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태상황제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평소에는 태상황제가 조정 일에 끊임없이 관여하여 항상 낮추고 살았다.
하지만 고려가 정벌을 행하자,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한 황제가 군을 일으킨 것이다.
수도의 장수들은 태반이 형편이 없어, 자신과 같은 뜻을 품은 이들을 등용시키며 군사들을 조련하였다.
그리고 금의 소식도 빠삭하게 보고를 받았다.
내정도 확실하게 다져놓은 황제였지만, 태상황제 때문에 뒤가 불안한 것이다.
이번 전쟁을 확실하게 태상황제도 할 말 없게 만들 방법은 고려군을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정말 방법이 없다는 것인가! 기회를 이렇게 버려야 한단 말인가!”
금나라는 북쪽의 몽고 때문에 골치가 아팠기에 북으로 대부분의 군사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버리게 할 순 없었다.
“폐하, 제가 고려로 가겠습니다. 가서 고려군을 움직여 보겠사옵니다.”
“오! 그게 정말이오!?”
고승윤이 말하였다.
“제 스승님의 한을 이제야 풀게 되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버릴 순 없사옵니다!”
“그대가 간다면 나는 동의하겠소. 또한 짐의 모든 권한을 줄 테니, 마음껏 활용하여 반드시 이루어 내시오.”
고승윤이 양손을 포개며 인사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아, 하늘은 이런 기회를 주고… 어찌하여 장수들은 모두 데려가셨단 말인가!”
황제는 한탄하였다.
* * *
그날 저녁, 현수는 함흥에서 함께한 장수들과 부장들을 불러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마셨다.
미리 혼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였다.
“하하하, 모두 고맙네. 자네들도 많이들 먹고 마시게.”
“예! 정주공!”
소와 돼지, 닭을 잡아 군사들에게 먹이고 마시게 하였다.
그동안 축적됐던 피곤함과 노곤함 때문인지 군사들은 술 몇 잔만 마시고 그대로 뻗었다.
그런 군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초병(哨兵)들 역시 교대하여 나와 먹고 마시고를 반복하였다.
“정주공, 다른 장군들도 오시는 겁니까?”
“아니. 다들 지키는데 뭐 하러 오라 해. 거기서 알아서 먹겠지. 같이 있으면 먹겠으나… 먹자고 오라 가라 할 수 없지 않나. 그리고 보급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하하하.”
“하하하!”
* * *
“이거 미치겠구먼…….”
고려에 금나라 사신이 갑작스럽게 왔다.
거기에 송나라 사신까지 겹쳐 와버렸다.
이걸 어떻게 타개(打開)해야 할지 이의방은 골머리가 아팠다.
중방으로도 나가지 않은 채 무비의 처소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고려 천하를 움켜쥔 이의방도 사신 앞에서는 속수무책이군요.”
“부인,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사신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마시오.”
무비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이의방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럼 저렇게 그냥 두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지는 못하겠지… 아니, 그나저나 이놈은 왜 안 와!”
이의방은 괜히 오지 않는 현수에게 신경질을 내었다.
두 달째 무소식이다.
오라고 한지가 언제인데 오라고 하였으면 당장 와야 할 것이 아닌가.
대체 함흥에서 뭐 하고 있길래 이렇게 안 오는지 이의방은 속이 탔다.
빨리라도 오면 현수 혼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질질 끌 텐데 말이다.
“이리 피해만 있지 말고, 차라리 나가서 무슨 말이라도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무슨 말? 말이라도 걸면 도와달라니, 군사를 보내 달라니… 이런 말을 할 게 뻔하지 않은가!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여기에 있는 게 아니오. 갑자기 찾아오니 신료들도 당황한 눈치던데.”
이의방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내가 볼 때는 당신과 신료들은 이미 답을 내놓은 듯한데… 아니십니까?”
“눈치 하나는 빨라 좋아. 흐흐흐!”
* * *
“합하께서는 몸이 편치 않아 나오지 못한다니까요… 왜 이리 억지를 부리십니까.”
우복야 이준의가 말하였다.
“그래도 잠시만 뵙게 해주시오. 폐하의 전권을 위임받아온 지 벌써 보름이오. 시간이 없소이다.”
“우리가 먼저야! 우복야, 저런 의리라고는 쥐뿔도 없는 것들을 상대하지 마시오!”
“뭐라! 네놈들의 그 무식한 행동 때문에 우리 백성이 얼마나 당했는지 아는가! 내 그것만 생각한다면 당장 죽여 버리고 싶지만, 여기가 고려 땅인 만큼 참는 것이다.”
“뭣이!”
“그만! 그만 하세요! 사신이라는 분들이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보다 못한 예부 상서 유응규가 나서자, 금나라 사신과 송나라 사신은 시선을 돌리었다.
“송나라 사신과 금나라 사신께서는 객관으로 돌아가 기다리십시오. 이 무슨 추태입니까.”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요?”
“우복야께서 말씀드린 대로 합하가 몸이 안 좋으셔서 쉬고 계십니다. 그동안의 정무로 인해서 존체가 회복되시는 대로 합하께 고하겠으니, 두 분께서는 이만 객관으로 돌아가 계시지요.”
유응규의 말에 금의 사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휑하니 밖으로 나갔다.
송나라 사신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우복야, 합하께서는 정녕 나오실 생각이 없는 겁니까?”
“몇 번이나 찾아가 보았지만, 미동도 없소. 사신을 만날 의향이 없다는 뜻이지.”
“그럼 저 사신들은 어찌합니까? 합하를 만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듯 보입니다.”
이린이 말하였다.
“그냥 둡시다.”
“…예?”
“아쉬운 건 저들이 아닙니까. 연통도 없이 이리 온 것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남송과 금의 전쟁이 어찌 끝날지 모르는 일이지요. 차라리 합하께서 오래도록 누워 계시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합하께서는 금나라, 남송 간의 전쟁에 있어서 고려군의 피는 절대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나라, 남송의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금나라는 북으로는 몽고, 남으로는 남송으로 인하여 문제가 시급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로 무작정 사신으로 보내어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었다.
북으로 대거 군을 이동시킨 마당에, 남송을 방어할 수 있는 군사들이 조금 부족한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금은 고려의 군사가 극적으로 필요하였다.
“서북 면에서 금의 방향으로 간다면 금나라는 북방은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남쪽에만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지요. 그러니 금나라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송나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남송의 태상황제가 정사에 관여 한지 이미 오래입니다. 후방에서 황제를 돕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니, 황제는 반드시 우리 고려군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합하께서는 섣불리 움직이시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내건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요지부동인 게 문제이지요.”
* * *
“그게 사실이냐?”
“예. 그렇습니다. 이의방은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럼 어디에 있는 거야?”
남송의 장수 고승윤은 눈썰미를 찌푸렸다.
“아무래도 금 사신과 우리를 만나지 않을 작정을 한 듯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택에 없다는 게…….”
“저…….”
“응?”
“예전에… 고려에 왔다 간 사신의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고승윤의 부장이 말하였다.
“뭐냐?”
“폐주의 여자와 함께 동거한다는 이야기를 말입니다.”
“사실이더냐?”
“예. 분명히 듣긴 했습니다.”
“거기가 어디냐.”
“그거까지는…….”
“찾아라. 만약 저택에 없다면 너의 말대로 그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
“예. 장군.”
부장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하루라도 빨리 찾는다면 좋겠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못 찾는다고 하더라도 개경에 있을 게 아니겠사옵니까.”
“이의방, 참으로 재미있는 자구나… 폐주의 여자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게.”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무엇을 못 하겠습니까.”
고승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경비가 삼엄한 저택의 담을 아주 쉽게 넘어 든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고승윤이었다.
고승윤은 삼엄한 경비를 뚫고서 이의방이 있을 만한 곳으로 발길을 움직였다.
곳곳에서 사병들이 지키고 있는 터라, 쉽게 발길을 옮기는 것도 어려웠다.
수시로 횃불을 들고 다니는 사병, 그리고 발길을 옮길 때마다 보초를 서는 사병들까지 어디 하나 경비가 뚫려 있는 곳이 없었다.
게다가 저택 밑바닥에는 종을 달아놓은 줄까지 있었다.
자칫 실수를 한 번이라도 하면 큰일이 날 수 있었다.
줄을 끊는다고 하더라도 이놈의 보초를 서는 이들이 불을 들고서 일일이 설치된 곳을 살피니, 끊어 낼 수도 없었다.
피가 말리는 걸음을 내딛던 그때였다.
“웬 놈이냐?”
‘…들킨 건가?’
고승윤은 침을 꿀꺽 삼키었다.
죽는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담장을 넘어서 들어왔으니, 자객으로 오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살펴라.”
“예. 대장.”
사병 대장 박지영의 명을 받은 몇몇의 군사들이 곧장 오는 게 보였다.
고승윤은 최대한 몸을 틀어 대들보에 몸을 숨기었다.
‘제발…….’
사병들은 바닥부터 시작해 꼼꼼히 확인하였다.
문틈까지 말이다.
“대장, 없습니다.”
“더 살펴봐.”
“예!”
“어이, 잘들 있었나!”
“정주공!”
저 멀리서 손을 올리며 인사하는 현수가 보였다.
“없습니다.”
“마저 경계를 서라.”
“예.”
박지영은 천천히 현수에게로 다가갔다.
“언제 오셨습니까.”
“지금 막 왔지. 합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아이고, 태평도 하셔라.”
“하하하.”
박지영은 웃었다.
“그나저나 혼례를 올리신다 들었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고맙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박지영은 먼저 앞장 며 현수를 안내하였다.
계속 대들보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고승윤은 보초들이 돌아간 것을 보고 나서야 천천히 대들보를 부여잡고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착지하였다.
“어서 오거라! 내 얼마나 너를 기다린 줄 아느냐!”
이의방은 현수를 보자마자, 버럭 소리쳤다.
“송구하옵니다. 이곳저곳 둘러보다 늦었사옵니다.”
“아니, 그럼 연통이라도 보내야지. 일단 들어오거라!”
“어서 오시오. 정주공.”
현수는 무 부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그러더니 신을 벗고 안채로 들어갔다.
멀리서 이의방을 보고 있는 고승현은 다시 대들보에 몸을 매달고서 지붕까지 올라가 최대한 몸을 숙이고서 안채로 향하였다.
“그래. 어떠하냐?”
“아직은 모릅니다. 호부에서 소식을 전하지 않겠사옵니까. 빨라야 일 년… 늦어도 삼 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