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위위경께서도 좀 답답하시겠네요.”
동지추밀원사 염신약이 말하였다.
“놀리십니까.”
“놀리긴요. 우복야의 말씀 따라서 금나라와 고려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려는 금황제의 성의라고도 볼 수 있지요.”
“흠…….”
현수는 서첩들을 다시 확인하고는 네 개의 서첩을 예부상서 유응규에게 건네었다.
“하아~! 어찌 되었든 금나라에서 서첩을 다 받았으니. 이만들 일들 보세요.”
현수의 말 한마디에 신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현수 역시 잠시 앉아서 생각에 잠기었다.
* * *
그날 저녁.
“저, 위위경.”
“무슨 일이냐.”
“문 앞에 웬 마차들이…….”
“뭐?”
마차 안에서 듣던 현수는 무슨 일인가 하고 마차 안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 앞에는 십여 대의 마차들이 줄을 이루었고 사람들은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수많은 마차들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멀찍이 서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대체, 이 마차들은 뭐야?”
현수가 몇 걸음 옮겼다.
그러자 십여 명 되는 이들이 문 앞에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다.
“어?”
현수는 멀리서 보이지만 그들이 누군지 바로 눈치챘다.
금나라 사람들이었다.
현수는 천천히 금나라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대체 여기서 뭣들 하는 건가?”
현수의 목소리를 들은 금나라 사람들은 현수를 바라보자마자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때 금나라 사람 중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숙였다.
“성국 공주를 호위하는 아한태라 합니다. 위위경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벌어진 어깨에 빼어난 외모를 가진 젊은 무사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내 집에는 어찌한 일인가?”
“성국 공주께서 와계십니다.”
“뭐!?”
현수는 깜짝 놀랐다.
“아, 아니… 무슨.”
갑작스러운 방문 아니 보낸 것인지 직접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수는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일하는 노비들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였고, 현수는 안채로 곧장 향하였다.
끼익.
현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아야. 복아.”
현수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두 아이가 환하게 웃으면서 뛰어와서는 현수에게 안기었다.
“아버지!”
“아버지…….”
“오냐… 그래. 하하하하!”
두 아이만 보면 미소가 절로 나오는 현수였다.
“아버지.”
“응?”
“있잖아요. 우리 집에 되게 이쁜 언니 와있어요.”
“언니? 아…….”
“이뻐요…….”
복이도 같은 말을 했다.
“어머니는? 뭐라고 하시니?”
“아무 말 없으세요.”
“아, 아버지.”
“응? 아가… 왜?”
“그 언니… 앞이. 안 보여요. 안 보이나 봐요.”
수아는 멀뚱히 현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래?”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덜컹.
갑자기 방문이 열리자 현수는 화들짝 놀라며 앞을 바라보았다.
안에서 한 명씩 부인들이 나와서는 나란히 서서 현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현수는 세 명의 부인을 바라보는데 무슨 염라대왕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도저히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현수는 그저 두 아이의 어깨를 꽈악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아파요…….”
“아파요.”
“어? 어… 미안하다.”
현수는 두 아이의 어깨에서 손을 뗐고 그저 가만히 다시 세 부인을 바라보았다.
“들어 오시지요.”
차가운 말투의 연희궁주 왕 씨의 말이 들려왔다.
저벅저벅저벅.
몇 걸음 앞으로 나가며 현수는 뒤를 한번 돌아보니 두 아이를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이 현 상황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저 현수가 다시 앞을 보며 계단을 올라가서는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며 곧장 안으로 들어가자 세 부인도 덩달아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들어오자마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짜 한 여자, 아니 금나라 공주 성국 공주가 안에서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있는 시녀가 현수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공주님, 위위경께서 오셨습니다.”
시녀가 말을 하자 천천히 일어나는 성국 공주 그리고 그녀를 부축하는 시녀였다.
현수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 걸 보니 진짜 맹인인 듯 보였다.
“저 앞에 계십니다.”
성국 공주는 시녀의 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쾅!
세게 닫히는 문소리에 현수는 몸을 돌아섰다.
“말씀해보시지요.”
“뭘요?”
“저 공주님.”
“아, 아니…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고…….”
“아니고?”
“음, 뭐죠?”
무표정한 얼굴로 째려보는 부인들에 현수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했다.
“태원수가 찾아와서 덥석 맡겨 버리지 않았습니까.”
“거절하셨어야지요.”
“당연히 거절하였지요. 제가 거절 안 할 사람입니까?”
세 부인을 보며 눈을 똑바로 뜨고 말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수안궁주 왕 씨가 물었다.
“돌려보내야지요.”
“안 간대요.”
“어!?”
현수는 깜짝 놀랐다.
“혼인 안 하고 그냥 여기서 살겠답니다.”
“…….”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거 참, 사람 곤란하게 하네… 씨.”
현수는 뒤를 확 돌아보았다.
성국 공주는 지금 현수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앞이 안 보이니 표정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녀는 현수의 표정을 보더니 곧장 고개를 숙이었다.
“어찌 화를 내십니까.”
화를 낸다는 말에 현수는 다시 부인들을 바라보았다.
“사람 죽일 놈 만들어 놓는 사람이 누군데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누구야! 내가 원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잖아!”
현수가 소리를 치며 화를 내었다.
안 그래도 지금 머리가 복잡한데 집에까지 와서 죽일 놈 취급하는 세 사람 때문에 짜증이 난 것이다.
“저 공주는 부인들이 알아서 하시오! 나는! 신경 안 쓸 테니까!”
현수는 그렇게 말을 하며 부인들 사이를 지나서는 밖으로 나갔다,
콰앙!
거칠게 문을 닫고 나와 버리자 곧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아~! 씨X”
덜컹!
방문이 다시 열리며 누군가 곧장 현수의 손을 잡았다.
“뭐요?”
현수가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아주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 씨가 있었다.
“소, 송구합니다. 그, 그냥 자, 장난하려고 하였을 뿐입니다.”
“부인, 나잇값 하시구려.”
장난이라는 말에 현수는 눈을 감고서는 손을 뿌리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동경 일도 그렇고 거란족 일 거기에 지금 공주의 일까지 머리가 아픈데 장난을 치려고 하였다는 말에 짜증이 밀려온 것이다.
현수는 신을 다시 신고서는 사랑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랑으로 들어와서는 자리에 앉아서 수납장을 열고서는 술병을 꺼내어 자리에 앉아 병째로 그냥 들이켰다.
“하아~!”
시원하게 마신 현수는 술병을 내려놓았다.
똑똑.
“뭐야.”
“아버지…….”
수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아가. 들어오거라.”
덜컹.
방문이 열리며 조심조심 수아와 복이가 안으로 들어와 먼발치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놓고 있었다.
“하하하, 아가. 어찌 그러느냐?”
“화, 많이 나셨어요?”
“응? 아, 아니야… 아니야. 이리와.”
현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고 수아와 복이는 천천히 현수에게로 다가갔다.
현수는 두 아이를 들어 올리며 무릎에 앉혔다.
“아비가 화난 거 같아?”
“네, 동생들이 울어서요.”
“하하하하!”
현수는 아이들 말에 그저 웃음만이 나왔다.
“화 안 났어. 그냥… 조금…….”
“위위경, 천시호 장군께서 오셨습니다.”
밖에서 천시호가 왔다는 말에 현수는 두 아이를 무릎에서 내려오게 하였다.
“들어오게! 아가, 이야기 좀 해야 하니 그만 물러가거라.”
“네…….”
수아는 복이의 손을 꼬옥 잡으며 곧장 사랑 밖으로 나가고 천시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게. 자 이리 앉게.”
천시호는 고개를 숙이며 곧장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래, 어찌 되었는가? 남경유수의 답은?”
“언제든지 출전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 하였습니다.”
“고생하였네.”
“위위경, 사병 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음, 별문제 없이 속속히 육위 훈련장으로 들어오고 있네.”
“다행입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며칠 푹 쉬고 훈련장으로 나가서 훈련을 맡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별다른 소식은 없나?”
“아직까지는 조용합니다. 개경은 어떠합니까?”
“뭐, 주위에서 계속 살피고는 있는데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여. 아무래도 사병들을 군사화시켜서 육위를 대체하고 있으니. 조용한 걸 수도 있지.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도 있으니. 자네가 한번 조용히 알아봐.”
“그리하겠사옵니다. 위위경.”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경으로 떠난 이들 이외에도 이의민이 추천하였던 관리들을 집중적으로 관리에 들어갔다.
관리들이 모르게 말이다.
그리고 사병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소문은 금방 돌았을 것이니 저들이 어떻게 움직이냐는 것에 달렸다.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게 더 불안하였다.
개경부터 사병을 군사로 돌린 후에 개경 주변에 있는 지역까지 모두 불러들였고. 병부와 이 군에서 군사들을 일정으로 각 도로 보내어 가지고 있는 사병들을 모집하게 하였다.
이걸로 귀족들이나 관리 중에 불만은 있지만 대놓고 항명하는 자들은 없었다.
“위위경, 지금 사병들의 훈련은 어느 정도 되어 가고 있사옵니까?”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어. 이 사병들로 하여금 육위의 삼군인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에 둘까 하네.”
“허면, 삼군의 수장은 위위경께서 맡으려 하십니까?”
“그래야지, 내가 육위 대장군 아닌가. 그나저나, 천 장군.”
“예, 위위경.”
“자네 나랑 십여 년이 넘게 있었지?”
“하하하하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요.”
“참, 시간이 빨리 가…….”
“예, 정말 빠르옵니다.”
천시호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오면서, 위위경께서 새 혼사를 치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감축은 무슨 놈의 감축이야. 그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해야 할 일은 많고 거기에 지금 집안도 안사람들이 다 하고 있고 나는 집안에 조금도 신경을 쓸 수가 없어. 애들 얼굴도 자주 보지도 못하고 있으니.”
“그래도, 여복이 아니 옵니까.”
“여복 같은 소리 하네, 여복이 아니라 여난 이야. 여난. 세상에 혼사를 치룬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혼사를 치러.”
“그래도. 금나라에서 보이는 정성이라 생각하시옵소서.”
“하! 정성이라? 정성이라니… 일국의 공주를 고작 신하에게 보낸단 말인가.”
“그래도, 좋게 생각하시는 게 좋사옵니다.”
현수는 천시호의 말에 두 눈을 살며시 감다가 다시 눈을 떴다.
“천 장군.”
“예, 위위경.”
“그동안 사병들을 군사화시키면서 생각한 건데 말이야.”
“말씀하십시오.”
“사병 폐지, 어떻게 생각해.”
“예?”
천시호는 깜짝 놀랐다.
사병 폐지라는 그것은 개인의 군사화를 막아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사병은 오랫동안 존속해온 제도다.
그걸 폐지 시킨다는 건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가 있었다.
“왜? 사병 폐지 자네는 반대인가?”
“아, 아니옵니다. 위위경. 하지만 사병을 폐지한다고 하면 귀족들과 신료들이 가만히 있겠사옵니까? 사병을 폐지한다는 건. 개인의 노비로 사병을 만드는 자가 수두룩한데 그 말씀은…….”
“노예제도 폐지가 말도 되는 거지.”
“아니 됩니다. 노비제도 폐지는 더 하면 아니 됩니다.”
천시호는 화들짝 놀라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