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5화 (5/119)

005화

* * *

늦은 오후였다.

근로 장학생 셰릴은 책장에 쌓인 먼지를 털며 생각했다.

‘오늘 저녁 메뉴가 뭐였더라? 크루아상? 데니쉬?’

맛있기로 소문난 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건 근로 장학생의 특권이었다. 메뉴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으나 침이 고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법 맛있는 메뉴일 것 같았다.

그녀는 길게 기른 암갈색 곱슬머리를 질끈 묶고, 동그란 뿔테 안경을 고쳐 썼다. 앞으로 책장 두 개만 더 정리하면 오늘 할 일은 대충 끝이었다.

학기 시작 사흘 전, 텅 빈 도서관은 그녀의 일터이기도 했고 놀이터이기도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교수나 교관이 아주 가끔 들르는 걸 제외하면 이곳엔 오직 그녀뿐이었다.

끝없이 늘어진 책장을 바라보며 오래된 종이 냄새를 맡다 보면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으나 고질적인 고독감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마세요. 저처럼 천한 여자를 사랑하시면 안 돼요.”

어제 읽던 소설 ‘치명적인 하녀’의 주인공을 따라 하거나,

“계집은 검을 들 자격이 없다고? 하! 너처럼 저열한 사내에겐 내 검이 아깝다. 덤벼. 그 잘난 콧대를 부숴 줄 테니!”

유명한 여기사 ‘엘베라’의 어록 따위를 중얼대며 일하지 않으면 너무 지루하고 외로워서 어떻게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해지세요, 공주님. 빛나는 보석도, 아름다운 드레스도 전쟁터에서는 훈련장에서 흘린 땀 한 방울보다 무가치한 것들…응?”

셰릴은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고개를 돌린 그 즉시, 자신이 한참이나 늦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흡!”

입을 틀어막고,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모를 청년을 바라보았다.

윤기가 흐르는 금발에 새하얀 피부. ‘귀공자’라는 단어를 사람의 얼굴 모양으로 깎아 놓은 듯한 미청년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청년은 딱히 그녀를 비웃거나 하진 않았다. 그는 단지 귀엽다는 표정으로 셰릴을 빤히 쳐다보았고,

셰릴은 그저 어딘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차라리 비웃어요. 차라리 비웃어 달라고요! 위로하려고 들지 말아요. 제발!’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필립은 학생을 비웃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니까.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청년, 필립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하려 했다.

“크흠, 내가 영 좋지 않은 때에 온 것 같은데, 미안하다.”

곱슬머리 소녀, 셰릴은 얼굴은 물론이고 손등까지 새빨개진 채 눈물을 글썽였는데, 필립은 그녀를 달랠 방법을 몰랐다.

“발음이 제법 좋던데. 연극배우를 해도 될 것 같더군.”

“아…감사합니다.”

“그러면 나는 찾을 책이 있어서.”

반쯤 죽어가는 목소리를 듣자 필립은 재빨리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가 찾는 책장은 입구에서 몇 분은 걸어야 했다.

“……훌쩍.”

불쌍한 소녀가 훌쩍거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필립은 역사책이 모인 책장을 찾았다.

―어우, 네리아가 다 부끄러워요. 저거 진짜 오래 가는데. 그나저나 주인님, 여기서 뭘 찾으시게요?

허리에 찬 네리아가 묻자 세빌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전서.”

―비전서요? 아카데미 도서관에 그런 것도 있어요? 가문의 비밀 보관소나 던전이 아니라요?

비전서는 말 그대로 비밀리에 전승되는 기술을 익히기 위한 아이템이었다.

대개는 귀족 가문이나 무력 단체의 재산이었고, 특별한 이벤트를 해내지 않으면 구경조차 하기 힘든 물건.

그런 비전서가 프리비아 아카데미에는 다섯 권이나 있었다. 필립이 탐내는 건 그중 하나,

‘월광검. 이것만큼 지금 내게 어울리는 게 없지.’

“이 아카데미도 200년은 넘었으니,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 같은 건 차고 넘친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데 주인님은 어떻게 알아요?

“…그냥?”

―치사해. 좀 알려주면 안 돼요?

‘쓸데없이 예리한 칼 같으니….’

필립은 투덜거리며 책장을 뒤졌다.

‘월광검’은 히어로즈 아카데미에서도 가장 얻기 힘든 스킬 중 하나였다. 기본적으로 세계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단서조차 얻기 힘들었으니까.

본래는 아카데미 내부와 외부 활동으로 나가는 각종 지역에서 ‘이툰다’ 대륙에 관한 정보들을 모으고, 그 정보들 사이에서 힌트를 얻은 다음 그 힌트를 이용해 또 단서를 찾아내서 마지막은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찾아내야 했는데,

정해진 책을 정해진 순서대로 정해진 칸에 배열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나마도 그 책을 누군가가 빌려 간다면 반납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학이죠?”

―누구랑 얘기하세요? 아까 저 여자애한테 혼잣말이 옮으신 거예요?

필립은 네리아를 무시하고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찾았다.’

역사 구역에서 두 권의 책을 찾아낸 필립은 이번엔 지리학 구역으로 향했다.

―주인님 네리아 심심해요.

“잠깐만, 몇 권만 더 찾으면 돼. 아, 여기군.”

다음은 문학 구역이었다. 이곳은 다른 구역에 비해 책이 두 배는 더 많았다.

―어, 이거 네리아의 두 번째 주인님이 좋아하던 책인데.

한참 책장을 훑던 필립이 네리아의 말에 돌아보았다.

책의 제목은 ‘달빛, 그리고 소녀들’. 마침 필립이 찾던 책이었다.

“아, 고맙다.”

―…주인님도 혹시 여자애들끼리 막 끌어안고 뽀뽀하는 그런 거 좋아하세요?

“딱히? 아, 이게 그런 내용인가? 혹시 네 두 번째 주인님이라는 사람이……아니다.”

그는 금단의 상자를 열 생각이 없었다. 과거는 과거에 묻어 두는 게 가장 좋았다.

‘역시 이 몸은 사기야.’

필립은 눈마저 사기였다. 시력, 식별력, 동체 시력, 그 모든 게 완벽했다. 덕분에 한 권씩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책장을 대충 훑는 것만으로 원하는 책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총 여섯 권의 책을 찾아낸 뒤 필립은 서쪽 구석, 미분류 구역으로 향했다. 이곳 벽면에 난 창문 아래에는 낡은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작은 책꽂이가 보였다.

‘비운의 천재 마스터 오템을 기리며.’

‘검술의 황금기를 논하다.’

‘룬다흐 산맥의 드래곤.’

‘달빛, 그리고 소녀들.’

‘검을 깨닫다―부제 : 검의 모든 것’

‘천재에게 바친다.’

이 책꽂이에 여섯 권의 책을 순서에 맞게 정리하면 비전서를 얻을 수 있었다.

순서는 다름 아닌 육하원칙.

‘마스터 오템이, 검술의 황금기에, 룬다흐 산맥에서, 달빛을, 검을 통해 깨달아서, 천재에게 바치기 위해.’

오래전 활동하다 모습을 감춘 소드 마스터 ‘오템’이라는 인물이 달빛을 바라보다 문득 얻은 깨달음을 검법으로 엮은 게 바로 ‘월광검’이라는 이야기였다.

책을 순서대로 꽂자, 곧 꽂힌 책들의 페이지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새었다. 그 빛은 가느다란 줄기를 이루어 필립의 손에 잠시 머물더니 이내 사라졌다.

“….”

필립은 ‘월광검’의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 자리 잡을 때까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건 책이 아니라 지식으로 전승되는 종류의 비전서였다.

―세상에, 네리아는 이런 거 처음 봐요. 뭐예요? 어떤 비전서에요?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본래 ‘월광검’은 익힐 만한 비전서가 아니었다.

입수 난이도부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았으며, 필립처럼 게임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모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게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게다가 시스템상 비전서는 오직 하나만 익힐 수 있었다.

다른 S급 비전서들이 마력을 쌓는 법, 그러니까 ‘심법’을 포함하고 초반부터 쓸 수 있는 초식이 들어있는 것과 반대로 ‘월광검’은 어느 정도 마력이 쌓이고 신체가 단련되어야 맛이라도 볼 수 있었다.

최소 조건은 검기를 다룰 것. 그만한 검술 숙련도와 마력이 되지 않으면 입문조차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 조건을 달성하기 전에 스펙 부족으로 거의 무조건 게임 오버가 된다는 거였다.

필립 또한 월광검을 어떻게든 써먹어 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그걸 익히고서는 결코 중반 에피소드까지 진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엔 익혀도 별 상관이 없지. 당장 무력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습득 조건도 이미 만족하고 있으니.’

마치 누군가가 안배한 것처럼 필립의 현 상황은 딱 조건에 맞아 떨어졌다.

‘설마 이게 안 좋으려고?’

써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몰랐지만 이렇게 습득이 어려운 비전의 성능이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본래라면 다른 비전서를 택했겠으나 처음과는 달리 필립에겐 여유가 있었다. 도박에 가까운 수를 던져도 될 만큼.

비전서 ‘월광검’의 내용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필립은 왜 책의 형태가 아닌 이런 식의 전승을 택한 것인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월광검은 도저히 문장으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추상적이면서도 고차원적인 개념으로 가득했다.

실재하는 현상보다는 불확실한 가능성에 대해 논했고, 그 가능성의 형태 또한 직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접근 방법 자체가 일반적인 검술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필립이 본래 있던 세상에서도 찾기 힘들 만큼 극도로 세련된 문학적인 비유.

굳이 예를 들자면 만찬에서 흘린 한 방울의 포도주가 바다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하는 듯한, 상상력이 부족한 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내용.

범재의 접근을 근본부터 불허하는 그야말로 진짜배기 천재를 위한 비전서였다.

‘…그런데 왜 대충 알겠지?’

필립은 그 추상적인 이미지 사이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뭐라고 설명조차 하기 힘든 그 정보들이 거대한 흐름을 말하고 있다는 걸 대충이나마 눈치챈 것이었다.

월광검의 첫 발자국을 내딛는 방법을 그는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주인님?

그리고 그 순간 네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현실감을 되찾은 필립이 주변을 둘러보자 이미 어둑어둑했다.

―대체 몇 시간이나 그러고 계신 건지 아세요? 네리아는 주인님이 기절한 줄 알았잖아요!

게다가 잔뜩 화난 에고 소드와 한 명의 곱슬머리 소녀가 필립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이 몇 시지?”

필립이 묻자 불쌍한 근로 장학생 소녀가 대답했다.

“오후 아홉 시요. 그, 불러도 대답이 없으셔서….”

셰릴은 울고 싶었다.

그녀는 뭔가 중요한 고민을 하는 듯한 귀족 교관을 건드릴 만큼 용감하지 못했다. 그 덕에 저녁 식사를 걸러야 했으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크루아상이 나오는 날이었는데.’

꼬르륵, 텅 빈 위장으로부터 부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그걸 들은 건 셰릴만이 아니었다.

‘나 때문에 굶은 건가?’

아홉 시면 교직원 식당이 닫을 시간이었다. 그는 셰릴에 대해 알고 있었다.

평민 출신에, 방학 때는 근로 장학생으로, 학기 중에는 교수들의 심부름을 하며 학비를 겨우 충당하는 마법 학부의 3학년생.

큰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이 귀여워서 인기가 꽤 많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필립이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저녁을 걸렀구나.”

“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교관님.”

“괜찮다고? 사과의 의미로 크루셀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 주려고 했는데?”

크루셀 베이커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셰릴의 입에 침이 가득 고였다.

그곳은 아카데미의 돈 많은 귀족 교직원이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빵집으로, 가격이 상당함에도 학기 중에는 예약이 꽉 들어찰 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물론 셰릴처럼 가난한 근로 장학생은 꿈도 꾸기 힘들 만큼.

“스읍. 정말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으니 따라와라.”

필립을 따라간 셰릴은 그날 며칠을 먹어도 남을 만큼의 빵을 품에 가득 안고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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