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현수가 태의감에 눕혀졌다.
의원들이 급하게 현수의 관복을 벗기고는 안에 있던 피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몇몇은 지혈초를 자상 부위에 으깨 발라 피를 멎도록 하고 있었다.
수많은 태의들이 자신들이 아는 모든 걸 동원해서 치료하고 있었다.
“정 장군, 밖에 군사들이…….”
“알아. 그냥 모른 척하세.”
천시호의 말에 정균은 작게 대답하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면서 갑주를 입은 남송의 장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떠하십니까?”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직 모르오. 그리고 고려에서는 이번 일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아시오.”
악정은 남송말로 남송의 장수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남송의 장수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사신 분들을 모시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뭐요!?”
악정이 격하게 반응하자, 정균은 악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러는가?”
“황제가 우리를 연금(軟禁)한다는군요.”
악정의 말에 정균은 피식 웃었다.
“다른 고려 사신들을 모두 객관으로 모셨습니다. 두 분도 따라 주시지요.”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객관으로 사신들을 데려다 놓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우리 역시 따라 달라고 합니다.”
“악 장군.”
“예. 정 장군.”
“여기에서 위위경을 보필해야 할 사람은 한 사람 정도 필요할 듯하니, 내가 객관으로 가겠네. 자네가 여기에 남겠다고 이야기하게.”
악정이 남송의 장수를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남송의 장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군사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기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해서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정균이 고개를 끄덕이며 남송의 장수와 함께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남송의 장수가 물었다.
“한 분 더 계신 것 같았는데… 어디 가신 겁니까?”
눈썰미 하나는 좋아 보였다.
자리에 없는 천시호를 눈치채고 거론하였으니 말이다.
악정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정균에게 물었다.
“천 장군이 안 보인다고 하는데요.”
“객관 갔다 하게.”
정균의 말대로 능청스럽게 천시호가 이미 객관으로 갔다고 말하자, 남송의 장수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송의 장수는 정균을 대동한 채로 태의감 밖으로 나갔고, 악정은 군말 없이 현수의 상태에 집중하였다.
태의들은 천천히 상흔에 찧어 붙인 약초들을 거둬내고는 천으로 깔끔하게 약초들을 닦아 냈다.
그러더니 통 안에 든 무언가를 상흔에 부위에 발랐다.
“그게 뭐요?”
“송진과 밀랍을 섞은 것입니다. 안전한 것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송진과 밀랍을 섞은 약이라는 말에 악정은 아무런 말 없이 태의가 하나하나 손끝을 움직이는 데에 집중하였다.
* * *
황제의 명령에 따라, 강제로 객관에 모인 고려의 사신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잘못했다가는 고려로 돌아가기는커녕 여기서 죽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객관을 둘러싼 채, 삼엄하게 남송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끼이익.
객관 대문이 열리며 정균이 안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고려의 신료들은 안도하기 시작했다.
“왜들 이러고 있는가. 다들 들어가서 쉬고들 있어. 별일 없을 테니.”
정균의 말 한마디에 신료들은 각자 방으로 다들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균이 안으로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한 얼굴로 송나라의 관리가 정균에게 다가왔다.
“어째서 혼자 온 건가. 태의감에 간 사람들은 세 명이 아닌가.”
“한 사람은 태의감에서 태상황제의 검을 맞은 위위경을 살핀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은 객관관으로 미리 보냈네… 왜 그러는가?”
“뭐?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고려 관리 중에 미리 온 사람은 없는데…….”
“…….”
남송의 장수들은 경악하는 얼굴로 정균을 바라보았다.
천시호의 행방을 묻는 듯했다.
하지만 끝까지 정균은 모른 척하다가 자신의 거처로 이동하였다.
“폐하께 가서 어서 보고하게. 나는 임안 전역을 뒤지고 항구까지 가보도록 하겠네! 어서!”
“알겠습니다!”
장수들은 곧장 움직였다.
* * *
그날 저녁.
태상황제의 처소에 태의들이 왔다 갔다 하였다.
황제는 아직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약을 먹이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향을 피웠는데도 황제의 증상은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었다.
“폐하, 정신을 차리셔야 하옵니다…….”
온몸을 떨며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태상황제.
태상황제를 옆에서 간호하는 건 태상황제의 후궁이었다.
“태의, 폐하께서 대체 왜 이러는 거요?”
“마마, 송구하옵니다… 태상황제께서 이러한 증상을 보이시는 이유는 신도 지금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태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처소로 현 황제가 들어왔다.
이에 모두를 물러가게 하자, 많은 이들이 처소 밖으로 모두 물러 나갔다.
황제는 태상황제에게로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폐하, 폐하께서 본 이가 누구인지 알아냈습니다… 악비의 아들입니다. 그날의 마지막 생존자이지요.”
현 황제의 말에 태상황제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이미 태상황제의 정신상태는 온전한 상태였고, 태상황제는 신하들 앞이라 일부러 더 아픈 척을 한 것이었다.
“설마 그날… 다 죽이지 않았다는 건가?”
“폐하, 오래전 일입니다.”
“그래서 악비의 얼굴이 보인 거군… 순간 내가 정신을 놔버렸어… 대체 어떤 놈이 그 핏줄을 남겼단 말인가.”
태상황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황제는 태상황제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다 입을 뗐다.
“그렇게까지 꼭 하셔야 했습니까?”
“뭐가 말이냐?”
“폐하께서는 누가 뭐라 해도 이 나라의 성군이십니다. 하지만 방금의 일은 폐하께서 단단히 실수하셨습니다.”
“…뭐라?”
태상황제는 현 황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폐하는 악비라는 충신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금나라에 빼앗긴 영토도 회복하지 못하셨지요.”
“다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 네가 그때의 내 심정을 아느냐? 나도 악비를 버리기 싫었다. 하지만… 이 나라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악비를 버려야 했어.”
이를 악물며 말하는 태상황제였다.
하지만 태상황제의 말은 현 황제에게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번 일로 인해서 나라의 안위(安危)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악비의 씨가 나라의 큰 위협이 되었구나.”
“지금부터 모든 일은 소자가 알아서 할 것이니, 태상황제께서는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나와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뭐라?”
“폐하, 부디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될 때까지만이라도 가만히 계십시오…….”
태상황제는 현 황제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번 일은 폐하께서 아프셔서 벌어진 일입니다. 갑자기 악비의 아들을 보자, 좋지 않은 기억으로 인해 재발(再發)된 겁니다. 엄연한 사고이지요.”
“알았다. 내 잘못이지… 이번 일로 인해서 저들이 원하는 게 있다면 해주거라.”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절대 금나라와 손을 잡고 남하하게 돼서는 아니 되네.”
태상황제의 말에 금상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밖으로 나갔다.
* * *
삼 주 정도 흘렀다.
현수는 깊게 베이지 않은 몸이라, 빠르게 몸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몸을 추스르기에는 조금 힘에 부치었다.
가슴팍이 뻐근함이 불편하였지만, 남송의 관리들을 만나야 하였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1층 객관에서 남송의 관리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주화파 신료들이었다.
이들은 최대한 말로서 태상황제가 어떠한 상태인지 자세하게 설명하며 현수를 납득시켰다.
이들의 말을 들은 정균과 악정이 중간중간 들고일어나 버럭 하였다.
물론 이것들은 주화파 신료들을 만나기 전, 현수와 장군들끼리 이야기를 맞춘 것이었다.
현수가 이해하려고 하면 할 때마다 중간중간 한 번씩 버럭 해달라고 말이다.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리지만… 태상황제께서 항상 약을 드셔 오셨습니다.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해 계시다 보니,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특히나 생각지도 못한 악비 장군의 아들을 보셨으니… 더욱더 정신적으로 힘이 드셨을 겁니다.”
이미 소문이 난 악정의 신분이었다.
이를 들은 남송의 주전파 신료들이 따로 악정을 찾아와 이야기하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남송의 원수(元帥)가 되어 북벌하자며 말이다.
당연히 악정은 이를 거절하였다.
일가가 죽고 반역의 죄를 씌운 나라에 돌아올 악정이 아니었다.
“당신네 황제가 저지른 일을 그래서 뭐로 보상할 거요!”
악정은 소리를 치며 남송의 주화파 신료들에게 외쳤다.
“우리를 다 죽이고 전쟁이라도 하던지요.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정균은 웃으면서 말하였고 현수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남송 측 역관들은 정균의 말을 통역해 주었고, 그 말을 들은 주화파 신료들은 기겁한 얼굴로 아니라며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말하였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걸 모두 줄 거요?”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주화파 사신들에게 말하였다.
“당연히 드려야지요…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이야기해 보십시오.”
이번 협상에서는 현수 덕에 고려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고려 뜻대로 이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남송의 신료들이 자칫 잘못 말했다가, 남송과 금,려 연합을 상대로 공격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송의 현 금상 황제 역시나 이를 알기에 주화파 신료들에게 전권을 준 것이었다.
“화약과 화포… 그리고 그 설계도를 원합니다.”
주화파는 화약과 화포 설계도를 원한다는 말에 미동이 없었다.
“설계도뿐만 아니라, 기술자 한 명도 포함해 고려국으로 데려가시지요. 다만, 저희도 요구 조건이 있습니다.”
주화파의 우두머리 진우형이 말하자, 역관이 현수에게 말하였다.
“무엇입니까?”
“그 기술자가 다시는 이 남송에 발을 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주화파 신료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었다.
대체 그가 누구이길래 이러는 걸까.
현수가 의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요구 조건이 더 있습니까?”
“화약과 화포 같은 무기를 금나라와 일절 거래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건 그 약조시켜주시겠다는 각서입니다.”
진우형의 말에 현수는 당황스러웠다.
현수가 무얼 요구할지 예상하고, 남송 측에서는 미리 다 준비를 마친 것이었다.
현수는 붓을 들고 쭉 읽어 보더니, 그대로 양 문서에 수결(手決)하였다.
문서를 읽어 본 현수가 진우형이라는 자를 다시 힐끔 바라보았다.
이 자는 보통이 아니었다.
문서에는 금나라는 언제고 화약과 화포를 개발할 것이니, 이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 고려가 지원만 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고려와 모든 해상교역로를 끊어버리겠다는 협박까지 기재되어 있었다.
해상무역로를 끊어버리겠다는 건 남송도 살짝 손해 가지만, 고려의 처지로서는 크게 손해 봐야 하는 것이었다.
“책임을 지실 거라고 믿습니다.”
“당연하지요. 이 정도는 제가 책임질 수 있습니다. 참고로 위에 계신 분도… 북조를 좀 싫어하는 분이시라… 하하하.”
진우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 또한 문서에 수결하고는 현수와 한 장씩 나누어 가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