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귀환했다-64화 (64/117)

65화 초인의 시대 (13)

잠깐 당황했던 니콜라이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따지고 보면 김태식과 소냐도 쥐도 새도 모르게 침입했었다. 그때 다른 사람이 따라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쥐 새끼처럼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서는군.”

“숨어 있던 건 아니고, 지금도 헷갈려. 이게 맞나.”

“뭘 말하는 거지.”

“넌 몰라도 돼.”

니콜라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묘하게 경박해 보이는 남자. 저런 인간은 둘 중 하나였다.

정신병자든가, 여유가 있든가.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보군. 하나 거기까지다.’

S급 각성자라도 되나 본데, 니콜라이의 입장에선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S급 각성자는 늘 자신이 넘친다. 스스로가 인류의 정점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자연히 그렇게 됐다.

S급은 확실히 강력한 각성자였지만, 강함은 늘 상대적인 법. 그 S급 각성자도 니콜라이와 비교하면 많이 부족했다.

니콜라이가 백한영을 훑어보며 물었다.

“넌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지?”

“그건 왜 물어봐. 그리고 그걸 누가 순순히 알려 주겠냐. 이거 웃긴 놈이네.”

백한영은 어이없어하며 슬쩍 뒤를 확인했다.

쓰러져 있는 김태식을 소냐가 낑낑대며 일으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쟤 권총도 쐈었지. 백한영은 잠시 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린애가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다 큰 어른을 지키는 모습을 보니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몇십 년 전, 중원에 혼란이 닥쳤던 시기가 있었다.

혈교가 준동했다. 단일 세력으로 최강이라는 마교가 붕괴하고, 수많은 피가 흘렀다.

백한영이 중원에 빙의한 지 5년째 되던 날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강자존에 의해 돌아가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고수가 똬리를 틀고 있는 마굴. 그게 바로 마교였다. 그런 곳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거다. 상식이 파괴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백한영은 어땠냐면, 의뢰를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승의 유지를 잇기 위해 낭인이 된 백한영은 한 의뢰를 받았다.

처음엔 별것 없었다. 한 아이를 한 달 동안 호위하면 끝인 임무였다.

스승의 친우에게 들어온 의뢰를 백한영은 흔쾌히 수락했다. 호위라는 게 원래 까다로운 부분이 많아 기피하는 의뢰였지만, 스승의 친우기도 했고, 의뢰비가 평균보다 거의 5배는 많았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호위 대상은 어린아이였다. 곤륜산 인근에서 의뢰의 상세 내용을 들은 백한영은 살짝 당황했다.

다른 추가 인원 없이 호위 대상 한 명을 안휘까지 데려가 달라는 의뢰. 특이하다 못해 괴상했다. 보통은 추가로 수행원을 붙이는 게 정상이었다. 다 큰 성인이면 모를까, 어린애를 낯선 낭인 한 명과 붙여 놓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스승의 제자니 믿는 건가. 백한영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차피 낭인은 의뢰만 잘 수행하면 됐다. 세세한 사항은 알 필요 없었다.

그렇게 백한영은 호위 대상을 데리고 청해를 떠났고.

혈교가 준동한 건 그로부터 딱 3일 후였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뭐, 지금 김태식과 소냐와 비슷했다.

호위 대상인 소녀를 찾는 혈교인들.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백한영.

‘원하는 걸 줄 테니까 이 사람을 가만히 놔둬.’

조그마한 몸으로 앞으로 나서는 소녀까지. 그냥 똑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욱 김태식을 매정하게 끊어 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과거 모습이 겹쳐서 보였으니까.

백한영이야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소녀를 지켜 내긴 했지만, 그거랑 별개로 백한영과 김태식의 상황은 어딘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소녀가 중요 인물이라 노려진다는 것까지 말이다.

‘스승은 왜 천마랑 인연이 있어서.’

천마가 스승과 어떻게 인연이 생긴 건지, 그리고 천마가 왜 의뢰를 맡긴 건지는 아직도 몰랐다.

의뢰를 받던 당시에는 상대가 정체를 숨기고 있어 물어볼 수 없었고, 모든 사정을 알게 된 후엔 이미 천마가 유명을 달리했기에 물어보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아마 혈교가 준동할 미래를 읽고 소천마를 몰래 빼돌려서 살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잘되진 않았다. 살리긴 했는데 처음 의도대로 혈교 놈들에게 소천마를 들키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옛 추억에 잠기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하아. 하얀 숨을 내뱉으며 백한영이 잠깐 하늘을 바라봤다.

어둑했던 밤하늘이 어느새 새파랗게 변하고 있었다. 해가 뜨고 있는 거다.

백한영이 고개를 내렸다.

니콜라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치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백한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윈터 액시즈(Winter Axis)를 소환했다.

“능력이 뭔지 말하기 싫다면 됐다. 직접 알아보지.”

윈터 액시즈에 마나가 모였다.

니콜라이의 몸에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써서 백한영을 쓰러트리는 것이다.

각성 능력으로 강화된 니콜라이의 육체가 눈 바닥을 박차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쩌저적. 혹한의 냉기를 흩뿌리며 윈터 액시즈가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쾅! 백한영의 검과 창이 만나며 땅이 흔들렸다.

니콜라이의 창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상대에게 틈을 줘서는 안 됐다.

라인하르트류 마창술.

2식. 스톰 브레이커.

윈터 액시즈가 허공을 거칠게 찢었다. 쩌저적! 창이 움직인 경로를 따라 얼음이 맺혔다.

빙 속성의 강기(罡氣)가 백한영을 덮쳤다.

콰아앙!

백한영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얼음의 기둥이 만들어졌다.

모든 냉기를 증폭시키는 윈터 액시즈의 힘이었다.

“쥐 새끼처럼 도망은 잘 치는구나!”

뒤로 한참 물러난 백한영을 향해 소리치며 니콜라이가 분석에 들어갔다.

상대의 움직임이 기민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등장했을 때 언제 이동했는지 파악조차 안 됐지.

속도와 관련된 각성 능력자인가. 그것참, 군침이 도는군.

저런 능력자를 상대하기 위해선 힘을 집중하면 안 됐다.

쥐 새끼를 잡기 위해선 약을 뿌려야 하는 법.

광범위한 공격이 필요한 때였다.

니콜라이가 윈터 액시즈를 머리 위로 들었다. 우웅―! 창끝에 거대한 마나가 모였다.

거기에 더불어 각종 냉기와 바람과 관련된 각성 능력이 발동됐다.

모든 힘이 한 점에 모였을 때. 니콜라이의 창이 정해진 흐름대로 움직였다.

라인하르트류 마창술.

3식. 블리자드.

얼음의 폭풍이 사방에 몰아쳤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방금 한 건 어디까지나 발을 묶기 위함이다.

추가로 결정타를 준비해야—.

“애도 있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서걱. 니콜라이는 문득 그런 소리를 들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 전조 없이 얼음의 폭풍이 사라졌다.

백한영이 신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또 뭐야. 능력이 왜 이렇게 많아.”

“내가 바로 신이 될 자라는 증거지.”

“신?”

백한영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그리 신을 좋아하는 걸까.

신 그거 별것 없는데.

“신이 좋냐 나쁘냐는 둘째 치고, 너, 창을 휘둘러 본 적은 있냐?”

“뭘 말하는 거지?”

“훈련을 해 본 적이 있냐고.”

“나한텐 그런 건 무의미하다.”

이래서 각성자들은. 아니, 쟤는 더 심한 것 같았다. 무슨 살면서 창 한 번 안 휘두른 놈이 무술을 사용하고 있어.

능력이 많아서 그런 건가? 저게 저 녀석의 방식이라면 참견하진 않겠지만, 일단 백한영이 보기엔 저놈은 신이 되기엔 한없이 부족해 보였다.

아직까지는.

니콜라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심히 거슬리는군. 머리를 낮춰 줄 필요가 있겠어.”

라인하르트류. 마창술.

1식. 스톰 브링어.

윈터 액시즈가 폭풍을 부르며 백한영을 노리고 쏘아졌다.

“음.”

백한영이 자세를 잡고 검을 움직였다. 목표는 니콜라이의 창이었다.

라인하르트류. 마검술.

1식. 스톰 브링어.

폭풍과 폭풍이 만나며 거센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뒤로 몸이 주욱 밀려난 니콜라이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떻게 네가 그 능력을 사용하는 거냐!”

아무리 니콜라이가 무공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각성 능력을 빼앗으며 이것저것 얻은 게 있었다. 검술로 변형됐다고 해도 자기 무공을 상대가 쓰는데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설마 네 능력은.”

니콜라이가 여태까지 없던 충격을 받았다.

확실히 남의 능력을 빼앗는 능력이 존재한다면, 남의 능력을 따라 하는 능력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나직이 말헀다.

“카피 능력.”

“카피 능력 같은 소리 한다.”

백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원에선 이 짓을 하면 기겁하던데, 저놈은 무공이 무슨 스킬인 줄 아는 건지 각성 능력이 아니면 따라 하지 못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 능력, 내게 내놔라!”

니콜라이가 능력을 폭발시켰다. 드디어 찾았다. 신이 될 수 있는 마지막 퍼즐을 기어코 발견한 것이다.

윈터 액시즈에 다양한 각성 능력이 모였다.

각성 능력. 양자택일(兩者擇一). 마력이 힘으로 바뀌어 윈터 액시즈에 깃들었다.

각성 능력. 쇼크 웨이브(Shock Wave). 충격파가 윈터 액시즈에 중첩됐다.

각성 능력, 각성 능력, 각성 능력―.

모든 힘을 집중시킨 상태로 니콜라이가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라인하르트류 마창술.

4식. 템페스트.

거센 회전 기류를 만들며 윈터 액시즈가 빠르게 대기를 가로질렀다.

윈터 액시즈가 백한영의 몸을 꿰뚫기 직전. 니콜라이는 황홀감에 빠졌다.

이걸로 마지막 퍼즐을 맞추고 진정한 의미의 신이 될 수 있었다.

그런 니콜라이를 보며 백한영이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그 좋은 창술을 그렇게밖에 못 쓰냐. 무공이 아깝다, 이 자식아.”

후발선제(後發先制). 늦게 움직여 상대를 제압한다.

라인하르트류 마검술.

4식. 템페스트.

쩌엉! 어설픈 니콜라이의 창이 백한영의 검과 충돌해 튕겨 나갔다.

충격파에 뒤로 물러나며 니콜라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같은 무술을 썼는데 내가 밀리는 것이지.

심지어 나는 수많은 능력을 동시에 썼는데!

이건, 이런 건 계획에 없었다.

나는 신이 될 인간이다. 이딴 곳에서 꺾일 수 없었다.

상대는 강하다. 확실히 강적이다.

니콜라이의 각성 능력은 프레데터(Predator). 각성자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최상위 포식자였다.

당장은 저놈에게 밀릴지라도 시간만 주어진다면, 더 많은 능력을 흡수할 수 있다면 결과는 달라질 것이었다.

후퇴하자. 지금은 꼴사나워도 결국 웃는 쪽은 내가 된다.

니콜라이의 수많은 능력이 발동되며 주변을 가득 메웠다. 시야를 방해하는 것이다.

니콜라이가 가속 능력을 사용했다. 공간계 능력을 버리고 가는 게 아까웠지만, 그건 나중에 다시 찾으러 오면 됐다. 지금은 목숨을 부지하는 게 맞았다.

화악. 시야가 길게 늘어지며 니콜라이의 몸이 설원을 내달렸다.

눈밭을 가로지르며 니콜라이가 이를 악물었다.

이 내가 도망가다니. 이 굴욕, 언젠가 갚아 주겠다.

니콜라이가 사납게 지껄였다.

“놈, 내가 신이 되는 그날을 기다려라.”

“그놈의 신, 신. 그게 뭔지는 알고 찾는 거냐.”

니콜라이가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허공을 밟으며 니콜라이를 따라가던 백한영이 바닥에 착지했다.

자리에 멈춰 선 니콜라이의 표정이 굳었다. 굴욕을 감내하고 도주를 선택했는데 실패하다니.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 추하게 도망치는 게 애초에 잘못됐어. 맞서 싸운다.’

니콜라이의 손에 윈터 액시즈가 잡혔다. 니콜라이가 마나를 끌어 올렸다. 재차 능력을 집중해 백한영을 꿰뚫을 생각이었던 것인데.

니콜라이가 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던 백한영이 검을 들었다.

언제까지 저러는 걸 보고 있을 수도 없고, 태식이랑 꼬마 애가 걱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너 때문에 간신히 세운 원칙이 깨졌어.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모를 거야.”

아는 애가 신 타령을 저렇게 하루 종일 하고 있을 리가 있나.

그래. 신. 그놈의 신.

저 녀석에겐 우도할계(牛刀割鷄)를 넘어 낭비 중의 낭비였지만, 원한다면 보여 주마.

네가 바라는 경지가 대체 뭔지.

검을 상단세로 든 백한영의 의식이 심상 세계로 들어갔다.

수많은 검이 꽂혀 있는 밤하늘이 담긴 호수. 그곳을 거닐던 백한영의 시점이 변했다. 위에서 아래로. 조감하듯 심상을 내려다보던 시점이 점점 위로 상승했다.

한 사람이 품을 수 있는 심상은 하나가 끝이다. 그래서 서울 브레이크가 터졌던 그날, 만년제국의 황제는 백한영을 보고 패닉에 빠졌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여러 개의 심상을 몸에 품은 백한영이 그동안 쌓여 온 상식에 어긋난 존재인 탓이었다.

어떻게 백한영은 한 사람이 품을 수 있는 심상은 하나가 끝이라는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사실 백한영도 저 법칙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다. 백한영이 내면에 품고 있는 심상도 엄밀히 따지면 하나였다.

조금 특이한 심상이라 그렇지.

끝을 모르고 위로 올라가던 시야가 이윽고 대기권을 넘어 성층권을 돌파했다.

우주에 도달한 시야에 방금 전까지 백한영의 내면 세계를 담고 있던 행성이 보였다.

끝업이 펼쳐진 호수와 거기에 꽂혀있던 수많은 검들을 안에 품은 행성의 모습을 확인한 백한영이 손을 뻗었다.

마치, 한 자루의 검을 닮아 있는 행성에 말이다.

눈을 뜬 백한영이 니콜라이를 확인했다.

어느새 능력을 중첩시킨 니콜라이가 백한영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개한테 보석을 보여 줘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저 녀석에게 이걸 보여 줘 봤자 아무 의미가 없나.

뭐, 못 알아봐도 얻어맞으면 생각이 바뀌겠지.

백한영이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가볍게.

직후.

마신조차 두려워했던 거대한 힘이, 설원에 강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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