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0화 (10/119)

010화

* * *

상자에 손을 대자 필립의 머릿속에 위엄 서린 목소리가 울렸다.

―…이곳에 다다른 자여. 그대의 자질을 시험하겠다.

원래 이런 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대는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가?

“압니다. 유세프의 황금 인장이죠.”

―그대는 그것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

필립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뻔뻔히 대답했다.

“사리사욕을 위해 쓸 겁니다. 돈 벌려고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합격이다. 그대는 내 후계자가 될 자격을 갖췄다. 같잖은 헛소리를 늘어놓았다면 머리통을 태워서 죽여버리려 했건만… 쯧.

목소리에 깃들었던 위엄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경박한 노인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필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 써먹겠습니다.”

―뭐, 그래. 잘 처먹거라.

목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상자가 덜컥 열렸다. 필립은 그 안에 담겨 있던 황금 브로치를 꺼내 손에 들었다.

“후우….”

방금 그 목소리는 전설적인 대부호이자 거상인 코린 유세프 본인이었다.

필립 또한 그 인물에 대해선 잘 몰랐다. 단지 드래곤과의 내기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필멸자라는 것 정도.

그러나 이 브로치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잘 안다.

이걸 알아내기 위해 적어도 100시간은 투자했으니까.

본래 이 상자에 손을 대면 몇 가지의 무작위 선택지가 뜨는데,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라든지 세상의 평화 같은 이타적인 선택지를 고르면 그 즉시 사망하거나 수십 가지나 되는 저주를 받아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상태가 된다.

‘…나는 이걸 몸으로 박아서 알아냈었지.’

필립은 검기를 일으켜 천장에 박힌 발광석을 싹 파낸 뒤 따로 챙긴 주머니에 담았다.

여기까진 쉬웠으나 다음 과정이 문제였다.

평생 누군가를 등쳐먹고 살았던 상인들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유세프의 황금 인장’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것을 유세프 상회로 가지고 간 뒤 유세프 가문의 당대 가주를 만나 특별 회원으로 인정받는 것까지가 필립의 목표였다.

밖으로 나온 필립은 상자에서 얻은 브로치를 손으로 잡았다.

불을 뿜는 용이 새겨진 브로치의 표면에 땜질한 자국이 보였다.

“이걸 뜯어야 하는데.”

필립은 네리아를 뽑아 다시 검기를 일으켰다.

―……안 될 것 같아요. 잘못했다간 그 브로치 다 갈리고 말걸요?

네리아의 말대로였다. 일렁이는 검기에 브로치를 가져다 대니 불안정한 형태 탓에 땜질한 부분만 잘라내려면 천운에 기대어야 할 것 같았다.

“검기를 고정할 수는 없나, 이거?”

―그러면 그게 검강이죠! 애초에 주인님은 검기를 어떻게 쓰시는 거예요? 네리아가 봤을 때, 주인님은 수 싸움이랑 심리전을 잘하시지 검술 수준은 딱 네리아의 여섯 번째 주인님 수준이거든요?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인데?”

―…재능은 뛰어난데 운이 없어서 제대로 못 배운 용병 정도요. 어릴 때부터 수준 높은 검술을 익힌 사람한테는 결국 지고 말걸요?

“그러면 검술 수준이 높아야 검기를 쓸 수 있다는 거니?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주인님 생각은 뭔데요?

“…검술과 마력은 별개야. 네리아. 이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어. 애초에 인간의 몸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마력이라는 힘은 비물질인 의지로 조작하는 에너지인데, 검술을 잘한다고 마력을 잘 다룬다는 게 말이 안 돼.”

―네리아는 주인님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쉽게 말하자면 검사로서의 기량과 마력을 다루는 능력은 상호 보완적일지는 몰라도 동의어가 아니라는 말이야. 월광검을 연구하면서 느끼는 건데, 접근을 좀 창의적으로 하면 이런 것도 가능해.”

―뭐래는 거야, 진짜.

필립은 정신을 집중하고 호흡을 다스리자 그는 마력이 몸에 흐르는 길을 느낄 수 있었다.

‘…단전에 마력이 쌓여 있는 게 느껴지긴 하는데.’

무인들은 이 단전이라는 기관에 가상의 공간을 만든 뒤 그곳에 마력을 모아 놓는다. 그가 빙의하기 이전의 필립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의 필립은 뭔가 불편했다.

마력이라는 힘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응집력을 지닌 에너지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아무리 오랜 연구와 발전을 거치더라도 몸에 마력을 쌓는 일은 불가능했을 터였다.

필립은 오른손 검지를 세웠다. 곧 그의 손가락을 타고 마력이 흘렀고, 그 마력은 압축되어 손가락 주변에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어…어떻게 하신 거예요?

네리아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기는, 손가락 위에 오러를 형성한 거지.”

―그게 되는 거였어요? 그보다 손가락! 손가락 괜찮으세요?

필립은 오러를 두른 손가락으로 브로치의 땜 자국을 갉아내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지.”

―괜찮을 리가 없어요! 사람 몸으로 직접 오러를 뽑아내면 피부가 다 터지고 말 거예……어, 진짜 멀쩡하네?

“직접 뽑아낸 게 아니라, 그냥 손가락 주변에 형성한 거야.”

―대체 어떻게요…?

“혹시 원심력과 인력에 대해서 알고 있니?”

―네리아는 그런 거 몰라요.

“그러면 나중에 알려줄게. 좋아. 열렸군.”

브로치를 열자 그 안에 모래가 가득했다. 모래를 쏟으니 군청색 보석이 박힌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필립은 반지를 왼쪽 새끼손가락에 끼우고 다시 상점가로 걸음을 옮겼다.

* * *

아카데미의 상점가는 이윤을 많이 내긴 어려운 곳이었다.

유동인구 자체가 적었고, 방학 기간엔 아예 죽은 상권이나 다름없게 되는 탓이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귀족, 혹은 학계에 이름 높은 교수들과 안면을 틀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대륙을 무대로 삼은 거대 상회라면 상점가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물론 유세프 상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국가 간의 무역에도 발을 걸칠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는데, 돈이 된다고 해서 아무 일이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애초에 일반 고객을 대상으론 상업 행위 자체를 하지 않았고, 유서 깊은 가문이나 마탑, 혹은 ‘검신전’이라 불리는 범국가적 무력 집단 같은 곳과 거래했다.

‘하지만 이 반지가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필립은 손가락에 낀 ‘유세프의 황금 인장’을 만지작거리며 유세프 상회 건물 앞에 섰다.

상점가의 노른자위 건물을 통째로 개조한 유세프 상회의 지부는 아직 이른 아침임에도 업무를 시작했는지 경비병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정지. 누구십니까?”

창이나 할버드가 아니라 검을 찬 경비병이었다. 필립은 그에게서 심상찮은 기세를 느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혹시 어떤 용무가 있으신지…?”

딱 봐도 귀족처럼 보이는 필립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경비병 또한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지부장 출근했습니까?”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까?”

“선약은 없지만 아마 있는 약속도 취소하고 날 만나려 들 겁니다. 지부장에게 전해 주십시오. 필립 오스왈드가 황금 인장을 가져왔다고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죠.”

경비병은 잠시 갈등하더니 정문을 열고 안에 있는 사람에게 몇 마디를 전했다.

오스왈드 백작 가문이라면 왕가와도 친분이 있는 명문가였다.

‘게임에서는 한참 기다려야 했는데, 역시 귀족 신분이 좋긴 좋군.’

평민 신분인 주인공은 유세프 상회에 함부로 기웃거리기도 힘들었다.

황금 인장을 찾아서 지부장을 만나려고 해도 만나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미리 명성 수치를 올려놓지 않는다면 약속 자체를 잡기가 힘들었다.

황금 인장에 관한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실례했습니다.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필립은 경비병의 안내를 따라 상회 건물 안에 들어섰다. 소속 상인 몇 명이 필립과 마주치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면 지부장님께서 금방 오실 겁니다.”

경비병은 필립을 응접실로 안내한 다음 열린 문 옆에 부동자세로 섰다.

필립은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을 잠시 살피다가 고급 가죽 소파에 몸을 묻었다.

‘…뭐야. 이건.’

안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궁금할 만큼 편한 소파였다. 순간적으로 잠이 올 정도였다.

그는 다리를 꼰 채 지부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몇 분 정도 기다렸음에도 지부장이라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그, 지부장님께선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고 계셔서….”

경비병이 당황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필립은 피식 웃었다.

‘분명 황금 인장을 가져왔다고 했는데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유세프의 황금 인장’이 상회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아는 필립으로서는 지부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가서 전하십시오. 저는 지금부터 3분 동안만 기다릴 예정이고, 그 안에 날 만나러 오지 않는다면 다른 지부로 갈 거라고. 그녀는 아마 무슨 말인지 알 겁니다.”

“아니… 그….”

늠름한 경비병의 얼굴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그는 이 상회의 지부장이 얼마만큼 성질이 더러운지 잘 알고 있었기에 뒷감당이 두려웠다.

“2분 50초 남았군요. 시간 계속 갑니다.”

“아, 알겠습니다.”

판단을 마친 경비병이 재빨리 움직였다. 그가 사라지고 정확히 30초 후, 계단을 급하게 오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실크 드레스를 입은 젊은 미녀가 허겁지겁 응접실로 들어왔다.

필립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손을 들어 올렸다.

“왔습니까?”

유세프 상회의 프리비아 지부장, 리즈리엘 유세프는 숨을 몰아쉬며 필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빠르게 움직인 탓에 훤히 드러난 어깨 위로 땀이 몇 방울 흘렀다.

그가 들어 올린 손에 군청색 보석이 박힌 반지가 보였다.

필립은 그녀가 안쓰럽다는 듯 혀를 몇 번 찼다.

“그러게 왜 사람을 저울질하셨습니까?”

리즈리엘 유세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화가 났고, 수치스러웠으나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빌어먹을 망나니 같으니.’

리즈리엘 유세프는 눈앞의 미남을 살폈다.

필립 오스왈드.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 만큼 유명한 망나니.

그녀 또한 그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교 파티에서 난동을 피웠다거나, 친누이의 하녀를 범한 일. 귀족 가문의 후계자 몇 명을 때려눕힌 사건 같은 것들이었다.

‘장래성이라곤 없던 망나니 귀공자가 황금 인장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그녀는 유세프 상회의 주인인 오슬레이 유세프의 친딸이었다. 그렇기에 오직 직계만이 알 수 있는 ‘황금 인장’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3대 회주였던 코린 유세프가 사망한 뒤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특별 회원’의 자격을 상징하는 물건.

‘…아니, 애초에 저게 진짜 인장일 리가 없지. 저 망나니가 어떻게 그걸 얻을 수 있었겠어?’

리즈리엘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그녀를 바라보던 필립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저 아가씨. 뇌정지가 제대로 온 것 같은데.’

물론 필립은 그녀가 누군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리즈리엘 유세프는 계승권을 가진 유세프 상회의 직계 중 막내로, 가진 야심, 능력과 달리 세력이나 영향력이 미미한 여자였다.

따라서 세게 나갈수록 필립에게 이득이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는 필립이 갑이었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유세프 양.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겁니까? 나는 단지 내가 받아야 할 마땅한 대우를 원할 뿐입니다.”

“…공자님. 제가 마땅한 대접을 해드리기 전에 황금 인장을 잠깐 확인할 수 있을까요?”

리즈리엘 지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그러시던지.”

필립은 손가락에 낀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군청색 보석에서 손전등처럼 빛이 넓게 퍼지더니 응접실 벽면에 닿자 푸른 드래곤의 형상이 나타났다.

유세프 상회의 창립자, 엘리온 유세프의 상징이었다. 저건 세상에서 오직 유세프 상회의 직계만이 알 수 있는 문양이었기에 모조품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이톤의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히끅!”

“이제 됐습니까?”

필립이 묻자 리즈리엘 지부장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히끅! 실례가, 히끅, 많았어요. 히끅! 부디 용서를… 히끅….”

정중히 고개를 숙인 리즈리엘 지부장의 어깨가 딸꾹질로 인해 크게 들썩거렸다. 필립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귀엽기는.’

리즈리엘 유세프는 커뮤니티에서 제법 인기가 많았다. ‘유세프’라는 성을 지닌 다른 인물들은 지나치게 인간미가 없었으며, 게임이 끝날 때까지 사무적인 관계를 유지할 뿐이었다.

하지만 리즈리엘만은 친밀도를 올리면 농담을 건네거나, 여주인공을 선택했을 땐 친밀한 스킨십 같은 것도 걸어오곤 했다.

그리고 특유의 츤데레적인 성격 탓에 은근히 편지 같은 것도 많이 보내는 성격이었다.

‘유세프의 황금 인장’을 다른 지부에 가져가면 계승권 경쟁에서 패배한 리즈리엘은 살해당하거나 대사막, 혹은 북부 전선 같은 위험한 장소로 좌천당하게 된다.

그 탓에 필립은 황금 인장 루트를 완벽히 알아낸 이후론 항상 리즈리엘에게 인장을 가져가곤 했다.

“…가서 물을 한 잔 마시고 오시죠. 이야기는 그 후에 나눕시다.”

“네… 히끅!”

필립의 권유에 리즈리엘은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그녀는 지금부터 필립의 물주가 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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