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귀환했다-94화 (94/117)

95화 선택받은 용사 (1)

“콘텐츠가 모자라.”

성검 발사대 겸 스트리머 홍유진의 말에 천재 마법사 겸 편집자, 엘레나 크래프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또 시작이네.”

“예전부터 조짐이 보였는데, 이제는 진짜 위기야.”

홍유진의 표정은 심각했다.

진짜 방송 콘텐츠가 메마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홍유진에게 엘레나가 심드렁한 표정을 한 채 말했다.

“우리 할 것 없을 때 하던 것 있잖아. 저쪽 세상에서 겪었던 일 떠들기. 그거 하면 되지. 우리 아직, 반이 뭐야. 10분의 1도 말 못 했잖아.”

“어설퍼.”

홍유진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그만큼 엘레나의 사고방식은 안일했다.

“대중은 냉정해. 똑같은 얘기만 무한히 반복했다가는 금방 떠나갈 거라고.”

“안경은 어디서 가지고 온 거야. 뭐 알았어.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콘텐츠 고민을 해 보자는 거지.”

그렇게 제862회 용사 파티 회의가 개시되었다.

방에서 섬네일을 그리다 끌려 나온 그냥 도적, 이엘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콘텐츠 그거 꼭 고민해야 돼? 시청자는 어차피 우리 얼굴만 봐도 좋아하잖아.”

이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홍유진의 인터넷 방송은 여자들의 외모가 이슈를 끌며 성장했으니 말이다.

“시작은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홍유진은 단호히 부정했다.

방금 말했듯 시청자는 냉정했다.

외모는 확실히 엄청난 무기지만, 롱런하기 위해선 확실한 콘텐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홍유진은 자신 있게 주장했다

“실제로 지표를 봐. 최근 시청자 수가 어떻지?”

“지표? 잠깐만.”

엘레나는 방 한구석에 설치돼 있던 스크린을 내려 그 위에 최근 시청자 수를 띄웠다.

그걸 본 엘레나와 이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우상향 중이네?”

“와. 오히려 최근에 더 늘었네. 인터넷 방송 파이는 거기서 거기라고 하지 않았어? 저기서 더 늘 수 있어?”

“해외 시청자 유입이 급격하게 늘었더라. 우리가 실시간 번역을 제공해서 그런가 봐.”

“이럴 리가 없는데.”

홍유진은 충격받은 얼굴로 스크린을 훑어봤다.

하나 진실은 바뀌지 않았다.

외모의 힘은 위대했다.

비현실적으로 예쁜 여자가 재잘재잘 떠들기만 해도 엄청난 시청자가 확보되는 것이다……!

“이래선 안 돼. 이건, 이건, 열심히 콘텐츠를 고민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야!”

“자. 862회 용사 파티 회의도 이걸로 해결됐습니다. 모두 박수.”

짝짝작. 공허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무룩해진 홍유진. 그런 그의 등을 쓸어 주며 세피아가 말했다

“그래도 용사님의 말대로 콘텐츠를 고민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희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을 위해서도 더 재미있는 방송을 보여 주고 싶어요.”

“세피아, 너 방송인 다 됐다?”

그 말에 세피아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됐든 여기서 계속 살려면 적응해야 되니까요.”

“알겠어. 콘텐츠라. 그럴듯한 아이디어 있는 사람? 손 좀 들어 줄래?”

이엘의 물음에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봤다.

갑자기 콘텐츠를 떠올려 보라고 해도 뭐가 나올 리 없었다. 아무리 현대에 빠르게 익숙해졌다지만 용사 파티 멤버는 근본적으론 이세계인이다. 그럴듯한 아웃풋이 나오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때였다. 스윽. 누군가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엘프 궁수, 티냐 나피스였다.

티냐가 말했다.

“나무를 키우는 방송은 어떻겠습니까.”

“나쁘지는 않지만, 참고 삼아 묻겠는데 보통 얼마나 걸려?”

“10년은 걸릴 겁니다. 짧죠.”

“엘프의 수명을 생각하면 짧긴 하네. 근데 우리는 인간을 대상으로 방송을 만들잖아. 안 돼. 다음.”

이번엔 세피아가 손을 들었다. 홍유진은 기대감이 서린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자신의 말에 동조해 준 세피아였기에 혹시 좋은 콘텐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세피아가 자신 있게 말했다.

“포교 방송은 어떨까요.”

“솔직히 말해, 세피아. 그냥 신도를 늘리고 싶은 거지.”

“세상을 구한 인지도로 신도를 늘리려고 했는데, 못 하고 용사님을 따라왔잖아요. 신님이 슬퍼하세요.”

“나중에 시간을 줄게. 근데 지금은 안 돼. 아직 기반을 다질 때야.”

세피아의 의견도 거절한 홍유진은 이번엔 엘레나와 이엘을 바라봤다.

사실 홍유진은 세피아와 티냐에겐 별 기대를 안 했다. 둘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그 둘이 아직 순수한 게 컸다.

현대 문물에, 인터넷 방송에, 돈에 덜 찌들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걱정 마라. 세피아와 티냐와 다르게 돈에 미친, 현대 문물에 빠르게 적응하다 못해 아예 홍유진보다 더 전문가가 돼 버린 사람이 둘이나 있었으니.

자본주의의 화신, 엘레나 크래프트와 이엘이 홍유진의 방송을 빛으로 인도해 줄 것이었다.

엘레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시선이 불순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구원자를 바라보는 시선이야.”

“누가 구원자를 그렇게 봐. 황금에 미친 인간이면 모를까.”

“아무튼 어때. 아이디어 있어?”

“아이디어라. 으음.”

엘레나가 팔짱을 끼고 상념에 잠겼다.

방송에 홍유진만큼 진지하지 않은 엘레나는 딱히 콘텐츠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게 방송을 모른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엘레나는 홍유진의 방송을 홍유진 본인보다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엘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방송의 장점이 뭔지 알아?”

“내 방송?”

“얘기를 바꿀게. 네 장점이 뭘까? 인간적인 장점 말고 방송적인 장점.”

“어…….”

홍유진이 멈칫했다.

내 장점? 그게 뭘까?

잠깐 고민한 홍유진이 말했다.

“얼굴이 잘생겼다는 것?”

“그건 바로 적당히 생겼고, 적당히 말 잘하고, 적당히 재밌다는 거야. 아, 게임도 적당히 못한다.”

“크으윽.”

다른 건 몰라도 게임을 못한다는 게 치명타로 들어갔다.

남자는 몇 살이 되든 게임 자존심이 사라지지 않는 생명체였다.

“잠깐. 장점 맞아?”

“맞아. 실제로 저 요소 때문에 네 방송을 많이 볼걸?”

“아니, 그런 사람이 널렸다고는 하지 않을게. 근데 유니크 하지도 않잖아. 저게 어떻게 장점이 돼?”

“그야 그런 사람이 우리 같은 여자애들이랑 재밌게 떠들고 있으니까. 대리 만족이 되는 거지.”

“…….”

그러니까 뭐야.

별로 안 잘나 보이는 사람(거슬릴 정도로 못나지도 않음)이 예쁜 여자애들이랑 떠드는 게 내 방송의 핵심이었단 말이야?

내 말발이 핵심이 아니라?

“너를 인간적으로 좋…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랑 별개로 그게 핵심은 아니긴 해.”

“아.”

세계의 진실은 잔혹했다.

홍유진의 무기는 외모도, 말발도, 여태까지 겪은 수많은 경험도 아닌 예쁜 동료들이었던 것이다.

홍유진의 눈이 죽었다.

이 세상은 결국 외모가 전부다.

내가 뭘 하든 파티 멤버들이 등장할 때까지 시간을 때우는 용도일 뿐. 아무 의미 없어.

내가 게임을 하든 먹방을 하든, 아무도 관심 없다고!

“유진아, 정신 차려.”

“더러운 외모주의 세상. 이런 세상은 필요 없어.”

“진정해, 유진아.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어? 안 끝났다고?”

“요컨대 저런 요소 때문에 사람들이 네게 호감을 품는다는 뜻이야. 워너비라고 해야 되나? 저런 게 워너비가 되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엘레나는 현재 홍유진의 방송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고 인기를 끌고 있는 건지 세세하게 설명했다.

모든 설명을 들은 홍유진은 기세등등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그러니까 뭐야. 날 위주로 콘텐츠를 짜야 된다고?”

“결국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건 너라. 우리만 나와도 어느 정도 보겠지만… 지금만큼의 시청자는 안 나올걸?”

“녀석들. 내가 좋으면서 아닌 척하긴. 좋아. 알아들었어. 근데 그래서 뭘 해야 될까?”

“글쎄. 그래도 생각보다 어렵진 않을 거야.”

싫어하는 사람은 뭘 해도 싫어한다는 말이 있다.

이건 반대로도 적용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걸 해도 좋게 보였다.

즉 이미 시청자의 호감을 산 홍유진은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쉬웠다. 적당히 재미만 있으면 사람들은 좋아할 것이었다.

“…초대석을 한 번 더 할까.”

“초대석? 초대할 사람은 있어? 너 매일 집에만 있어서 인간관계가 좁잖아.”

“김태식 씨를 불러 볼까. 요즘 핫하잖아.”

“친해?”

“연락처는 있어.”

방향은 정해졌지만 내용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적당히 재미있는 콘텐츠만 해도 된다고?

일단 그 적당히 재미있는 콘텐츠가 뭔지 알려 주지 않을래? 난 모르겠으니까.

아. 죽겠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터질 것 같던 홍유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세상을 한 번 더 구하는 게 쉽겠다.”

“무슨 소름 끼치는 얘기를 하는 거야. 말이 씨가 된다잖아. 조심해.”

“이미 세상을 구하고 은퇴한 퇴물한테 세상을 구해 달라고 찾아올 사람이 어딨어. 그건 퇴물 학대야.”

“그렇긴 한데, 그래도 조심해.”

“알겠습니다.”

엘레나의 말에 순순히 대답하며 홍유진은 천장을 바라봤다.

마왕을 퇴치하고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홍유진은 많은 준비를 했다.

몸이 일상에 익숙해지도록, 정신이 치열한 전장에서 멀어지도록.

뭐, 느긋하게 누워서 시간을 보낸 것뿐이긴 하지만, 나름 힘들었다.

불안감에 밤늦게 깨는 일이 사라지기까지 약 반년이 걸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성공적으로 은퇴했다고 할 수 있―.

딩동.

오랜만에 감상에 젖었던 홍유진은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배달? 이엘 너니?”

“왜 나야.”

“그야 네가 배달 음식을 가장 많이 먹으니까.”

“나 아니야. 아직 안 시켰어.”

“그러면 뭐지. 택배인가?”

딩동. 딩동. 딩동. 딩동.

홍유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인종이 사정없이 울렸다.

홍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 택배면 문 앞에 휙 던져 놓고 사진을 보내지, 저렇게 초인종을 부서져라 누르지 않았다.

저랬다가 컴플레인이라도 들어오면 많이 피곤해지니까.

대체 누구야. 종교 권유도 저런 식으로 하진 않겠다.

홍유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쓸데없는 용건이면 한 소리 할 생각을 하며 현관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홍유진은 벌컥 문을 열었고.

멈칫했다.

현관문 앞에 이상한 게 있었다.

“흠.”

정확히는,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

아니. 이상하다고 하기엔 조금 이를지도 몰랐다. 방문자는 홍유진의 허리 정도의 키를 가진 여자였는데, 그녀가 한 거라고는 초인종을 누른 것밖에 없었으니까. 이것만으로 그녀를 이상한 사람 취급 하기엔 이를지도 몰랐지만.

그럼에도 홍유진은 단호히 그녀를 이상한 사람으로 분류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이상한 방문자가 입을 열었다.

“성물의 반응이 있긴 하지만, 약하군. 여기가 아닌가?”

“너, 누구야.”

“이것 참 곤란하군. 기껏 적합자를 찾은 줄 알았건만. 허탕이었나.”

“너, 누구냐니까.”

그녀의 말투, 옷차림, 생김새까지. 홍유진에겐 굉장히 익숙했다.

당연했다. 약 8년간 저런 느낌의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살았다. 익숙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녀가 말했다.

“뮬리안 이트렉트. 편하게 뮬리라고 부르게. 초면에 미안하다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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