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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이 귀환했다-57화 (57/117)

58화 초인의 시대 (6)

특수 대책반 본부는 김태식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마치 대학교 신입생 자취방 같다고 해야 되나. 무슨 말이냐면, 더러웠다는 얘기다.

“요즘 워낙 바빠서 그래요.”

이세영이 다급히 변명을 쏟아 냈다. 낡은 길드 사무실을 외부인에게 보여 줬을 때의 자신과 비슷해 보였기에 김태식은 굳이 방 상태를 언급하는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소냐의 처우에 대해 묻는 거기도 했고, 소냐와 엮인 놈들에 대해 묻는 거기도 했다. 사실 전자보다 후자에 무게가 더 실려 있었다. 결국 놈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소냐의 안정을 보장할 수 없었으니까.

“일단 반장님이 윗선에 보고를 올리러 갔어요. 조만간 국제적으로 공조 요청이 있을 거예요.”

“구체적으로 얼마나.”

“아무리 짧아도 한 달은 걸리겠죠. 그것도 굉장히 빠른 거예요.”

“한 달.”

한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심력을 쏟기에는 긴 시간이었다.

달그락.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 이세영과 김태식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소냐야, 그건 먹으면 안 돼!’”

목이 말랐는지 책상에 있는 캔 맥주를 만지작거리는 소냐를 이세영이 급하게 말렸다. 캔 맥주를 냉장고에 집어넣고 음료수를 꺼내 주는 이세영을 보며 김태식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이런 곳에 오래 앉으면 허리 안 좋아지는데. 저 사람들도 각성자니 상관없나.

김태식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조용히 정리했다.

누군가를 지키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기일에 누군가를 납치하려는 범죄 조직을 저지하다니. 기분이 묘해졌다.

처음엔 어린애를 납치하려는 놈들을 막아서기 위해 나선 것뿐이었지만, 이젠 그런 정도를 넘어섰다. 사건의 범위는 세계 단위가 되었고, 인체 실험이라는 심연까지 등장했다. 더는 충동적인 마음으로 나설 수준이 아니었다.

김태식은 냉정히 사태를 분석했다. 내가 처음 본 여자애를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우선 그걸 짚어 보고 넘어가야 했다.

그건 겁이 나서도, 지금 도망가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나중에, 혹여나 일이 잘못됐을 때,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기 위해선 반드시 생각해 봐야 되는 일이었다.

일단 지금 심정으로는 원망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 굳이 나서야 하는가? 처음 본 소녀를 위해서 아무런 의무가 없음에도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가?

그에 대한 답변은 간단했다. 김태식은 소냐를 바라봤다.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는 소냐의 얼굴은 그 나이대의 소녀답지 않게 음영이 드리워 있었다.

안타까운 어린애를 위해 나서지 못하면 무엇을 위한 힘이라는 거야.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김태식이 여태까지 해 온 훈련은 아무 의미가 없는 헛짓이 되고 말았다.

김태식이 눈을 감고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세영과 소냐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주로 소냐가 질문하고 이세영이 답변을 해주는 식이었다.

러시아어라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소냐의 말투에 걱정이 묻어나 있는 게 현재 상황을 물어보는 듯했다.

김태식이 머리를 뒤로 젖혔다. 눈가를 매만지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잠깐 눈을 붙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디 잘 곳 없나.

――?!

그때였다. 소냐와 이세영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소냐를 달래 주고 있는 이세영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상황을 설명해 주니까 소냐가 놀란 모양이에요.”

“상황이요?”

“그니까―.”

이세영이 소냐에게 말해 준 건 별것 없었다. 지금 우리가 무슨 대처를 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지를 말해 줬다.

그리고 그중 소냐가 소리를 지른 건 이세영이 태스크 포스를 꾸리는 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얘기했을 때였다.

김태식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 달이면 곤란한 걸까요?”

“자꾸 한 달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아요.”

김태식은 소파로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앉아 있는 소냐가 마음에 걸렸다.

“한 달 후에 태스크 포스가 꾸려지면 곤란한 이유가 뭐래요?”

“그건 아직 안 물어봤는데, 잠깐만요.”

이세영은 소냐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을 걸었다. 러시아어로 짧은 대화가 오가고, 이세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래요?”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안감을 안고 김태식이 그렇게 묻자, 이세영이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냐의 오빠가 아직 연구소에 남아 있대요.”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김태식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늘 그렇듯, 불안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 * *

“안 됩니다.”

보고를 마치고 돌아온 이현진은 이세영과 김태식의 말을 듣자마자 단호히 말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늦춰질수록 소냐의 오빠가 무사할 확률이…….”

“제가 그걸 모를 것 같습니까.”

김태식의 말을 이현진이 끊었다. 그의 표정엔 짙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김태식 씨도 알겠지만 이건 장난이 아닙니다.”

“그렇겠죠. 누가 이걸 장난이라고 생각하겠어요.”

“국제적인 공조가 필요한 사항입니다. 대충 드러난 윤곽만 해도 급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에요. 소규모 팀을 짜서 놈들에게 붙잡혀 있는 사람들만 빠르게 구출해 온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모든 일이 어그러질 수도 있습니다.”

이현진의 말은 굉장히 옳았다. 아무리 김태식이 오지랖이 넓다고 해도 현실을 모르진 않았다.

혹시나 해서 소냐의 오빠를 빠르게 구해 올 방법이 없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았다.

근데 그렇다면 소냐의 오빠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지? 이대로 놔둬야 된다는 건가?

놈들은 절대 온건하지 않았다. 인체 실험을 망설임 없이 하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그런 녀석들이 탈출을 시도한 소냐의 오빠를 가만히 놔둘까?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최대한 빨리 구출하는 게 중요했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소규모로 해결할 사이즈가 절대 아니었다.

김태식은 다시금 백한영을 떠올렸다. 형이라면 태스크 포스가 꾸려지는 걸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단신으로 놈들을 상대할 힘이 있었으니까.

결국 또 형인가. 김태식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깔끔하게 형의 거절을 받아들인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사실은 형의 도움이 없어도 소냐를 도와주는 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을 내렸던 것뿐이었다.

암초를 만나자마자 형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할 생각부터 나는 걸 보니 분명했다.

김태식은 스마트폰을 꺼내 백한영에게 연락하고 싶은 욕구를 참아 냈다.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이게 뭐라고 자존심을 부린단 말인가. 애초에 다시 도움을 요청하는 것 정도로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다만 김태식은 알았다. 그때의 백한영은 한없이 진심이었고, 그 의지가 말 몇 마디로 바뀔 정도로 약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바에는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게 현명했다.

‘놈들에게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전부 구하지 말고 소냐의 오빠만 구해 오면…….’

아니. 이것도 결국 자칫 잘못했다가는 모든 일이 어그러질 수 있는 건 똑같았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김태식은 의자에 앉은 채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김태식 씨.”

김태식이 고개를 들었다. 이현진이 커피를 홀짝이며 입을 열었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시죠. 소냐는 저희가 맡아서 돌보고 있겠습니다.”

“아뇨. 당분간은 소냐 옆에 있으려고요. 그게 더 안전하잖아요.”

“그러면 저희야 좋지만, 괜찮으시겠어요?”

“한 달 정도야 할 만하죠. 잘 곳은 있나요?”

“수면실은 저희 같은 사람들의 필수 시설이죠.”

이현진의 말에 김태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집에 들러서 필요한 물건만 가지고 바로 올게요.”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김태식의 시야에 이세영과 그녀에게 꼭 붙어 있는 소냐가 들어왔다.

아까와는 다르게 차분해졌지만, 대신 얼굴의 음영이 짙어졌다. 감정을 안으로 눌러 담았다는 뜻이다.

특수 대책반 본부를 벗어나며 김태식은 생각했다.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 * *

소냐 페도로프는 낯선 언니, 이세영의 말을 방 안에서 계속 곱씹었다.

구출할 사람들을 모으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한 달이라고 했다. 한 달이면 해가 30번 뜨고 지는 시간이었다.

소냐는 덜컥 겁이 났다. 그동안 오빠가 무사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연구실 안에서 겪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연구소에서 탈출을 시도한 게 소냐가 처음은 아니었다. 크고 작은 시도가 있었고, 대부분이 시도 단계에서 막히긴 했지만 실행까지 간 사례도 종종 있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소냐도 몰랐다. 격리 시설에 갇혔다, 특수 실험에 사용됐다, 처형됐다 등. 수많은 얘기가 돌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 뒤로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을 아무도 보지 못했고, 놈들이 탈출자에게 아량을 베풀 정도로 선하지 않다는 것.

소냐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오빠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먼저 도망쳐. 금방 따라갈게.

소냐도 알았다. 이대로 도망가도 오빠가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소냐는 도망쳤다. 끔찍한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오빠를 버린 거다.

오빠를 구하러 가기까지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남았다는 걸 깨닫자 소냐의 몸이 벌벌 떨렸다.

오빠가 언제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한 달 동안 버티는 게 가능할까.

무리였다. 놈들이 오빠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내가 오빠를 버려서. 그래서 오빠가 죽는다.

숨이 막혔다. 스스로 저지른 죄악이 어느새 목을 조르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한 달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이세영이라는 언니와 김태식이라는 오빠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하던 게 기억이 났다.

이세영과 김태식이 이현진이라는, 담배 냄새 때문에 꺼려지던 남자와 대화를 나눈 것까지 전부 떠올린 소냐는 입술을 깨물었다.

외국어는 잘 몰라서 알아듣지 못했지만, 좋은 쪽으로 얘기가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표정과 말투를 관찰한 바로는 그랬다.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데 성공했을 때만 해도 모든 게 잘 풀릴 줄 알았다. 이제 됐다.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겠구나.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쩌면 오빠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을 또 잃는 건 싫었다.

하나님, 부탁이에요.

제발, 제 가족을 또 뺏어 가지 말아 주세요.

소냐가 간절히 기도했다. 그것 외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소냐가 손을 모으고 간절한 바람을 속으로 되뇌었을 때.

소냐의 감정에 반응해, 그녀의 마나가 거세게 분출됐다.

우웅―!

소냐의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공간 저편으로 하얀색 타일로 이루어진 건물 내부가 보였다.

익숙한 풍경에 소냐가 몸을 굳혔다. 그토록 빠져나오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던 연구실 내부였다.

공간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갔다. 각성 능력의 지속 시간이 끝나 가는 것이다.

아직 소냐는 능력을 어떻게 발휘해야 되는지 감도 못 잡은 상태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연구소와 공간을 연결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소냐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래.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면, 직접 해야 되는 게 맞아.

소냐의 몸이 일그러진 공간을 넘어 연구소 내부로 진입했다.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 빤히 쳐다보던 소냐가 이내 몸을 돌렸다.

계획은 간단했다.

이대로 몰래 오빠를 찾고, 다시 외부와 공간을 연결하면 구출 성공이었다.

각성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자신은 없었지만, 해야만 했다. 그게 아니면 오빠를 구출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진 소냐가 방 밖으로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대체 이게 뭐니, 소냐야.”

소냐의 등 뒤에서 낯선 언어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소냐가 몸을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거기엔, 김태식이 있었다.

소냐를 따라 일그러진 공간에 진입한 김태식은 닫혀 버린 통로를 흘긋 바라본 후 주위를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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