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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1화 (11/119)

011화

* * *

십 분 정도가 지나고 리즈리엘 유세프가 돌아왔다.

여우 꼬리털로 만든 목도리, 그리고 몸에 붙는 비단 드레스를 본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던 리즈리엘 유세프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필립의 맞은편에 앉기 전, 오른손으로 드러난 가슴골을 가리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먼저 제가 저지른 무례를 사과드려요. 공자님.”

“그건 용서하겠습니다. 그리고 명심하세요.”

필립은 서두를 떼기 전 손가락에 낀 반지를 그녀에게 잘 보이도록 흔들어 보였다.

“나는 이 물건의 가치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세프 상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말입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눈치 싸움 같은 건 집어치우고 조금 건설적인 대화를 나눠 보죠.”

‘이 빌어먹을 망나니가 감히 날 우습게 봐?’

라고 생각하며 리즈리엘은 싱긋 웃었다.

“그럴게요. 공자님. 저를 가장 먼저 찾아 주셔서 감사해요.”

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만 아니었더라도 그녀는 당장 도시의 경비병을 모조리 불러 필립을 쫓아냈을 터였다.

‘인장을 가진 이상 저 망나니는 상회의 특별 회원이 될 거야. 무슨 방법을 써서든 그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녀는 현재 치열한 후계 경쟁 중이었다.

유세프 상회의 직계는 총 세 명, 리즈리엘은 그중 가장 세력과 기반이 약한 막내였다.

다른 기반이 있는 첫째, 그리고 둘째와는 달리 그녀는 후계 경쟁에서 탈락하는 즉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터였다.

상회의 특별 회원은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에서 회주와 같은 수준의 의결권을 갖게 된다. 호칭만 회원이지 사실상 상전이나 다름없는 위치였다.

그 이유는 오직 회주인 오슬레이 유세프만 알고 있을 것이었고, 지금 당장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필립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을 때 어쩌면 한참 앞서 나가고 있는 형제들보다도 한 걸음 앞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던 리즈리엘의 귓가에 필립의 기분 좋은 중저음이 들렸다.

“가장 먼저, 지금 이 순간부터 저를 상회의 특별 회원으로 대우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공자님.”

“그리고 리즈리엘 당신이 나를 전담하기를 원합니다.”

그 요구에는 리즈리엘 또한 움찔했다.

“…네?”

‘날 어떻게 해 보려고 저러는 건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필립을 곁눈질했다.

…솔직히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으나 어차피 그가 그러길 원한다면 리즈리엘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조건을 몇 개 거는 게 최선일 터.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필립은 그녀의 붉어진 뺨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거대 상회의 직계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미 있는 모습이었다.

“저… 저를 원하신다면, 기꺼이 공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할 의향이 있어요. 하지만 조건이….”

마음을 단단히 먹은 리즈리엘이 입을 열었으나 필립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뭘 생각하고 있던, 일단 내 이야기부터 들으십시오.”

“….”

“일단 나는 상회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유세프 양 당신을 강력히 지지할 예정입니다. 내가 갖게 될 의결권은 회주와 동급이니 내가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당신이 내 예상보다 무능력한 게 아니라면 다음 대 회주가 될 수 있겠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리즈리엘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걸 느꼈다. 방금 필립의 그 제안은 그녀가 목숨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필립에게 바쳐서라도 얻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먼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패를 내밀었다.

“아니 그, 왜죠?”

상인끼리 계약을 조율할 때에는 보통 제안에 대한 이유를 묻지 않는다.

질문하는 순간 상대보다 수가 낮음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리즈리엘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녀가 봤을 때 필립은 멍청해서 저런 제안을 한 게 아니었다.

정말로 멍청했다면 그녀와 대화를 나누지조차 못했을 테니까.

“당신은 고아원을 두 개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카데미에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하고, 가난한 평민 학생들을 위해 책을 싸게 팔기도 하더군요.”

그의 질문에 리즈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걸 어떻게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필립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아는 유세프 중에선 오직 당신만이 조건 없이 남을 도울 줄 압니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미소였다. 그가 구제 불능의 망나니라는 걸 리즈리엘은 아주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필립에 대한 적대감과 경계심이 눈처럼 녹아버리는 걸 느꼈다.

‘저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망나니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녀는 필립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아. 나 왜 이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피가 몰려 후끈거렸다.

리즈리엘은 필사적으로 호흡과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께서 베푸신 호의, 감사히 받아들일게요. 앞으로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필립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그런 수직적인 관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오래 봐야 할 텐데, 조금 더 편한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가능하다면 지금부터요.”

리즈리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입술을 떼었다.

“…예헤에.”

그리고 나온 건 태어나서 뱉은 것 중 가장 바보 같은 목소리였다.

* * *

아카데미로 돌아온 필립은 곧바로 교직원 기숙사로 향했다.

자신의 방문을 열자마자 그는 침대에 누워 잠든 루아를 발견했다.

눈을 감은 채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는 모습이 꽤나 안쓰러웠다. 고작 몇 시간 푹 잠든 것으로는 며칠간 쌓인 피로의 일부만 해결될 뿐이었다.

“일어난 것 다 알고 있다.”

필립이 말하자 루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죄송해요. 교관님.”

“죄송해? 뭐가?”

“제가 바보처럼 굴어서… 저 때문에 고생하셨잖아요.”

그녀는 필립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필립은 피식 웃었다.

“어린애가 애처럼 구는 게 잘못한 거라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일어나렴. 갈 데가 있으니.”

“…네?”

필립은 그녀가 스스로 일어나길 기다리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현질을 할 생각에 몸이 달아오른 것이었다.

“오늘 하루는 병결로 처리할 테니 수업은 걱정하지 말고…음?”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쿵쿵대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누군가 그의 방으로 오고 있는 것이었다.

곧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펠리시아 오스왈드 교수였다.

“필립 오스왈드 교관.”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상황을 파악한 뒤 걱정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학생을 본인 방에 재운 거죠?”

“잘 데리고 있다가 확 잡아먹으려고요.”

그의 농담에 펠리시아가 발끈했다.

“…너 진짜.”

“애가 며칠째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같은 방을 쓰는 아이들은 이 아이 울음소리 때문에 힘들어했고요. 딱히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사실 필립이 딱히 잘못한 건 없었다. 펠리시아 또한 필립이 어린 소녀를 어떻게 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쓸데없는 소문이 퍼질 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뭐 문제 있습니까?”

“…아뇨.”

“그러면 이제 좀 나가 주시겠습니까. 아무리 밤새 절 그리워하셨다지만 아침부터 이렇게 찾아오시면 곤란…헙!”

필립은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펠리시아의 앞차기를 피해냈다. 그녀는 화가 많이 난 듯 빽 소리쳤다.

“너 진짜 죽고 싶어서 그래?”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펠리시아를 설득했다.

“아니, 누나. 진정해. 내가 잘못했어. 학생 앞이잖아.”

분노로 잠시 이성을 잃었던 펠리시아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 잘못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으나 적어도 필립의 입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필립을 빤히 쳐다보다가 키득대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앗.”

어린 신입생이 필립과 그녀의 다툼을 보며 웃고 있었다.

“이제 웃는구나.”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펠리시아는 그런 필립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알던 동생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저는 이 아이를 데리고 아카데미 밖에 잠시 나갔다 올 생각입니다. 교수님.”

“내가 허락할 것 같나요?”

“미리 말씀드리는데, 허락하지 않으시면 몰래 납치해서 데려갈 겁니다.”

필립의 대답에 펠리시아는 두통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매만져야 했다.

“뭘 할 건데요.”

“이것저것 할 게 많습니다. 궁금하면 따라오시던가요.”

“…알았어요. 직접 감독하겠습니다. 교관.”

필립이 혼자 어린 여학생을 데리고 나갔다간 다음날 무슨 소문이 퍼질지 두려웠다. 게다가 허락하지 않으면 납치를 하겠다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펠리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어떠니? 네가 쉬고 싶다면 강요하지 않을게. 선생님들하고 잠깐 나갔다 오겠니? 꽤 재미있을 거다.”

필립의 질문에 루아는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그녀가 보기에 필립은 좋은 사람이었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자신을 왜 이렇게 챙기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아이 특유의 본능으로 필립이 자신을 꽤 예뻐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저씨 같아.’

루아는 아카데미에 오기 전, 산속에서 살았던 나날을 떠올렸다. 아저씨, 그리고 루엔과 함께 지냈던 날들.

해가 떠 있을 때는 루엔과 온 산을 헤집으며 놀았고, 해가 지면 아저씨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그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들을 들었다.

필립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그 ‘아저씨’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 * *

‘뭔가 잘못됐다.’

필립은 똑같은 길을 세 번째 걷는 자신을 발견했다.

점심때가 가까운 상점가엔 활기가 제법 돌았다.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나 하인, 혹은 경비병들이 그들이 모셔야 할 도련님이나 아가씨를 기다리는 동안 상점가에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었다.

필립은 펠리시아와 루아를 데리고 상점가를 걸었다.

“교관. 나는 대체 당신이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여긴 왜 온 거죠?”

펠리시아가 물었다. 필립은 말없이 가장 목 좋은 곳에 자리한 건물을 가리켰다. 유세프 상회의 건물이었다.

“유세프 상회 건물이잖아요. 저긴 왜요?”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얼마 전에 사귀었는데, 교수님께도 소개하고 싶군요.”

펠리시아는 필립의 대답에 입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는 루아에게 들리지 않도록 그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정신이 있는 거야? 대륙에서 유일하게 엘프하고 드워프와 거래하는 상단에 친구를 만나러 가겠다니? 저기서 사고라도 치면 넌 끝이야. 필립.”

“누나, 이제 날 걱정해 주는 거야?”

“널 걱정하는 게 아니라 검술 학부를 걱정하는 거야. 네가 쫓겨나면 새 교관을 구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언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쫓아낸다며?”

“….”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기에 펠리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필립은 삐죽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을 보며 잡아당기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렇게 필립을 따라 유세프 상회에 도착한 펠리시아는 정문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몸에 붙는 빨간 비단 드레스에, 붉은여우 꼬리털로 만든 목도리.

그녀는 저 여인을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저 사람은…?’

유세프 상회 프리비아 지부장, 리즈리엘 유세프.

매년 아카데미에 저택 한 채를 살 만한 금화를 기부하고, 학장이나 수석교수 정도가 아니면 얼굴조차 보기 힘든 여자였다.

“어머, 필립 공자님. 빨리 오셨네요.”

리즈리엘 유세프는 필립을 발견하자 눈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필립은 친근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공자님은 빼라니까. 우리 이제 친해지기로 한 것 아니었어?”

“내 정신 좀 봐. 그랬죠?”

그 모습을 보던 펠리시아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끼곤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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