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천하의 주인-105화 (105/159)

105화

“한잔 마시자고.”

“술을 여기에 두십니까?”

“그냥 한 잔씩 먹고 싶을 때 마시는 술이야. 황성에서 술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아니, 그럼 이 술은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들어올 때 내가 한 병씩 가지고 들어오네. 하하하.”

현수는 웃으며 술잔에 술을 따라 악정에게 건네주었다.

다른 잔에 술잔을 채우고는 악정과 잔을 한잔 부딪히고 한잔 마시었다.

“남송에서 가져온 모태주야. 어때?”

“부드럽고 마시기 좋은데… 제 입에는 국화주가 딱 맞습니다. 그런데 위위경께서는 술을 잘 하지 않으신데 여기에 술을 가져다 놓으신 걸 보니, 힘든 일이 많으신가 봅니다.”

“음… 아니 그건 아니고… 피곤할 때 한 잔씩 먹고 저기 침상에서 자는 거지.”

현수는 술병을 들고 빈 잔에 술을 채웠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안하게 하게.”

“위위경, 남송으로 가시는 거 말입니다. 저 또한 함께 가겠습니다.”

“괜찮겠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내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가려고 하는가?”

“태상황제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요.”

“얼굴… 얼굴이라… 하하하!”

현수는 크게 웃다가 곧장 술잔을 내려놓고 악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남송의 태상황제와 자네가 대면한다면… 태상황제가 자네를 알아볼 확률은 얼마나 되겠나?”

“예? 저를 알아보다니요? 저를 본 적도 없는 태상황제가 저를 어떻게 알아본다는 말씀입니까?”

“음, 자네가 살아있다는 걸 알면 남송 태상황제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까 문뜩 궁금해서 그래.”

“사람 얼굴이 어떻게 똑같습니까.”

“혹시 모르는 거 아닌가. 아무리 씨가 달라도 제 새끼는 알아본다는 말이 있잖나. 하물며 충신을 역모로 몰아넣은 장본인인데. 태상황제의 반응이 궁금하단 말이지.”

“만약 반응을… 보인다면요?”

“태상황제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우리가 원하는 걸 가질 수도… 못 가질 수도 있겠지.”

현수는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들어 들이키었다.

“저를 이용해 보려고 하시는군요?”

악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겠네요. 위위경께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태상황제가 자네를 알아본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자네를 죽이려고 하겠지.”

현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저를 죽여요? 저는 지금 고려에서 벼슬까지 하고 있는데 설마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위위경.”

“왜? 태상황제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잖나. 저놈이 가족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고려군을 끌어들였구나… 하고 말이야.”

“에이, 그건 아니죠.”

“뭐, 그건 가보면 알겠지.”

“그나저나… 진짜 방법이 있습니까? 그 쇠구 말입니다. 그리고 훔쳐 온다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 아닙니까.”

“남송은 주전파와 주화파가 있잖나. 근데 주화파는 진회 덕분에 제대로 썩은 존재고, 그 위에 태상황제가 있기 때문에 주전파와 대화는 통하지 않겠지만, 주화파와의 이야기는 통할 수 있지.”

“주화파를 이용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주화파라고 해도 썩은 놈들이 많아. 그뿐인 줄 알아? 그 주화파의 수장이 진회의 아들이야.”

“그걸 어떻게 아세요?”

“상인들이 들려주었네.”

“왜 이런 말씀을 전혀 안 하셨습니까?”

“나만 알고 있는지 아나? 알 사람은 다 알걸? 송나라 사정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알건 다 알아 중방에서도.”

“아…….”

“자, 그만 일어나보자고. 용건은 끝났으니.”

“예. 위위경.”

현수와 악정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위위시 밖으로 나갔다.

* * *

현수는 악정과 함께 황성문을 지났다.

“위위경!”

저 멀리서 학생들이 뛰어오자,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학생들은 곧장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뭐 하는 짓이냐!”

악정이 크게 소리쳤다.

“역정 내지 말게. 무슨 일이냐? 무슨 일로 이렇게 떼로 모여 온 것이냐?”

현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위위경, 정말 육부의 상서들을 잡과 출신들로 채운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게 언제적 일인데 인제 와서 따지려는 게냐?”

“위위경! 이 나라는……!”

“그래. 유학을 중시하고 정치이념을 유학으로 두고 있는 나라지. 하지만 그 유학이 밥 먹여 주냐? 쌀을 주냐? 아니면 병을 고쳐주냐? 아니면 돈을 주냐?”

“위위경,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성종 황제와 현종 황제께서 지금 이 자리에 계셨다면 분명 통곡하셨을 것입니다. 이 나라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는 학문이옵니다. 그런 학문과 잡과를 비교하시다니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답답한 새끼들아! 유학이라는 게 너희들 밥을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목숨을 걸어. 너희가 아프면 유학으로 병을 고칠 거야?! 생각들하고는… 이놈들 치워라!”

“예! 위위경!”

뒤따르던 군사들이 꿇어앉아 있는 학생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위위경! 이건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행동이옵니다!”

“멈춰라!”

학생의 말에 현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사직이 위험해?”

“위, 위위경… 그냥 젊은 학생이 객기를 부리고 한 말일 뿐이니, 그냥 넘어가시지요.”

악정은 당황하더니, 군사들을 바라보며 빠르게 학생들을 치우게 하자, 현수는 손으로 그들을 저지시켰다.

“너에게 다시 물으마. 나를 협박하는 게냐?”

“이노옴! 어서 위위경께 잘못을 빌지 못하겠느냐?!”

“잘못한 게 없습니다! 제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학생은 발악하며 대들었다.

“여봐라, 저놈을 끌고 가 목을 베어 효수(梟首)하라.”

“위위경!”

악정은 놀라, 현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위위경, 이건 아닙니다. 나이가 한참 어린 애들입니다.”

“감히 사직을 걸고넘어져? 너 같은 놈들이 나라의 발전을 막는 놈이야! 뭣들 하느냐? 끌고 가라!”

“예! 위위경!”

군사들은 가차 없이 학생을 끌고 가버렸다.

“여기 따라 나온 놈들은 장 삼십 대씩 쳐서 돌려보내라!”

“예! 위위경!”

현수는 명을 내리고서는 말을 타고 저택으로 향하였다.

* * *

그날 저녁.

현수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무도 들이지 않고서 안주도 하나 집어 먹지 않은 채 술만 마시었다.

“위위경, 군기감에서 사람이 찾아왔사옵니다.”

“들라 하라.”

덜컹.

방문이 열리며 한 중년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서며 허리를 숙이었다.

“자네가 황실에 진상하는 병기와 갑주를 만들었다지?”

“예. 위위경.”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오게.”

“예. 위위경.”

군기감의 대장장이가 가까이 다가와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허리를 숙이었다.

현수는 대장장이에게 접혀있는 종이를 건네었다.

“펼쳐보게.”

대장장이는 종이를 펼쳐보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렇게 생긴 철퇴 하나 만들어 주겠나?”

현수는 야구 배트 모양의 철퇴를 만들어 줄 것을 의뢰하였다.

난생처음 보는 철퇴 모양이었다.

대장장이가 의문에 찬 얼굴로 물었다.

“통짜 철퇴 형식입니까?”

“그렇네.”

“어느 용도로 쓰려고 하십니까?”

“이 사람아, 병기를 만드는 자가 더 잘 아는 걸 내게 묻는가?”

“그냥 그림만 보고, 나머지는 자네가 잘 만들어서 가져다주게. 이참에 가져다주는 거… 원형방패도 하나 만들어 주고.”

“아, 예. 위위경.”

대장장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였다.

“원형방패와 철퇴를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가?”

“닷새 주십시오.”

“닷새? 알겠네.”

현수는 대장장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함에서 은병을 담은 주머니를 건네었다.

“아닙니다. 위위경. 받을 수 없습니다.”

“가져가서 한 잔씩들 하고, 필요한 데 쓰게.”

“감사합니다.”

대장장이는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저… 위위경.”

“응?”

“길이는 얼마나 하면 되겠습니까?”

“손잡이 부분이랑 몸통 합쳐서 한… 4자 반?”

대장장이는 현수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면… 4자 반의 길이의 형태로 만들면 되겠사옵니까?”

“하하, 자네가 알아서 해오게.”

“예. 위위경.”

대장장이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현수는 다시 술잔에 술을 따르고 마시었다.

한 학생의 목이 효수(梟首)된 이후로 수많은 학생들이 달려 나와 시위를 하고 있었다.

당장 위위경 유현수에게 죄를 물으라며 말이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의방 역시 시위를 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그저 정무만 보고 있었다.

황실에서도 별말이 없었다.

“위위경, 보문각 대제학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뫼시어라!”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

방문이 열리면서 정갈하게 관복을 입고 안으로 들어서는 보문각 대제학.

그를 보자, 현수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보문각 대제학, 최척경과 최송년이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두 대제학 분을 이렇게 뵙습니다.”

“아닙니다. 위위경.”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별말씀을요. 자, 이리로 앉으시지요.”

현수는 정중하게 두 사람을 청하며 자리에 앉았다.

“한 잔씩 드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위위경.”

“하하, 새로 술상을 해오라고 해도 되는데요.”

“아닙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최송년과 최척경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께서는 국자감과 태학 학생들 때문에 오신 거지요?”

“예. 그렇습니다.”

“위위경,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희 둘은 위위경께서 하려고 하시는 일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합하와 위위경께서 하려고 하시는 일들에 모두 찬성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자기 의견을 낸 학생을 그렇게 무참하게 참수하시어 효수하는 건 옳지 않으신 행동이신 듯합니다.”

“위위경, 학생들이 계속 저렇게 나오니… 위위경께서 화가 나서 그렇게 했다고 한 마디만 해주시면 안 됩니까?”

“하하하하!”

현수는 최척경과 최송년의 말에 크게 웃었다.

“제가 그 아이의 목을 벤 이유는 하나입니다. 감히 이 나라의 사직을 입에 올리더군요.”

“흥분한 상태여서 그렇게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저는 사과 안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방안에서 나가실 때, 당장 학생들을 해산시켜 주십시오. 시간은 닷새 드리겠습니다.”

“해산이 안 된다면 어찌합니까?”

“그 뒤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현수는 그렇게 말을 하며 술잔을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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