립이 탕에 들어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았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별로 안 부끄럽네.’
잔뜩 긴장하고 있던 펠리시아의 자세가 조금 편해졌다. 애초에 오스왈드 백작 가문에선 종종 이렇게 함께 목욕을 즐기곤 했었다. 남매간의 혼욕은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오랜만에 살갗을 내보인다고 해도 결국 동생은 동생이었다.
한편 필립 또한 펠리시아를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여동생 정도로 여기고 있었기에 별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괜찮다면 괜찮은 것이었다.
“왕자님께서 말씀하시길, 필립 네게 훈장을 하사하신다고 하셨어. 은룡훈장이라고, 원래는 북부에서 혼자 마족을 토벌한 이에게나 수여되는 훈장인데 아무래도 서부 곡창 지대 근처다 보니 공이 꽤 큰 모양이야.”
펠리시아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필립이 조금 놀라 되물었다.
“…은룡 훈장이면 왕가가 보유하고 있는 보물 하나 주는 거 아닌가?”
“응. 그렇지?”
필립은 벌떡 일어났다.
그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출력 부족을 해결할 방법이 지금 막 생긴 셈이었다. 이렇게 정령이 머무르는 목욕탕에서 천천히 마력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영약으로 한방에 뚫는 것이 훨씬 나았다.
“…천사의 눈물. 그걸 받고 싶다고 좀 전해줘. 무조건 그것이어야만 해. 아니면 안 받는다고 꼭!”
난데없는 호들갑에 펠리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그게 뭔데 그래?”
“날 마나 조…… 아니, 아무튼 좋은 거.”
마나 조루에서 탈출시켜 줄 보물이라고 말하려던 필립은 급히 말을 바꿨다.
‘이러면 그 개고생을 한 보람이 있지.’
* * *
다음 날 필립은 알테어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필립이 휴가를 낸 것을 알자마자 곧바로 별장에 찾아왔는데, 필립을 마주한 그녀는 다짜고짜 한 병의 액체를 내밀었다.
“…공주님?”
“귀염둥아. 이걸 갖고 싶다고 했지? 왕실에 이게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는데, 이거 함부로 먹으면 위험한 건 알지?”
그녀가 내민 병은 ‘천사의 눈물’이라 불리는 액체였다. 비싼 크리스탈 병에 단단히 밀봉되어 있는 그 액체는 선명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어 마치 방사선에 노출된 것처럼 보였다.
“예, 압니다. 잘못 먹으면 몸이 터진다고 듣긴 했죠.”
“그래. 그 말대로야. 우리 귀염둥이가 이걸 갖고 싶어 한다고 예쁜이가 말하길래, 창고에서 하나 가져왔지. 훈장과 함께 수여될 보물은 더 귀한 것이 될 거야.”
“그러면 이건…?”
“……조카에게 주는 선물 정도로 생각하렴. 귀염둥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훤히 알고 있단다. 오러가 너무 모자라지? 내 전남편이랑 싸우는 모습을 보니, 수준에 비해 출력이 턱없이 부족하더구나.”
“역시 대단하시군요.”
필립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테어는 싱긋 웃으며 필립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나 정도 되는 검사라면, 네가 이 물건을 탈 없이 흡수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단다.”
“아니, 괜찮은데요…?”
필립은 극구 사양했다. 그는 프리비아에게 도와줄 것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성공이 보장된 보증수표나 다름없었고, 알테어는 솔직히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필립은 ‘천사의 눈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마법사의 도움을 받는 편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눈 딱 감고 들이키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이렇게 독한 마력을 지닌 걸 마실 땐 누군가가 마력을 유도해 주는 게 좋으니까. 설마 이걸 그냥 마실 셈은 아니지?”
“그, 그건 아닙니다만.”
필립은 식은땀을 흘리며 곤란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