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네 입맛에 맞겠느냐?”
“맛있을 거 같사옵니다. 아버지.”
“하하하!
“한 그릇은 복이랑 나눠 먹거라. 양이 많으니까 말이다. 혼자서는 다 먹지 못해.”
“예. 알겠사옵니다.”
현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현수가 주문한 국밥 두 그릇과 탁주 한 병이 놓였다.
“이건 안 시켰는데.”
“아이고, 자녀분과 오셨는데 이거라도 만들어 올려야지요.”
“고맙네. 주모.”
주모가 가지고 온 건 잘 구워서 가지고 온 갈빗살이었다.
현수는 먼저 접시 그릇에 국밥을 떠 양복 앞에다가 놓아주었다.
“먹거라.”
현수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수저를 들고 한술 뜨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한입을 떠먹는 수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듯하다가 이내 몇 번 씹고는 꿀꺽 삼키었다.
“어떠냐?”
“아버지…….”
“왜? 맛이 이상해?”
“아뇨! 굉장히 맛있어요.”
수아의 말에 양복이도 한 번 살펴보았다.
양복은 군말 없이 맛있게 국밥을 떠먹고 있었다.
“맛이 있다니 다행이구나. 많이들 먹거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사발 그릇에 탁주를 따라 벌컥벌컥 마시었다.
“저도 주시면 안 돼요?”
“…응?”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수아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사발 그릇에 다시 탁주를 조금만 따라서 수아에게 건네주었다.
수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쭉 들이켰다.
“와, 맛있다… 한잔 더 주세요!”
“어? 어… 그래.”
현수는 한잔 더 달라는 말에 탁주를 사발 그릇에 조금 더 부어 주었고, 수아는 그대로 들이켰다.
“크으!”
벌써 술맛을 알아버린 수아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아버지…….”
“이제 안돼.”
현수는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수아를 보다가 술잔을 다시 가져와서는 술을 따라 마시었다.
* * *
그날 저녁.
경대승의 저택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에 경대승은 심기가 매우 불편한 모습이었다.
“내 듣지 않겠다고 하지 않는가!”
허승, 김광립이 찾아와 경대승에게 반역의 뜻을 밝힌 탓이었다.
“지금 자네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아나? 그건 미친 짓이야! 그 말을 입에 담았다는 것만 걸려도 개죽음이란 말일세!”
“황제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는데 지켜보기만 할 작정입니까! 상장군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황제가 곧 국가라고 말씀하셨지요. 지금의 황제로서 이 나라를 이끌어 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으니, 태자 전하께서 황위에 올라 나라를 다시 통치하게 도와드려야 하는 게 저희 생각입니다.”
“…….”
“저희의 대의(代議)에 상장군께서는 합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허승의 말에 경대승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현수의 마음을 알 거 같았다.
과거의 한 고집하던 경대승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현수의 심정을 이제야 느껴 보는 경대승이였다.
“이 사람들아, 현실을 직시해야지. 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
“나도 한때 자네들과 같은 생각한 적이 있었지. 이의방이 집권한 이후로, 서경 백성들에게서 매일같이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더군. 내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걱정 없이 살아가는 걸 본 후에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
“…….”
“저 백성들이 웃음을 잃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내가 움직여야 할까 고민도 많이 했네. 그리고 깨달았지. 서경 유수로서 내 할 일을 다 하면 되었네. 위로는 황실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살피는 게 무엇인지 서경에서 배웠다는 말일세.”
“상장군, 상장군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만… 지금의 황제께서는 변한 게 하나도 없으시옵니다. 오히려 매일 같이 연회를 열며 국고를 낭비하고 있사옵니다. 이런 황제를 어떻게 위로 받든다는 말이옵니까.”
기자격의 말에 경대승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네까지 왜 이래! 말귀를 왜 이리 못 알아듣는가! 지금 자네들이 말하는 걸 실행하면 개경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모두 추포(追捕)될 것이네. 우리만 처형되는 게 아니라, 구족(九族)이 멸해진다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인가!”
허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장군의 뜻을 잘 알았으니, 저희는 물러가겠습니다. 이만 가세.”
허승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자, 함께 들어섰던 이들 모두가 허승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하아…….”
경대승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 * *
보름 후.
예정된 대로 김존심, 서언은 경상도로 내려보냈다.
홍중방, 오광척은 전라도로 내려보냈으며, 경대승이 이의방에게 청하여 김자격, 김광립, 허승을 함경도로 보내 달라고 하였다.
이의방은 경대승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이들 모두를 함경도로 보내었으며 안북도호부겸 서북면병마사 조원정과 함흥에 설치한 안변도호부사로 가 있는 이거에게 서찰을 보내어 철책과 성, 군영에 대해 자세히 내용을 적어 살피고 보고하라고 명을 내렸다.
거기에 준비를 마친 공부시랑이 일행들을 이끌고 목화재배를 하기 위해 전주목으로 떠났다.
이의방과 현수는 예정대로 강화도로 출발하여 해군의 훈련상태를 파악하였다.
상륙 훈련부터 시작해서 해상에서 어떻게 싸우고 집결하는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모든 걸 목도(目睹)한 이의방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자네 같은 장수와 군사들이 있으니, 다행이네. 참으로 고려의 큰 복이야.”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이건 모두 합하의 큰 복이시옵니다.”
“하하하하!”
이경수의 말에 만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해군 쪽에 지원하는 자가 많나?”
“예. 많습니다. 무과가 시작되면 이곳에서 시험을 치러 임관(任官)할 이들을 뽑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해안가나 섬에서 살던 이들이라, 바다에 관해서는 빠삭하게 아는 자들이옵니다.”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족한 면은 이곳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곳에 해군에 입대 하기 위해 온 이들은 대부분 지방 토호(土豪) 세력이면서도, 상업에 열중하여 재산이 어마어마한 이들의 자제들이었다.
해군에서 무과를 따로 치른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자, 관직을 얻기 위해 너도나도 할 거 없이 바다, 물살, 해풍에 빠삭한 토호의 자제들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 스스로 올라와 임관한 것이었다.
“부족한 면이라니?”
“뭐, 대체로 무과에서 하는 시험들이지요.”
“아하하하! 그래… 음…….”
이의방이 잠시 생각에 빠지다가 현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위위경.”
“예. 합하.”
“삼경 팔목에 훈련소를 하나 세우는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훈련소요?”
“그래. 삼경 팔목에 무과를 치를 이들을 향교처럼 불러들여 가르치게 한 다음, 우수한 성적인 이들을 개경으로 올려보내게 해서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이지. 네 생각은 어떠하냐?”
“좋은 생각이시옵니다. 합하.”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이의방을 옹호하였다.
“그래. 그럼 육군, 해군 다 키워보는 훈련소 한번 만들어보자. 해군은 자네가 맡아서 해.”
“…예? 아, 예! 합하!”
이경수가 고개를 숙이며 답하고는 곧장 말을 이었다.
“합하, 이번에 낙후가 된 노후선(老後船)을 모두 처리하고, 새로 전선(戰船)을 건조(建造)해야 할 듯합니다.”
“그래? 배가 얼마나 되는가?”
“강화에 있는 전선만 백 척이고, 낙후된 노후선 들은 스물 세척 되옵니다. 더불어 애매한 상태의 배들도 있어서…….”
“애매하다니? 애매하면 안 되지. 그냥 이참에 싹 다 바꿔버려.”
“아, 예! 합하!”
이의방이 미소를 지었다.
“아, 남해안에 있는 전선도 바꿔야 할까? 내 남해안은 가보지를 못하였으니, 알 길이 없어서 말이야.”
“송구하옵니다. 서해 일대는 모두 제가 관리를 하고 있지만, 남해안 일대는 소장도 모르는 일이온지라…….”
“아, 그렇구만.”
이경수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수에게 제안하였다.
“그럼 이참에 자네가 고려의 전 해군을 맡아 보는 건 어떻겠나.”
“…예?!”
이경수가 깜짝 놀랐다.
“왜? 자네라면 그럴 능력이 되는 거 같은데. 여기가 어떻게 보면 고려의 개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볼 수 있잖나. 그러니 여기 자체를 해군 본영으로 사용하고,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인 남해안도 자네가 직접 관리를 하면 되잖나. 아니지… 삼면이 바다인 이 고려에서 남해안만 관장할 수는 없겠지. 자네가 동해안까지 지휘하게.”
“아, 합하…….”
“내가 그만한 직위를 만들어 줄 테니, 그렇게 해.”
“예… 하옵고, 합하.”
“응?”
“군선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사옵니다. 노후된 군선들을 대체할 수 있을 만한 군선이옵니다.”
“오, 그래?”
이의방은 흥미롭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현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현수야, 너 혹시 여기다가 성 지어볼 생각 없냐?”
“성이요?”
“어차피 정주에서 강화 일대까지 모두 다 네 땅 아니냐.”
“예. 그렇죠. 근데 성을 짓는다는 게,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것이 아니옵니다.”
“왜? 네가 가진 재산을 쓰라고 할까 봐 못 짓겠다는 것이냐?”
이의방이 장난스레 정색하며 말하자, 현수는 시선을 피하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 재산은 이미…….”
“맞다, 내가 잊고 있었구나. 하하하!”
이의방이 크게 웃었다.
“하지만 이 강화에 성을 쌓는 것도 생각은 해봐야지 않겠느냐?”
이의방의 말을 골똘히 생각하는 현수였다.
이의방의 말처럼 이곳을 해군 본영으로 삼으려면 그만한 성을 갖추어야 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성으로는 규모가 매우 작았고, 변란(變亂)이 있을 때 강화 백성들을 수용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많은 군사 역시나 수용하는데 부족하여 밖에 군영을 임시적으로 설치해야만 했다.
“절도사, 지금 서해안에 있는 해군만 3만 8천이라고 하셨지요?”
“예. 그렇습니다. 위위경께서 보시다시피 규모가 워낙 커서 임시로 군영을 설치해서 수용 중이기는 하나… 이 성으로는 대규모 군사들을 수용할 수가 없사옵니다.”
이경수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하, 성을 쌓는 건 자세하게 의논을 해보아야 할 듯하옵니다. 여기서 의논할 문제가 아닌 듯하옵니다.”
“어째서 말이냐. 이럴 때 확 그러자고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합하, 성을 지으려면 다른 문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응?”
“지도를 보면서 이야기하시지요. 성만 쌓아서 될 문제가 아니옵니다.”
이의방이 현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다. 이 장군, 관아로 들어가세.”
“예. 합하!”
이의방이 몸을 돌려 관아로 발길을 옮기자, 이경수와 현수가 이의방의 뒤를 따랐다.
관아에 들어선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그래… 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번 해보아라.”
현수가 강화 지도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일단 강화 전체에 나성(羅城)을 쌓아야겠지요.”
“나성을 쌓아? 지금 제정신이냐! 이만한 크기의 섬에 나성을 쌓는다니… 지금 아무리 나라에 재정이 많다고 하지만, 나성을 쌓는 건 무리가 있어. 이 절도사 말한 대로 해군의 군선을 다시 만드는데 비용이 막대하게 들 것이다. 군선 하나 만드는데 한두 푼 들어가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성하나 쌓는다고 세금을 더 거두어들일 수도 없고.”
“합하, 뭐가 문제이시옵니까.”
현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사찰(寺刹)에 조세(租稅)를 더 내게 하면 그만이옵니다.”
현수의 말에 이의방의 입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