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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천하의 주인-83화 (83/159)

083화

예부 상서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나라 싸움에 고려 군사들을 보내고 싶지 않은 이의방이었지만, 만약 예부 상서의 말처럼 그런 시기가 온다면 정말 잘 선택해야 했다.

국운을 거는 선택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산에서 화전(火佃)을 일구고 사는 백성들이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게. 함경도로 이주시킬 생각이니, 계획도 짜보고.”

“예. 합하.”

화전을 일구고 사는 백성들은 세금을 딱히 내지 않는다.

자신들만 먹고 살 만큼 농사를 지으면 됐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산에는 맹수들과 산적들이 있다 보니,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함경도를 수복했으니, 그런 이들을 이주시키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함경도는 땅 주인이 없으니, 백성들에게 농사를 지을만한 땅을 나누어 줄 생각도 있었다.

“소작농으로 일하는 양수척들도 함경도로 이주시키게.”

“그리하겠사옵니다. 합하.”

이제부터 함경도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함경도는 어떻게 보면 미개척지이니, 섣불리 이주시켰다간 백성들의 분노를 살 게 뻔했다.

* * *

석 달간 함흥에 있었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도망간 여진 부락이 있었다.

여진 부락을 모두 정리하고 나서 현수는 함흥에 진을 쳤다.

지속적으로 보급품들이 당도하였다.

보급품을 바탕으로 현수는 군사를 함흥에서까지 계속 훈련시켰다.

이곳은 아직까지 완벽한 고려의 영토가 아니었으니, 긴장을 늦추게 할 수는 없었다.

“느리다! 다시!”

현수는 앉아서 진을 구축하는 훈련을 계속하였다.

군사들의 반응 속도가 점점 느려져 갔다.

몇 시간 동안 같은 훈련을 반복하다 보니, 군사들이 지칠 대로 지친 것이었다.

“장군, 군사들이 너무 지쳐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악정이 말하였으나, 현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계속 반복하여 시키자, 어느새 군사들이 수두룩하게 다시 진을 구축하는 모습이 정확해졌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속도 역시 아까보다는 조금 빨라졌다.

군사들의 거친 숨소리가 현수가 앉아있는 자리까지 들려왔다.

“그렇지! 그렇게 움직여야지! 그래야 너희들이 지쳐도 죽지 않는다!”

군사들은 현수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지금 이렇게 힘든 순간을 잘 기억해라. 보병은 지치면 죽는다. 이 생각을 필히 갖고 싸우거라. 알겠느냐!”

“예! 장군!”

군사들은 악에 받쳐 외쳤다.

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자, 군사들은 진을 유지하며 그대로 드러 누웠다.

장수들 역시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서 잠시 쉬었다.

“후우…….”

군막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현수도 경번갑을 벗고는 그대로 누웠다.

현수는 눕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티는 안 냈어도 몸은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밖에서는 훈련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참 열심히도 한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검을 패용하고 밖으로 나갔다.

기름 먹인 횃불을 들고 화로에 불을 붙이며 홀로 군영을 쭉 살피기 시작했다.

군막을 젖혀 확인도 해보았다.

훈련을 마친 군사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현수는 그런 군사들을 쭉 살피며 다시 군막을 내리며 이곳저곳의 군막을 확인하였다.

“근데 대체 이것들은 뭐야?”

한쪽에서 몇몇 군사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둥그런 것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진족들이 도망가면서 전부 버리고 간 것들이었다.

악정이 그런 군사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돼지 사료다. 그냥 신경을 쓰지 말고 저쪽에다가 내다 버리면 된다.”

“아, 예.”

군사들은 악정의 말대로 돼지 사료를 모두 삽으로 퍼 담아 수레에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네.”

“아닙니다.”

“근데 지금 군사들 데리고 뭐하나?”

“여진족이 버리고 간 돼지 사료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양이 너무 많아서 보급품을 놓을 자리가 부족해 치우라고 하던 참입니다.”

곳곳에 쌓여있는 돼지 사료를 확인한 현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걸 버린다고!”

“예? 아, 예.”

“저걸 왜 버려!”

현수는 곧장 수레로 달려가 돼지 사료라고 말한 것을 손으로 집어 자세하게 살폈다.

“…감자다!”

생긴 게 딱 감자였다.

이걸 먹지 않고, 돼지 사료로 쓰고 있다고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 그걸 어떻게 먹습니까?”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듯한 악정의 말투였다.

“이거? 삶아 먹고, 쪄먹고, 구워 먹고, 볶아먹고, 국 끓이고, 전 부치고…….”

“…예?”

“그리고 약으로도 써.”

“그, 돼지 사료로 말입니까?”

“그럼! 와… 이걸 여기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네. 야! 너희들 이리 와봐!”

현수는 작업하던 군사들에게 오라며 손짓하자, 군사들은 재빠르게 현수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수레에 있는 감자를 쭉 살피어보다가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여기 잘 봐. 여기 보면 싹 튼 거 보이지?”

“아, 예…….”

“이게 독이야. 이거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싹이 난 감자들은 따로 분류해서 모아 놓았다가 싹 난 부분은 뿌리까지 다 도려내서 먹도록 해. 찜찜하면 그냥 내다 버리라 하고. 혹시나 감자가 상한 부분이 있다고 하면 그건 먹지 말고 다 버리라고 하고.”

“그리고 몇 개 삶아서 가져오라고 해. 소금이랑.”

“아, 알겠습니다.”

군사들은 현수의 말을 듣고서 곧장 움직였다.

얼마 후.

군사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감자 삶아 왔냐?”

“예!”

“가져와.”

현수의 말에 군사는 탁상에 잘 삶아진 감자를 상위에 올려두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보는 정균과 차마 돼지가 먹는 걸 먹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장수들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누구도 먼저 감자에 손을 가져다 대는 이들은 없었다.

특히 감자를 가져온 군사는 군막에서 나가지 않고 정말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군, 아무리 그래도 여진족들이 돼지들에게 먹이는 사료를 먹는다니요… 이건 아닙니다!”

6위의 장수 하나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말하자, 다른 장수들도 수군거렸다.

“맞습니다. 저희가 뭘 잘못한 겁니까? 그럼 매를 치고 뭐라고 하십시오…….”

“하, 진짜 먹는 거라니까…….”

현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뜨거운 감자를 집었다.

감자와 함께 가져온 소금에 살짝 찍고는 한입 베어 물었다.

“음…….”

감자 속 열기가 입안을 가득 메우며 입김이 술술 나왔다.

더군다나 지금 함경도는 추운 날씨다 보니, 따뜻한 감자는 최고의 맛이었다.

“맛있어! 먹어봐!”

현수는 장수들에게 감자를 먹어보라 권하였다.

장수들은 그래도 내키지 않는 듯 쉽게 손을 가져다 대지 못하였다.

“나 믿고 한 입만 먹어보라니까…….”

현수는 다시 한번 더 감자를 먹어보라며 권유하였다.

결국 총대를 멘 듯한 정균이 조심스럽게 감자를 집더니, 현수가 하였던 것처럼 소금을 살짝 찍어서 한입 베어 물었다.

몇 번 힘주어 씹더니 정균의 표정이 점차 풀렸다.

“맛있지?”

“…어?”

현수가 씩 입꼬리를 올리며 정균에게 물었다.

정균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장수들에게 빨리 먹어보라며 권유했다.

이에 다른 장수들도 너나 할 거 없이 감자에 손을 가져다 대고 소금을 찍어서 먹어보더니 괜찮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 이거 삶아서 2개씩 군사에게 먹이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병사는 현수의 말을 듣고선 곧장 밖으로 나갔다.

현수는 말없이 감자를 하나 더 집어먹었다.

* * *

“정주공, 개경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들이게.”

군막을 열고서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젊은 남자들 수십여 명이 고개를 숙이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정주공, 저희는 호부에서 함경도를 조사하라는 합하의 명을 받고 온 주사들입니다. 호부에 속해 있는 장사랑부터 녹사까지 데려왔습니다.”

“함경도를 조사한다… 하긴… 함경도를 장악하였으니, 조사는 해야지. 박 중랑장.”

“예. 정주공.”

“자네가 인솔하게. 인솔해서 우리가 주둔하고 있는 곳부터 해서 다 알려주게. 함경도에는 맹수와 일부 여진족들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별장들과 군사들을 대동하여 보호하게 해.”

“명 받으옵니다. 나를 따라오시오.”

“아, 예…….”

주사들은 박 중랑장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한 사람은 나가지 않았다.

“정주공.”

그 사람은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어 건넸다.

“무엇이냐?”

“합하께서 드리라는 서찰과 교서(교서이옵니다.”

“알겠다. 나가봐라.”

주사가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가자, 현수는 이의방의 서찰을 펼쳐 보았다.

[벌써 너를 함경도로 보낸 지 몇 달이 흘렀구나. 그동안의 보고는 계속 받아왔다. 함경도를 고려의 영토로 장악을 하였으니, 그 뒷일은 장수들에게 맡기고 너는 돌아와 혼사를 치르도록 해라. 또한 네가 전에 부탁하였던 것 역시 처리하였으니, 교서도 함께 보낸다.]

현수는 서찰을 덮었다.

“지금 즉시 전령을 각 군에게 보내라. 합하의 명으로 나는 개경으로 돌아간다고 말이다. 이제부터 본진은 교서를 받은 악정 장군이 맡는다.”

“예! 정주공!”

부장은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이보게, 악정.”

“예. 장군.”

“이걸 받게.”

이의방이 내린 교서를 건넸다.

“이게…….”

“정식으로 자네를 6위 장군으로 명한다는 교서네. 자네가 나 대신 이곳을 맡아야겠어. 합하께서 개경으로 돌아와 혼사를 치르라 명하셨네.”

“감축드립니다. 장군.”

“감축은 무슨… 자네가 감축 받아야지.”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 위의 대장군들께서 불만을 토하시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자네만큼 지금 함경도 잘 알고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하게. 있으면 지휘권 주고 개경으로 와.”

“…….”

“각 대장군들이 불만을 표하진 않을 걸세. 원군(援軍)을 보내 달라고 하면 보내주고, 보급품 보내 달라고 하면 보내주게. 여기에서의 일은 그게 다네.”

“알겠습니다. 대장군.”

현수는 간단명료하게 말하였다.

* * *

“마지막으로 고려에 사신을 보내봐라.”

“폐하, 고려는 완강하옵니다. 그 나라의 국정을 맡은 이의방이라는 자는 절대 저희를 돕지 않을 것이옵니다.”

“고려군이 우리를 도와야만 하네. 그래야 완벽하게 승리를 거머쥘 수 있어.”

남송 황제는 주전파 신하들과 장수들을 데리고 양양성에 들어와 있었다.

주화파 대신들은 끝까지 전쟁 반대를 하였다.

물론 태상황제 역시 전쟁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남송의 황제는 태상황제의 명을 듣지 않고서 주전파 신하들과 군사들을 이끌고서 양양 성으로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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