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아카데미 속 엑스트라 (4)
백한영이 본 마빈은 아주 전형적인 ‘천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천재라는 뜻이다. 엄밀히 따지면 마빈은 전현적인 ‘천재’라기보다는, 조금 특수한 천재였으니까.
아무튼 마빈의 재능은 무공, 이 세상 말로는 무술에 특화돼 있었다.
그 편린은 가상의 그레이 울프를 쓰러트릴 때 이미 살짝 드러났다.
무술이라곤 생전 배워 본 적 없는 사람이 적의 급소를 정확히 노리고, 연계기로 마무리까지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나 마빈은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다. 전부 재능 덕이다.
‘비유하자면 본능적으로 정답이 보이는 타입이지.’
어떻게 보면 최동협과 비슷해 보일 수 있었지만, 둘의 재능은 종류가 아예 달랐다.
최동협은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거고, 마빈은 본능적으로 정답을 알아채고 그걸 바탕으로 사고해서 움직이는 거니까.
‘아마 모든 무공을 잘 익힐 거야. 가리는 게 없는 거지.’
사람마다 특화된 분야라는 게 있었다.
최동협 같은 경우에는 권, 김태식 같은 경우에는 검, 이런 식으로.
하지만 마빈에겐 그런 게 없었다.
마빈의 재능을 흔히 정안(正眼)이라 부른다. 올바른 길을 보는 재능이라는 뜻이다.
정공(正功), 사공(邪功), 마공(魔功) 그 어떤 걸 배우든 마빈은 찰떡같이 익힐 것이었다.
태극혜검을 익힌다?
그는 태극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세상을 눈에 담을 것이었다.
마공 중의 마공인 흡성대법(吸星大法)을 배운다?
수천 가지 종류의 내공을 모아 일종의 혼돈(渾沌) 상태를 만드는 것이 정답이라는 걸 깨닫고 수많은 사람의 내공을 갈취할 것이다.
이처럼 마빈은 모든 무공을 완벽에 가깝게 익힐 수 있겠지만, 거기에 취해 착각하면 안 된다.
결국 사람에겐 가장 잘 맞는 무공이 하나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백한영조차 자신이 가장 잘 다루는 무기는 검이라 소개한다.
그런데 고작 마빈 정도가 모든 무공을 익힌다고 설치고 다닌다?
이도 저도 안 될 가능성이 매우, 매우 높았다.
그리고 그걸 백한영도 잘 알았다.
마빈의 장점은 큰 그림에서도 작은 그림에서도 올바른 길을 보는 정안의 소유자라는 것.
이런 녀석에겐 원래 검을 주는 게 맞았다.
검만큼 선택지가 다양한 무기도 드물었다. 매 순간 올바른 선택지를 알아채는 마빈이라면 검술을 극한으로 활용할 것이었다.
백한영이 그랬던 것처럼.
자. 이제 무기가 정해졌으니 무공을 알려 주면 되는데.
여기서 백한영은 고민했다.
과연 마빈에겐 뭐가 제일 잘 어울릴까.
지난 며칠 동안 의자에 누워 디저트를 처먹으며 고민한 결과 백한영은 결론을 내렸다.
이걸로 가자.
백한영은 마빈에게 책 한 권을 던져 줬다.
이 세계의 언어로 적혀 있는 책(바르세알이 만들었습니다)을 받아 든 마빈은 책의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안검법(正眼劍法)? 이게 뭐죠?”
“이름이 마음에 안 들면 대충 바꾸든가. 내가 작명까지 할 정도로 열정이 넘치진 않아서.”
“혹시 직접 만드신 검술입니까?”
“그치?”
마빈은 미심쩍은 얼굴로 책을 살펴봤다.
책 서문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정안, 그것은 올바른 길을 걷는 자들을 위한 눈이다.]
“정안? 이게 뭐죠?”
“네 재능 이름.”
“올바른 길? 이건…….”
“말로 하면 길어지는데. 그건 그냥 네가 무공을 익혀 보면 알 거야.”
마빈이 책을 천천히 읽었다.
책의 내용을 전부 읽은 마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내가 배울 수 있다고?
마빈은 고개를 들어 백한영을 바라봤다.
마빈의 생각을 읽은 건지 백한영이 단호히 말했다.
“다 되니까 가서 초식만 익히고 호문클루스랑 싸워.”
“연습도 안 하고 바로요?”
“정안을 가진 녀석이 왜 이렇게 소심해. 어렸을 때 맞고 살았냐?”
“아뇨…….”
“아니면 얼른 가. 나 슬슬 눕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힘없이 말한 마빈은 책을 옆구리에 끼고 터덜터덜 빈 수련장으로 올라갔다.
백한영이 말했다.
“저 녀석, 다 좋은데 너무 소심하단 말이야. 어떻게 못 고치나.”
“손을 쓸까요?”
“놔둬. 정안이 워낙 사기라 별문제는 없을 거야.”
* * *
아일라는 호문쿨루스와 마주 보며 검을 뽑았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서.
결국 호문쿨루스는 인공 생명체에 불과했다.
그런 게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백한영, 저 사람이랑 붙어 보고 싶어.’
백한영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아일라는 백한영에게 무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비범한 인간에게 아무것도 없을 리 없었으니까.
아일라가 호문쿨루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얼른 호문쿨루스를 쓰러트리고, 이 훈련이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호문쿨루스의 검이 움직였다.
캉!
아일라의 검과 호문쿨루스의 검이 정확히 부딪치는 소리가 수련장에 울려 퍼졌다.
아일라는 당황하지 않고 검을 움직였다. 훈련용으로 만들어진 호문쿨루스다. 단번에 쓰러질 거라고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펜드라류 검술.
1식, 청루(靑淚).
아일라의 검이 물방울같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호문쿨루스의 검이 아일라의 흐름에 휘말려 갈 길을 잃었다. 순식간에 열린 검로. 아일라는 빈틈투성이의 호문쿨루스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서걱.
호문쿨루스가 기민하게 움직였지만, 완벽히 피하진 못했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유효타였다.
어깨에 부상을 입은 호문쿨루스가 눈을 끔뻑였다.
어깨를 매만지는 게, 고통이 없진 않는 모양이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딱히 초재생 능력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일라는 눈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검을 들었다.
‘녀석의 검술은 별것 없어.’
신체 능력은 제법 뛰어난 것 같았지만, 딱 거기까지.
기초는 닦여 있는 것 같았지만 검술 자체에 조예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상대하긴 쉬웠다.
청루만 사용해도 상대는 파훼하지 못하고 목이 달아날 것이었다.
‘역시 도움이 안 돼.’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다시금 확인한 아일라는 재차 검을 들었다.
이번엔 확실히 마무리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일라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호문쿨루스 또한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서로의 몸이 교차되기 직전, 아일라의 검이 움직였다.
펜드라류 검술.
1식, 청루(靑淚).
물방울을 닮은 검술이 펼쳐졌다.
아일라의 검이 막힘없이 허공을 갈랐고, 호문쿨루스가 움직였다.
펜드라류 검술.
1식, 청루(靑淚).
캉!
아까와 똑같이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수련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아일라의 표정은 아까와는 다르게 살짝 변했다
‘방금 그건?’
펜드라류 검술. 그것은 펜드라 가문에 내려오는 가전 검술이었다.
가주의 직계가족 외엔 익힐 수 없었고, 그렇기에 다른 사람은 사용할 수 없어야 했건만.
호문쿨루스는 아무렇지 않게 펜드라류 검술을 사용했다.
이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검술이라는 건 겉만 따라 한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게 가능했으면 검술이 비전(祕傳)으로 전해져 내려올 수 있을 리가.
하나의 검술을 익히고 싶다면 그 안에 담긴 뜻이 뭔지, 의념이 뭔지 같이 익혀야만 됐다. 그게 상식이었다.
상식이었는데.
호문클루스의 행동은 그 상식에서 벗어났다.
‘신기해.’
아일라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호문클루스를 바라봤다.
물론 그건 상식 밖의 재능을 목격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나랑 똑같은 걸 하는 녀석은 처음이야.’
호문클루스가 자신과 똑같은 짓을 할 수 있어서였다.
아일라 또한 남들이 가르쳐 주지 않은 검술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아일라를 ‘천재’라고 불렀다.
그런 아일라와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니. 그럼 호문클루스도 천재라는 건가?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일라는 남의 검술을 따라 하는 일을 그만둔 지 오래였다. 결국 즉석에서 검술을 따라 해 봤자 한계가 뚜렷했으니까.
상대의 검술을 따라 해서 생기는 장점은 하나였다. 의외성. 그게 끝이었다.
그 외에는 단점투성이였다.
우선 상대가 필연적으로 해당 검술을 오래 수련했다는 것부터 문제였다. 당연했다. 이제 막 따라 했으니까.
자신이 펼치는 검술이 상대에게 익숙한 검술이 되는 것도 단점이었다. 오랫동안 수련한 검술을 갑자기 적이 펼치는 거다. 검술의 장단점을 전부 꿰뚫고 있는 입장에서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아일라는 오직 자신의 검술을 갈고닦는 것에만 집중했건만, 저 호문쿨루스는 아직 그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일라를 빤히 쳐다보던 호문쿨루스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이번엔 저쪽에서 먼저 공격할 생각인 듯했다.
어차피 사용하는 게 청루면 상대하는 건 간단했다. 청루는 어디까지나 전투의 흐름을 제어하는 초식. 파훼하고 싶다면 그냥―.
백일영류 검술.
1식, 적루(赤淚).
호문쿨루스의 검이 굉음을 일으키며 아일라에게 쏘아졌다.
콰아아앙!
아일라가 다급히 펜드라류 2식, 순류(順流)로 받아쳤지만, 여파를 완전히 해소하진 못했다.
충격에 몸이 뒤로 밀려난 아일라가 그녀치곤 매우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호문쿨루스가 펼친 검술은 펜드라류였지만 펜드라류가 아니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면 정상이다. 실제로 아일라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히죽. 호문쿨루스, 백일영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너, 그것밖에 안 돼? 하고 도발이라도 하듯.
아일라가 발끈하며 검을 들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즉석에서 지어낸 검술.
그런 얄팍한 검술에 당할 정도로 아일라에게 수련을 느슨하게 한 기억은 없었다.
“덤벼.”
오러를 최대로 끌어 올리며 아일라가 땅을 박찼다.
직후.
훈련장에 거대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일영이가 일을 잘하네.”
쪼옥. 세레나가 준 사과주스를 마시며 감탄한 백한영은 나직이 이어 말했다.
“저게 재현이 되네. 이야. 추억이다. 예전에 저 짓 많이 했었는데.”
“기뻐하시니 이 바르세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뭐 완벽히 내 수준은 아니긴 한데, 저 정도면 열심히 재현했다. 그런데 이영이랑 삼영이는… 쟤들은 적극적이지 않다? 도발도 안 하고.”
“개체별로 성격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폐기하고 새로 만들까요?”
“그럴 필요는 없고. 딱히 수련에 방해되는 건 아니니까.”
백한영은 백이영과 백삼영, 즉 호문쿨루스 2, 3에게 시선을 옮겼다.
마찬가지로 프라일러류를 베껴서 사용하는 백이영과 정안검법을 베껴서 사용하는 백삼영.
슈진은 감히 가문의 검술을 따라 하는 것에 분개해 열을 내는 중이었고, 마빈은…….
“어? 어? 어?”
자기보다 정안검법을 더 잘 쓰는 백삼영에게 당황해서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흠.
순조롭네.
백한영은 마빈에게 신경을 끈 후 의자에 드러누웠다.
백한영이 말했다.
“바르세알, 그래서 오락거리 찾은 건 없어? 나 심심해.”
“금방 대령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