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귀환했다-65화 (65/117)

66화 초인의 시대 (14)

이현진과 권왕 윤한을 비롯한 구조 팀이 연구소에 도착한 건 그날 오후 1시경, 해가 중천에 떴을 때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연구소 구석에 이미 제압된 라크라티아의 조직원들을 보며 이현진이 중얼거렸다.

“설명하자면 길어요.”

소냐와 함께 조직원들을 지키고 있던 김태식의 대답에 이현진은 머리를 긁적이곤 할 일을 시작했다.

납치된 사람들을 풀어 주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은 치료 시설에 이동시키고 나니 몇 시간이 훌쩍 흘렀다.

“고생하셨습니다.”

모든 일을 마무리한 후 이현진은 의문에 빠졌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상념에 잠기기 위해 이현진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소냐의 시선에 연구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뻥 뚫린 연구소 벽을 따라 이동하자 곧 설원이 나왔다.

‘이 근처만 눈이 최근에 쌓인 것 같다?’

하긴, 흔적을 보면 연구소 내부에서부터 여기까지 격렬한 전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때 눈이 다 녹기라도 한 건가. 김태식은 불꽃의 마검을 소환하는 능력자였으니 그럴듯했다.

후우. 담배를 한 모금 머금은 이현진이 연구소 주변을 거닐었다.

모든 게 끝난 후긴 해도 나름대로 상황을 살피려 한 것이다.

‘응?’

연구소 주변을 걷던 이현진은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혹한의 추위로 몸이 벌벌 떨려야 할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묘하게 몸이 따뜻했다.

이현진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서리 바람 사이로 드문드문 느껴지는 훈훈한 바람을 따라서 한참을 이동하자, 툭. 이현진의 입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뭐야, 이거.”

눈이 잔뜩 쌓인 겨울 풍경 사이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일직선으로 쭉 들어서 있었다.

이현진이 천천히 이질적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더워.”

이현진이 두꺼운 외투를 벗어 팔에 걸쳤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은 후 손을 뻗어 나무를 만지자 꿈틀거리는 생기가 느껴졌다. 겨울나무 같지 않은 생명력에 이현진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봤다.

청록의 이파리가 보였다. 훈훈한 바람이 불었다.

하얀색 세상에서 오직 이곳만이 여름이었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이현진이 헛웃음을 터트리곤 담배를 한 대 더 입에 물었다.

그래.

김태식이 왜 설명하자면 길다고 한 건지 알 것 같긴 하네.

* * *

“오빠, 어디 갔다 왔어?”

“잠깐. 왜?”

“아니, 새벽에 커피라도 타 줄까 해서 슬쩍 봤는데 없더라고.”

“볼일 좀 보고 왔어.”

백한영의 말에 백은하가 고개를 갸웃거리곤 물었다.

“피곤해 보이네. 마실 거라도 줄까?”

“아니, 괜찮아. 너는 오늘 일 안 나가? 바쁘다며.”

“오늘은 안 나가. 일이 하나씩 마무리되는 시기라 슬슬 여유가 생기거든.”

그렇다면 다행이다. 요즘 얼굴 보기 힘들어서 걱정이었다.

일하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 해야지. 집에 들어올 시간도 없는 게 말이 되나.

“푹 쉬어. 건강 해칠라.”

“응.”

백은하에게 걱정의 말을 던진 백한영은 이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오빠.”

“응?”

갑작스러운 백은하의 부름에 백한영은 걸음을 멈추고 동생을 바라봤다.

“…괜찮아?”

“뭐가?”

“아까 이상했잖아. 괜찮냐고.”

“아. 그거. 해결됐어. 괜찮아, 이제.”

“그럼 다행인데.”

백은하가 뭔가 미심쩍다는 듯 백한영을 바라봤지만, 백한영은 살짝 웃어 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털썩. 침대에 드러누운 백한영이 멍하니 천장을 봤다.

아까 전. 김태식이 위험하다는 전화를 받은 후 백한영은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고자 집으로 잠깐 돌아왔었다.

미리 챙겨 놨던 만화책이 더럽게 재미없는 것만 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튼 집으로 돌아온 백한영은 일이 끝나고 돌아온 백은하와 마주쳤고.

“오빠, 무슨 일 있어?”

“왜?”

“표정이 안 좋아서.”

바로 걱정을 끼쳤다. 백은하가 백한영의 심경이 복잡한 걸 바로 눈치챈 것이다.

“어…….”

저 말을 들었을 때 백한영은 잠시 고민했었다. 지금 자기가 품고 있는 고민을 남에게 말해도 되는 것인지.

남에겐 말해 봤자 의미 없는 고민이었지만, 가족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상담 정도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원칙에 어긋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될까?”

“…그게 무슨 상황이야.”

“그냥 말 그대로의 상황이야.”

“법에 어긋나는 거야?”

“내가 세운 원칙에 어긋나는 거야.”

백은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자기가 세운 원칙에 어긋난다라. 쉽지 않은 문제였다.

“원칙을 어기면 어떻게 돼?”

“어기면―.”

원칙이 세워진 이유는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세상에 한없이 관여하다가 모든 걸 망쳐 버리는 경험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서.

당장은 괜찮다. 하나 한번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결국 원칙을 세운 의미가 사라진다.

다시 생각해도 이게 맞았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심란할까.

“원칙을 세운 이유는 알겠어. 그리고 그것 때문에 오빠의 머리가 복잡한 것도. 그런데 오빠, 그래서 오빠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고 싶냐니.”

“원칙 이런 것 말고. 오빠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그거야.”

당연히 도와주고 싶었다. 저번에도 말했듯 백한영은 인간이었다. 신조차 두려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게 사람의 마음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 죽을 게 뻔히 보이는데 그걸 방치하며 유쾌함을 느끼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도와주고 싶어도 원칙이 방해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이건 절대자가 됐음에도 인간의 삶을 살고 싶은 백한영이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백한영에게 검신이 될 재능이 깃든 순간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할, 운명인 것이다.

“도와주고 싶으면 도와주면 되잖아.”

“여태까지 말했잖아. 그러면 원칙이―.”

“원칙이 뭔데. 난 그런 건 모르겠어. 뭘 위한 원칙인데. 오빠를 위한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한 거야?”

“둘 다야.”

“어느 쪽이든 이상해. 오빠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막는 원칙이 무슨 의미가 있어. 오빠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야. 마음이 원하는 걸 원칙으로 막는 건, 내가 볼 땐 너무 이상해.”

“…….”

백한영이 입을 다물었다.

최근에, 라고 해도 몇 년 전이지만, 백은하와 비슷한 소리를 한 사람이 있었다.

‘백 가가도 사람이야. 당연히 실수할 수도 있어. 근데 그렇다고 마음의 문을 닫는 건 난 반대야. 그건 내가 아는 백 가가가 아니야.’

‘원칙을 세웠을 뿐이야. 그리고 내가 실수를 한 결과 세상이 어떻게 됐나 봐. 저게 사람이, 인간이 실수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 맞아?’

당시 백한영은 눈앞의 끔찍한 결과물을 치우느라 급급했다. 원칙도 그 과정에서 세워졌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원칙만 세우면 정말 끝인가에 대한 의문은 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 그건 일종의 법칙이었다. 신조차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세상엔 존재했다.

재능이 주어진다. 환경이 주어진다. 시련이 주어진다. 목표가 주어진다.

그 모든 것이 운명이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 존재했으며, 백한영쯤 되는 인간은 그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백한영은 자신이 운이 좋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재능이, 환경이, 운명이 부여됐다. 아마 무엇 하나라도 빠졌으면 지금의 백한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백한영은 지금의 경지에 도달한 자가 뭘 해야 되는지도 잘 알았다.

어떤 운명이 부여되었는지 잘 알았다.

그걸 거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건 언젠가 찾아올 종막이었다.

거부할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움직이지 않는다. 결승점에 도달할 시간을 최대한 지연시킨다.

그걸 위해 세운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든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운명에 순응한 거지?’

백은하의 말대로였다.

바라는 게 명확한데 원칙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 웃겼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백한영은 백은하와 대화를 하다 말고 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김태식이 있는 곳에 허공을 가르며 등장했다.

그다음은 뭐, 익히 아는 대로 흘러갔다.

원칙은 깨졌다. 세상에 관여할 틈조차 안 주겠다는 백한영의 선언은 일단 어그러졌다.

아직 사례는 하나가 끝이었지만, 이게 하나가 될지 수십 개가 될지는 이제 아무도 몰랐다.

백한영조차.

백한영은 중원에서의 일을 잠시 떠올렸다.

모든 일이 마무리 된 후의 일을.

마신을 베어 버리고, 신조차 두려워할 힘을 손에 넣은 그날 백한영은 생각했다.

이 힘이 있다면 자기가 여태까지 겪어 왔던 온갖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진실로 아무도 슬퍼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없앤다. 어린아이나 할 법한 유아적인 망상이었지만, 백한영은 그걸 시도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했다.

모든 범죄가 사라졌다. 모든 다툼이 사라졌다. 모든 증오가 사라졌다.

초인의 기감 아래 놓인 세상은 초 단위로 모든 문제가 박살 났으며, 해결됐다.

백한영에게 수면은 필요 없었다. 이미 그의 육신은 인간을 초월한 지 오래였다.

잠도 자지 않는 초인이 열성적으로 세상을 지키자 유토피아가 열렸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백한영이 세상의 모든 범죄자를 없앤 그날.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무림인은 원래 별세상 사람 취급을 받는다. 수면 위를 걷고 맨손으로 바위를 부수며 허공을 밟는 사람을 보통 인간과 같은 취급 하는 게 더 웃겼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여태까지 수많은 고수가 등장했지만, 대륙 전체에 퍼진 범죄를 일시에 소탕한 인간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저건 별세계를 넘어 다른 차원의 존재다. 그걸 인정한 사람들의 태도는 빠르게 바뀌었다.

사람들은 동시에 신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건 실체가 없는 신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현세에 도래한 검의 신. 백한영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포는 숭배를 낳는다. 먼 옛날 권력이란 게 생긴 후로부터 변하지 않은 하나의 진리였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점점 변했다. 상식이 변했다. 모든 건 백한영이라는 현세에 도래한 신에 맞춰 변화했다.

백한영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말을 하도록 바뀌었다.

백한영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행동을 하도록 바뀌었다.

약 10년에 거쳐서 서서히.

인간의 자유의지가 거세되고 모두가 기계처럼 사는 꼴을 본 백한영은 깨닫고 만다.

자신이 틀렸다는 걸.

그래서 그만뒀다. 세상을 감시하는 걸 그만뒀다. 범죄자를 막는 걸 그만뒀다.

처음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한 달 만에 범죄자가 등장했다. 그러나 아무런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백한영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곧 세상이 혼란스러워졌다.

한 달 만에 10년 전으로 회귀한 것이다.

어린아이 앞에서 부모가 살해되고, 사랑하는 애인이 눈앞에서 끔찍한 꼴을 당하는 일이 빈번히 등장했다.

비극이 흘러넘쳤다.

그럼에도 백한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저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끝내 인정한 것이다.

원칙은 이때 세워졌다.

세상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미 검신련을 세워 버리고 말았으니 일은 하겠지만, 책상머리에서 서류만 처리한다.

그 짓을 몇 년 정도 했을 때 회의감에 사로잡혀 다 때려치우고 지구로 귀환하는 일이 발생하긴 했지만, 세상이 엉망이 되는 일이 다시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백한영이 원칙을 신뢰한 거다.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이미 신으로 추앙받은 후 백한영과 이렇게까지 가까워진 사람은 없었다.

백한영이 누군지 정확히 몰랐던 김태식이었기에 이토록 친해지는 게 가능했던 거다.

“운명.”

아는 만큼 보인다. 지식의 저주라고도 하는 그거다.

운명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았기에 순응하고 받아들이려고 한 것이다.

근데, 운명 그게 뭐.

예전엔 내가 실수를 한 게 맞아. 근데 이제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잖아.

운명 까짓것 오라고 해.

난 선택을 했어, 이미.

다른 누구의 뜻도 아닌.

내 의지로 말이야.

‘여태까지랑 행동이 크게 바뀌진 않겠지만, 마음이 가는 걸 막는 일은 이제 없을 거야.’

운명을 거부한다고 하면 거창하지만, 순순히 따를 생각은 없었다.

원래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이상행동이자, 특권이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백한영이 방 밖으로 나갔다.

배도 고픈데, 은하랑 밥이나 먹으러 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백한영도 모르게 아주 은밀히.

두근.

모든 게 완성되고 완결돼 더는 성장할 곳이 없는 백한영의 내면에서, 아주 자그마한 변화가 시작됐다.

그가 ‘운명’ 대신 스스로의 ‘의지’를 선택한, 그 순간부터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