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화
경대승을 매섭게 바라보는 이의방과 지지 않고 눈을 바로 뜨는 경대승의 신경전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황실을 지키는 군사들과 주위의 장수들마저도 시선을 피하는 게 눈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경대승과 이의방의 일이 곳곳에서 퍼져 나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위위경과 이의민… 모두 똑같사옵니다.”
경대승은 몸을 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이의방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너무 올곧아도 부러질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를까… 가자.”
“…네.”
이의방은 현수와 함께 황궁 밖을 나섰다.
* * *
석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먼저 선황에게 예를 다하기 위해 상복을 입고서 삼 일간 짧게 국상(國喪)을 치렀다.
그리고 선황의 복위식을 가진 후에서야 정무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한글은 중방 회의를 통해서 확실하게 공표가 되어 황제에게까지 재가를 받았다.
황제 역시 한글에 대한 기본지식을 알려주자, 흡족해하였고 서경, 남경, 동경의 국자감 조교, 학사들이 개경으로 들어와 한글이라는 것을 배웠다.
백성들 역시 새롭게 만들어질 글자에 대해 굉장히 관심이 있었다.
특히 한자보다 쉽다는 말에 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였다.
국자감, 한림원에서도 관심이 있는 학자들도 많았다.
다른 장수들도 쉽다는 이유로 한글을 선호하고 있었다.
사서삼경, 오경, 병법서, 사서 등을 제작하는 활자소에서도 책을 한글로 제작할 준비를 하기 위해 분주하다고 하였다.
학자들에게 가르치고, 그 학자들이 한글로 써 내려가서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시키기 위함인 것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고려는 변해가고 있었다.
현수도 점점 고려에 적응해 나아갔다.
처음엔 개경 국자감에서 학자들을 가르치는데 정말 다리가 후들거리고, 말할 때마다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
물론 지금은 아주 쉽게 가르치고 있다.
다행히 학자들이 현수의 수업을 매우 잘 따라 주었기에 이제는 한글을 마스터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조교와 학사들이 다른 학생을 가르치고, 학생이 학생을 가르치,고 또 그 학생이 다른 학생을 가르치고, 부모를 가르치다 보니 한글이 점점 빠르게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각 향교에서도 백성들을 가르칠 준비를 착실하게 이어나가고 있었다.
두웅! 두웅! 두웅!
황궁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기다려온 논공행상의 날이었다.
북소리가 들리자, 문무백관들은 속속히 황궁 대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날인만큼 2~3품의 신료는 7류의 면류관과 오장복을 걸쳐 입고 입궐하였고, 4~5품의 신료는 5류의 면류관과 삼장복을, 6~9품의 신료는 작변에 무장복을 입고서 입궐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돋보이는 한 사람 있었다.
바로 이의방이었다.
황제가 미리 이의방에게 9류의 면류관과 구장복을 만들어 이의방에게 하사하였기에 논공행상 날, 이의방이 당당하게 구장복을 입고서 입궐한 것이다.
거기에 모든 신료들은 허리춤에 검을 패용하고 있었다.
구장복은 황제 의복 못지않게 아름다움과 위엄이 돋보였고, 신료들은 이의방에게 와서 인사를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석 달간 곳곳 고려 전역에서 귀족들이 하례 선물을 이의방에게 바쳤는데 그게 얼마가 되는지 아직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현수도 5류의 면류관과 삼장복을 입고 이의방의 옆에 붙어 있었다.
물론 이의민, 돈장, 박존위, 이영령 역시 함께하였다.
이들은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조원정에게는 대장군, 석린, 이영진에게는 장군겸 흥화진 좌, 우장을 내려 흥화진으로 미리 올려보내었다.
이렇게 대충 군부 쪽은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동벽상공신이라니… 하하하하!”
이의민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면서 계속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다 이의민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경대승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이의방은 한쪽에서 앉아서 경대승을 바라보았다.
경대승이 계속 개경에 남아있으면 이의민과 싸우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니, 처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주위에서도 경대승과 이의민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경대승이 분노에 눈이 돌아간다면 대전 안에서 검을 뽑아 들고서 싸우려고 들 수도 있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좌우로 문무백관들이 자리를 잡으며 허리를 숙이었다.
황제는 12류면관과 장복을 걸치고 나와서는 옥좌에 앉았다.
이에 신료들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황제는 쭉 신료들을 살피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들은 들으시오.”
“예. 폐하.”
“정중부의 난을 진압한 이들의 공을 높게 치하하고자 논공행상을 여는 것이며 그동안 미루었던 인사에 대한 것을 처리할 것이오. 중신들이 올린 사안을 모두 살피어 보아 재가를 하였으니, 한림원 학사 승지는 공표하도록 하라.”
“예. 폐하.”
한림원 학사 승지가 앞으로 나와 황제에게서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몸을 돌리며 두루마리를 펼치었다.
“중방의 결론의 따라 직책과 부임을 명하니, 호명하는 이들은 앞으로 나와 교지를 받들도록 하고, 육부에서는 인사고과를 살피어 사령장을 내리도록 하여라. 또한 예부에서는 과거를 준비하도록 하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문무백관들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고. 학사 승지는 계속 읊었다.
“먼저 응양군 상장군 두경승을 서벽상공신이자, 2군의 용호군 상장군 겸 우승선로 임명한다.”
승지의 말에 두경승은 천천히 앞으로 나왔고, 내관이 교지를 들고서 두경승에게 건넸다.
“폐하, 신 두경승… 폐하의 황명을 받드옵니다.”
교지를 받은 두경승은 살짝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뒤로 물러나 자리로 돌아갔고, 승지는 계속해서 말하였다.
“이의민을 동벽상공신 문하시랑평장사겸 좌우위 상장군, 돈장 신호위 상장군, 이영령 흥위위 상장군, 박존위 금오위 상장군, 최숙청 천우위 상장군, 김덕신 감문위 상장군, 육위 장군 겸 형부시랑 전의감 전의 유현수, 육위 장군 천시호, 예부상서 유응규…….”
수많은 신료들의 이름이 호명되자, 모두 나와 교지를 받아서 자리로 돌아갔다.
많은 이들이 미소를 지으면서 교지를 받아 들고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벽상공신 흥위위 섭대장군 지병부사 전중감 위위경 이의방의 모든 벼슬을 다시 재정하니, 벽상공신 삼중대광 문하시중 상주국 태사 태보 육위 상장군 감수국사 교지를 내릴 것이며 훈요십조를 문하시중에게 내리니, 훈요십조를 읽고 또 읽어 태조 성조의 말씀을 받들어 옳은 정치를 하도록 하라.”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의방은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내관이 직접 교지와 훈요를 들고서 이의방에게 다가가 교지와 훈요를 건네었다.
이로써 정중부는 끝이 났다.
이제 이의방이 확실한 최고 실권자이자 권력자라는걸 문무백관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훈요를 왜 이의방에게 하사하였는지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신하들은 단숨에 알아차렸다.
“경들은 들으시오.”
“예. 폐하.”
“금일 부로 나라의 크고 작은 일과 군사에 관한 문제는 문하시중과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시오.”
“예. 폐하.”
마침내 논공행상의 절차들이 끝났다.
“이만 여기서 파하겠소이다.”
황제가 짧게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신료들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였고 황제는 대전 밖으로 나갔다.
‘흐음…….’
이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걱정으로 다가온 이의방이었다.
그 기분을 모른 채 다른 신료들은 서로 축하를 해주었다.
그 와중에 이제 실권자인 이의방의 눈치를 슬슬 보는 신료들도 있었다.
“이만들 나갑시다.”
“예…….”
이의방이 먼저 밖으로 나가자, 신료들이 그 뒤를 이어 줄줄이 나가기 시작했다.
현수는 고려의 역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직감하였다.
아니,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제 이의방이 어떤 행보를 할지가 중요했다.
그가 잘못된 길로 간다면 그건 더욱더 문제가 크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현수는 두려웠다.
* * *
며칠 후.
논공행상이 끝이 난 뒤, 소식을 전해 들은 지방 귀족들이 재물을 가지고서 이의방에게 바쳤다.
물론 잘 봐달라는 뜻이었다.
이걸 모를 리 없는 이의방은 선물을 받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없었다.
“명단입니다.”
“오늘은 얼마나 되느냐?”
“서른 명 정도 됩니다.”
현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의방은 장부를 펼쳤다.
그동안 틈틈이 글공부를 해왔다.
한자는 쓰고 읽을 수 있을 정도였고, 한글은 이미 마스터하였다.
“박준진, 이최성, 우희지, 박태형, 이순진, 강효태…….”
천천히 쭉 살피어 보는 이의방.
그리고 어디 출신이고 본관이 어디인지 까지 다 적혀 있었다.
“현수야.”
“네.”
“일은 어때 할 만하냐? 어려운 건 없고?”
“아, 예… 그렇게 제가 법을 잘 몰라 배울 게 너무 많습니다.”
“하하하. 차근차근해. 그나저나… 전의감에서 계속 공부만 한다며? 국자감 애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남경, 동경, 서경에서 온 조교, 학사 모두가 한글을 깨우쳤고, 지금은 한글을 통해서 사서(史書) 중 하나인 맹자의 글을 뜻풀이하면서 한글로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의방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글이라는 글자… 아니, 우리 글자 말이다. 모두가 알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되겠느냐?”
“최소 3년은 걸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3년…? 3년이라…….”
“한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라면 문제없이 늦어도 석 달 정도면 끝낼 수 있습니다. 다만 고려 전역에 알리고 가르치는 일이라 쉽지가 않습니다. 더군다나 잘못 가르쳐도 문제가 되니, 확실하게 가르치려다 보니 시간이 꽤 많이 걸립니다.”
현수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네가 그렇다고 하니… 내가 할 말은 없다. 네가 남아서 가르쳐야 할 수준이냐, 아니면 국자감 조교와 학사들이 가르쳐볼 만하겠느냐?”
“논어가 완성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해주신 활자소에서도 문자의 기본인 자음, 모음 판이 만들어졌으니 빠르게 인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수의 말에 이의방은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개경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내부의 일은 모두 정리가 되었다.
정중부, 정균, 송유인은 역수 고개 공역장으로 보내졌고, 이의방을 죽이려고 하였던 승려들 역시 풀어주지 않고 모두 공역장으로 보내 버렸다.
현재는 돈장, 박존위 두 사람이 이의방의 명을 받아 개경 저자 왈자, 기방에 들이닥쳐서 전부 공역장 인부로 보내 버렸다.
이렇게 하니 개경의 치안은 더욱더 좋아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