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다음 날 아침.
이경수는 종이의 반 이상을 풀이하였고, 어느 정도 그 풀이를 마친 이경수는 이게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이건 분명 해도(海圖)였다.
수심, 수중 장애물, 암초 등을 해안선을 따라 세밀하게 적은 해도였다.
거기에 추가로 각 나라로 가는 해안선의 경로와 상태가 어떤지까지 적혀 있었다.
“항해사가 그린 건가?”
의문이 들었다.
항해사라고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기억하고 적어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수시로 바다는 돌변했기 때문이다.
“절도사, 항해사가 왔습니다.”
“들라 하라.”
덜컹.
집무실 문이 열리면서 항해사인 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이리 와서 한번 좀 보겠는가?”
부장은 해군 절도사 이경수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에게 이경수가 해도를 내밀었다.
“이건… 해도가 아닙니까?”
“서역인의 해도인듯한데… 내가 한번 풀이 해보았네. 자네 눈으로 보이는 게 맞는가?”
“고려에서 쓰는 기호와 다르다 보니,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장군께서 풀이하신 건 맞는 듯합니다. 이 표기는 고려에서 쓰는 표기와 같습니다.”
“다행이군. 한동안 생각하다가 알아낸 거야.”
“예. 장군. 그나저나… 이걸 혼자 풀이하고 계신 겁니까? 더군다나 이걸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구하기 어려우셨을 텐데요.”
“…그런가?”
“예. 장군. 심지어 날짜마다 표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 한 장에 모든 날짜별마다 기후와 바다의 상황, 별자리까지 표기한 거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닌 듯싶습니다.”
“이 한 장에 모든 걸 담았다?”
“그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거참… 나도 해도는 물론이고, 바다의 상황은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 빠삭한데… 이걸 그린 놈은 괴물인 게 틀림없어. 하하하!”
이경수는 크게 웃었다.
* * *
다음 날, 해가 중천에 이를 때쯤 영종도에 있는 이경수에게서 전서구를 받았다.
전서를 살펴보니, 현수가 보낸 건 상세하게 적힌 해도라는 것이었고, 이걸 기록할 정도로의 항해사라면 괴물과 같은 놈이라고 친절히 설명까지 하였다.
현수는 이경수의 전서를 보고서는 피식 웃었다.
“괴물이라… 그럼 내가 괴물을 하나 주웠구먼… 하하하.”
“무슨 말이십니까?”
천시호가 물었다.
“부두에서 내가 데려온 아이 말이야. 괴물이네, 괴물이야.”
“예?”
“…….”
“아, 어제 아이가 지도를 그린 게 있어서 절도사에게 확인 좀 해 달라 하였더니… 혀를 차는군.”
“정말 대단합니다. 그럼 그 아이를 가르쳐 보려 하시는 겁니까?”
“해봐야지. 분명한 건 보통 애가 아니야. 대체 배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보통내기가 아닌걸. 아이에게서 볼 수 없는 거친 야성미가 있다 할까?”
“아무래도 배에서 오래 있다 보면 그런 걸 가지게 되지요. 하지만 그런 아이가 노예선에서 버려졌다는 건…….”
“어린 애가 못 할 짓을 당한 것이네. 생각하긴 싫어. 노예라도 그렇지 미친놈들… 그 짓을 어떻게 해.”
정균은 살짝 고개를 숙이었다.
이미 알아볼 대로 다 알아본 현수였다.
조사 끝에 엘리시아가 서역 노예선의 성노예였다는걸 알게 되었다.
엘리시아가 죽어간다고 생각한 선주가 엘리시아를 외딴곳에 버린 것이고, 이를 우연히 현수가 발견한 것이었다.
더 웃긴 건 자기 노예를 왜 멋대로 가져갔냐고 따지는 선주가 이의방의 집으로 찾아 왔다가 결국에는 천시호와 정균에게 죽지 않을 만큼 맞고 돌아갔다.
“애가 독기가 가득해. 그만큼 당한 게 많은가 봐. 어찌하다가 그런 배에 타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면 잘들 해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뭐… 노예에게 잘해줄 거까지 있나?”
두 사람은 대답하였다.
“형님, 한번 저 아이를 가르쳐 보세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은데…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그렇지. 아주 재미있습니다.”
“정주 공의 명이면… 한번 가르쳐 보지.”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주 공, 개경에서 들은 소식인데… 여진족이 속속히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서북면에서 이미 거란족을 소탕하기 시작했네. 여진이 안 움직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개경에서는 더 다른 소식은 없나?”
“아직은 없습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정주 공, 합하께서 찾으시옵니다. 속히 저희와 가셔야 할 듯합니다.”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현수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6위의 부장들이 현수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갑자기? 무슨 일로?”
“소장들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합하께서 속히 모셔오라 하셨사옵니다.”
“알겠다.”
“그럼 고생들 좀 하게.”
“예. 정주 공.”
현수는 곧장 신을 신고서 부장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 * *
“왔느냐. 가깝게 있어도 오래 보지 못했구나.”
“예. 합하.”
“내가 곧 동북면으로 올라갈 생각이다. 그래서 네가 후방을 맡았으면 해.”
“저도 함께 가는 게 아닙니까?”
“골치 아픈 일이 있어.”
“도방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의방은 현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방은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도방을 창설한 경대승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일반적인 군을 모집한 것이 아니라, 경대승과 인연이 있던 이들이 모아서 도방을 창설하였다고 했다.
수년간 경대승의 명망을 익히 듣고 찾아든 이들만 백여 명이 넘었다.
그동안 경씨 가문의 사병이라 함은 아버지 경진 때부터 있던 이들만 있어서 그렇게 경계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경대승이 따로 도방을 창설한 건지 현수도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말은 황제를 지키고 충성하겠다고 하는데, 황제는 이미 군부 쪽은 전부 불신하고 있었다.
경대승은 그런 황제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경대승이 도방의 사병들에게 녹을 주지 않고 있고, 오히려 사병들은 저자의 왈자를 몰아내고 그곳에서 텃세를 부리며 왈자들이 받던 상납금을 도방에서 거두고 있다는 것이다.
“도방의 사병들은 죄다 대부분 고려에서 힘 좀 쓴다고 하는 장사 출신들이다… 너도 아는 얼굴이 있을 것이다.”
“저는 알지는 못합니다. 대승형님과 합하의 명을 받들어 남쪽으로 내려 갔다 온 적은 있어도… 그들을 딱히 만나거나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합하… 도방 말입니다. 횡포가 심하다 하던데… 합하께서는 그저 보기만 하실 겁니까?”
“그러니까 네가 후방 좀 보라고 이놈아.”
“아, 예. 합하.”
이의방이 왜 자신을 불러들였는지 확실해졌다.
이의방은 피식 웃으면서 술잔을 들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혼례는 아예 안 할 생각이냐?”
“해야지요.”
“그래? 언제? 혹 마음에 드는 이라도 있느냐?”
“아뇨. 그냥 살다가 때 되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때는 이미 오래 지난 듯싶은데. 왜, 과부라도 보쌈해서 정주로 보내주랴?”
“합하, 농이 지나치십니다.”
“하하하!”
이의방은 크게 웃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태후 전에 들렀다. 너만 좋다면 황실의 사위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 태후께서도 너를 몹시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였다. 물론 아직 황실에서 답을 주고 있지는 않지만… 네가 좋다 하면 내 있는 힘껏 밀어주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현수는 답하였다.
“그래. 알겠다. 그만 나가봐라.”
“예. 합하.”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 * *
다음 날 아침.
현수는 이의방의 집에서 신세졌던 곳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다.
조씨와 임씨에게 늦은 인사를 하였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와 경대승의 저택으로 향하였다.
쾅쾅쾅.
“뉘시오!”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현수는 답하였다.
“정주 공이네. 상장군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끼이익.
대문이 열리더니, 노복이 넙죽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상장군께서는 도방 분들과 함께 계십니다.”
노복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노복의 안내에 따라 경대승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경대승의 집 안,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도방이라 크게 쓰인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도방 안에는 사람이 없는지 조용했다.
그 뒤쪽으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수는 혼자서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하였다.
“크하하하하!”
“거기서 넘겨야지! 하하하!”
“저놈 보게. 하하하!”
도방 뒤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중 경대승도 눈에 들어왔다.
“형님!”
현수가 크게 외치자, 사람들이 일제히 현수를 쳐다보았다.
경대승 역시나 현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현수에게로 다가갔다.
“오랜만이구나.”
“예. 잘 지내셨습니까?”
“어쩐 일이냐?”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현수의 말에 경대승은 도방으로 안내했다.
도방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측근들로 보이는 이들이 경대승의 주위를 감쌌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현수가 먼저 말문을 텄다.
경대승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어찌 지내기는 항상 똑같지. 너는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예. 개경보다 정주가 훨씬 좋습니다. 형님.”
“음, 다행이구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보거라.”
“왜 도방을 설치하신 겁니까.”
“…….”
“상장군까지 올라가셨고… 합하께서 전답(田畓)까지 내려주셨는데 뭐가 부족해서 왈자들이 받던 상납금을 도방에서 거둡니까? 상장군 녹이 적습니까?”
“너… 그 이야기를 하러 여기까지 온 게냐?”
“예. 합하께서 아주 신경 쓰이시나 봅니다. 합하도 그냥 내버려 두고 계시니, 제가 답답해서 왔습니다.”
“이보시오! 정주 공! 상장군께 와서 이 무슨 무례…….”
“넌 닥치거라. 어디 잡병도 안 되는 놈이 감히…….”
현수는 경대승 부하의 말을 강하게 잘라버리고, 경대승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하였다.
“비록 제가 정주에 왔지만, 아직 듣는 게 많습니다. 합하는 함경도 정벌로 인해서 여진과 거란을 치고 계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형님이 골치 썩이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저자에 있는 왈자 놈들의 만행을 들어보았느냐?”
“예. 들어봤습니다. 합하께서 일전에 정리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주위가 정리되니, 새로운 왈자들이 들어왔지요. 물론 그놈들은… 조용히 사고 안 치고 지냈습니다. 형님의 도방이 생기기 전까지요.”
“그래. 네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전답을 받았고, 상장군 녹도 적지 않게 들어오고 있지. 또한 왈자 놈들의 상납금 또한 내가 도방 사람들에게 시켰다.”
“그럼 녹봉도 받고, 상납금도 받고 계신 거네요. 그 상납금은 어디에 쓰십니까? 합하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치고 들어오려고 하시는 겁니까?”
“…뭐라?”
경대승은 인상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