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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천하의 주인-79화 (79/159)

079화

“혹시나 합하를 치려고 하는 거면… 제가 먼저 죽일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협박과 경고였다.

예전의 현수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경대승은 시선을 피하였다.

나라는 황제가 운영을 해야 한다고 옳다 여기고 있는 경대승이었다.

그리하여 이의방의 정권에 대해서 아직도 불만이 가득하였다.

이의방이 집권하고 난 뒤, 세상이 살 만해진 건 맞는 말이었지만, 경대승은 이런 상황이 두렵다고 느꼈다.

자칫 손 놓고 있다간 황제가 다시 폐위되고 이의방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

“정주 공!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감히… 상장군께 어찌 그리 무례할 수가 있는 것이오!”

허승이 외쳤다.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답답해서요!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되는데 왜! 그 생각을 못 바꾼단 말입니까!”

현수는 허승의 말에 버럭 하였다.

옆에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힐 거 같은 저놈의 성격이 문제였다.

“그만 가봐라.”

“형님, 상납금 받는 거 이제 그만 집어치우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금오위를 시켜, 다 때려잡도록 하겠습니다.”

현수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경대승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장군, 정주 공을 저리 두면 아니 될 것 같습니다.”

김광립이 말하였다.

“아니 되네. 정주 공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장군께서 다치시네. 가뜩이나 황제 폐하의 비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일이 커지네.”

허승이 말하였다.

“그럼 어쩌자는 건가. 기고만장한 정주 공을 이리 두자는 건가?”

“그만하게.”

경대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다 할 것이다.”

“장군, 허승 장군의 말대로 정주 공을 어떻게 해서든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군께서 이루고자 하는 게 모두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옆에서 계속 부추기는 이들에 경대승은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 * *

현수는 경대승의 저택을 나왔다.

‘저 인간… 진짜 그 생각 하는 거 아니겠지?’

현수는 시선을 돌려 저택을 다시 바라보았다.

오래전부터 항시 불만이 가득했던 경대승이었다.

한때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같이 남쪽을 살피곤 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둘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데 바로 이의방 정권 때문이었다.

현수는 그때 당시 황제가 아닌 이의방의 편에 섰고, 경대승은 황제의 편에 서며 논쟁을 하였다.

경대승은 황제가 다시 집권하여 정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하였고, 현수는 지금 이의방이 하고자 하는 일을 옆에서 도우며 고려를 발전시켜 나가자고 하였다.

그 논쟁은 결국 싸움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후로 두 사람은 서로 정치 관념에 대해서 일제히 말을 하지 않았다.

현수는 이러한 사실을 평생 함구(緘口)하며 묻어 두기로 마음먹었지만, 경대승은 끝내 자기가 원하던 그 일을 실행하겠다는 의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걸 합하께 말하면 대승이 형은 분명 죽는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의 현수는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정주 공!”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 이준의였다.

“우복야! 어른! 하하 하하하!”

현수는 급히 이준의 에게 달려갔다.

“이게 얼마 만이야! 어!”

“하하,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좌복야께서도 계셨군요. 어디 가시던 길입니까?”

“어딜 가기는… 우리 둘은 술 한 잔 마시러 가지.”

“이 시국에요?”

“시국이 뭐 어때서? 지금 잘만 풀리고 있는데… 아우가 출전하면 그때는 금주해야지. 하하하.”

“하하하하!”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요즘 정말 세상 살만해. 비록 정벌 중이지만… 이런 태평한 정벌이 어디 있겠는가.”

“예. 맞는 말씀입니다. 이게 모두 다 합하의 복이지요,”

“아이고, 정주 공의 입담이 많이 느셨소이다.”

“하하하하!”

문극겸의 말에 세 사람은 다시 크게 웃었다.

“정주 공도 여기서 만났는데, 우리 같이 가서 한잔합시다. 어떻소, 사돈!”

“좋습니다. 자, 가시지요.”

얼떨결에 두 사람 사이에 끼게 된 현수는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 * *

모두 기루에 들어섰다.

정말 오랜만에 오는 기루였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아는 이들은 현수를 보자마자 넙죽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정주 공. 우복야, 좌복야 어른도 오랜만이십니다.”

“오랜만이네. 행수.”

“오늘 귀한 분께서 오셨으니, 제대로 대접을 해야 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대로 된 사과 말씀도 드리지 못하였는데… 이리 다시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행수는 현수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큰 채로 모시겠습니다.”

“자, 가세!”

* * *

큰 채로 들어선 이들은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방에 대해서들 어찌 생각하십니까?”

현수는 이야기하던 도중에 대뜸 도방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도방? 그렇게 신경 안 쓰이는데.”

“골치가 아픈 건 맞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리 신경 쓸 건 아니지 않소. 경대승이 아우를 노릴만한 인사도 아니고”

이준의가 말하였다.

문극겸은 현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정주 공, 제가 안 그래도 경대승을 서경 유수로 임시로 보내고, 이의민을 잠시 불러들이라고 말씀은 올린 적이 있습니다.”

“서경 유수요?”

“예. 현재 서경 유수는 비어 있습니다. 조위총과 우학유가 서북면에서 거란족을 소탕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합하께서 도방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신 듯하여… 그리 말씀은 드린 적은 있습니다.”

“뭐라 하십니까?”

“아직 대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요? 합하께서는 제가 여기 있기를 바라시는데…….”

“그럼 다행이지요. 이의민이 온다면 허수아비 평장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방해만 되겠지요.”

문극겸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평장사 이의민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의방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거밖에는 없었다.

이의방을 대신할 사람으로는 이의민은 맞지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경험 있는 현수가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문극겸이었다.

“이의민은 동경유수가 알맞은 자리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차라리 그곳에서 합하의 명을 받으며 동경을 다스리는 게 옳은 일이지요.”

“사돈, 그래도 평생을 동경에서만 지내게 할 수는 없지 않소.”

이준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동경에서 남경으로 옮겨도 괜찮습니다. 아니면 나주로 보내어 임시적으로 살피게 해도 되고요. 그게 싫으시다면 전주도 있고.”

“그럼 남쪽을 계속해서 맡기려는 속셈인가?”

“예. 이의민은 누구보다 용력(勇力)이 출중한 장수입니다. 그런 장수가 남쪽 변방을 돈다면 오히려 남쪽은 안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신료들도 평장사를 꺼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복야도 알지 않습니까.”

이준의는 문극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현수도 잠시 생각하였다.

‘경대승을… 서경 유수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적어도 도방을 이용해 계략을 꾸미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의 감시 아래 놓이니 말이다.

“상 들어갑니다.”

“오! 어서 가져오게!”

문이 열리면서 큰상이 들어왔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산해진미가 한 상 가득 차려졌다.

“많이 드시고 부족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고맙네. 행수.”

행수는 고개를 숙이며 아랫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기녀들이 안으로 들어와 자리하였다.

* * *

다음 날 아침.

중방에 모여든 신료들, 그중에서는 경대승이 있었다.

“경 상장군.”

“예. 합하.”

“서경 유수가 자리가 비었으니, 자네가 임시로 서경 유수로 가게.”

“소장은 폐하를 모시는 응양군 상장군이옵니다… 어찌 친위군의 수장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입니까.”

경대승의 말에 이의방은 미소를 지었다.

“서경 유수로 보낼 이가 딱히 없어… 자네가 가게. 그리고 나에겐 용호군 상장군이 있고, 응양군 대장군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오래 안 걸릴 것이네. 임시적으로 자네가 가서 서경을 맡아.”

“예… 합하… 그리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여기 모인 신료들도 알다시피… 나는 계속 개경에 남을 생각이오. 정주 공이 나 대신 정벌에 나갈 것이오.”

처음 들어보는 이의방의 말에 현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정주 공.”

“예? 예… 합하.”

“반드시 승전(勝戰)을 올리도록 하라.”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합하.”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끄아아!”

“아악!”

곳곳에서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여진족의 기습으로 인해, 사상자가 얼마나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장수들은 군사들을 통제하며 방패로 날아오는 화살을 막게 하였다.

“막아라!”

팅팅!

빗발쳐 오는 화살들이 방패에 맞으며 튕겨 나갔다.

군사들은 일제히 집결하여 방진을 펼치었다.

나무들을 타고 검은 연기가 온 곳을 뒤덮었지만, 군사들은 정신력 하나로 버텨내고 있었다.

군사들은 물 항아리에 천을 적셔서는 입과 코를 막았고, 방패를 들고 있는 군사들에게도 입과 코를 가려주었다.

나머지는 항아리를 모두 깨버렸다.

“장군! 모든 항아리를 다 깨버렸습니다!”

“잘하였다! 방진을 유지하고, 즉시 이곳을 탈출한다!”

곳곳에서 군사들이 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이곳을 탈출하면 된다! 부상병들을 모두 챙겨라!”

타닥타닥.

시뻘건 불들이 이곳저곳에 옮겨붙었고, 연기는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왔다.

“전군! 이곳을 빠져나가라!”

턱턱턱.

군사들은 방진을 유지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불길이 번지고 있지 않은 곳으로 최대한 피해야만 했다.

와아아아아!

불길을 피해서 어느 정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여진족이 산 아래에서 뛰어 내려와 고려군을 덮쳤다.

하지만 틈을 주지 않았기에 군사들은 방패 사이사이로 창을 곧장 내밀었다.

푸푸푹.

“컥!”

고려군은 달려들던 여진족들의 가슴팍에 창을 꽂고 다시 빼었다.

“속도를 높여라! 여기서 빠르게 빠져나가야 한다!”

군사들은 방진을 유지하며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일렬로 쭉 방진을 이룬 군사들이 속속히 움직였다.

계속해서 여진족들이 몰려들며 공격을 감행해 왔으나, 방진은 밀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후퇴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더 이상 여진족들은 공격해 오지 않았다.

한참이나 멀어진 곳에서 안전한지 살피고는 그제야 방진을 해지하였다.

“모두 쉬어라!”

군사들은 털썩 주저앉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부상병들을 군의들이 속속히 모여들어서 살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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