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넷째, 우리 동방국은 옛날부터 중원의 풍속, 문물, 예악의 제도를 따랐으나, 지역이 다르고 인성 또한 각기 다르고 이해관계 역시 다르므로 똑같게 할 필요는 없다. 더불어 거란은 짐승과 것은 존재이므로 의관 제도를 삼가 본받지 말 것이다. 다섯째, 서경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뿌리가 되고 자손만대에 대업을 이루게 할 것이니 사계절의 중간 달에 후세는 서경으로가 100일이 넘도록 지내어 나라의 안녕에 이르도록 하라. 여섯째…….”
황제는 계속해서 훈요를 읽어 내려갔다.
옛말임에도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사계 중달의 백일은 서경에 머무르라…….’
“하아…….”
황제는 한숨을 내리 쉬었다.
“그래… 허수아비 황제가 무엇을 더하겠는가. 태조황제의 말씀처럼 나라의 안녕을 위한 일이라면 가야지…….”
황제는 슬픈 미소를 지은 채, 붓을 들고 종이를 펼쳐 훈요십조를 따라 써 내려갔다.
훈요십조를 따로 쓴 후에 쭉 다시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내관.”
“예. 폐하.”
“두루마리에 붙여라. 위위경에게 보낼 것이다.”
“폐하… 훈요는 태조성조께오서 후세 왕에게 남긴 것입니다. 훈요를 어찌 위위경에게 내린다고 하시옵니까?.”
내관의 말에 황제는 피식 웃었다.
“이제 이 나라의 주인은 이의방이나 다름없으니, 성조의 훈요를 내리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각된다.”
“폐하…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박 내관은 짐의 말을 따르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라도 황실을 유지하고 지킬 수만 있다면 짐은 무엇이든 할 것이다.”
“폐하…….”
박내관은 고개를 숙이며 어쩔 수 없이 황제의 말을 따랐다.
* * *
신료들이 모두 한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에 이준의는 신료들과 의논한 대로 논공행상에 이름을 올릴 이들의 이름을 이의방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자, 이게 끝이네.”
“음… 천시호 별장은 중낭장으로 승격시키고, 나를 돌보았던 의원들은 모두 전의감으로 배속시키고, 더불어 정주 유씨의 성을 가진 현수는 육위장군 형부시랑 겸 전의감 전의로 올리시오.”
“예… 위위경.”
“현수야, 인사드려라. 이 나라의 중신들이다. 그리고 여기… 내 옆에 있는 녀석이 내 목숨을 구하고 공들도 보았던 그 글자를 만든 이오.”
“반갑습니다. 유현수라고 합니다.”
현수는 정중하게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중신들 역시 무시하기는커녕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한글에 관해서 설명해줄 것인데… 일단 들어보시오.”
“예. 위위경.”
“시작해라.”
“아, 네.”
현수는 앞으로 나와서 종이에 자음, 모음을 그려 넣고는 이걸 어떻게 읽고 쓰는지에 대해서부터 설명하였다.
사실 현수는 자음, 모음을 써 내려가며 매우 떨렸다.
앞에 있는 대신들이 조선 선비들처럼 꽉 막힌 인사들이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 창제했을 때, 한글 사용을 극구 반대하던 신하들이 유교가 어쩌고저쩌고… 성리학 공자왈 맹자왈… 이딴 소리나 해댔지 않았는가.
결국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한글을 찬성하게 되었지만, 한글은 사대부들이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억울하고 가슴 아픈 글자가 한글이 아닌가.
“후… 이게 자음, 이 아래 게 모음입니다.”
“자음, 모음이 무엇이오? 그리고 이걸 어찌 읽는다는 것이오?”
현수는 한글에 대해서 아는 그대로 설명을 하면서 이의방에게 알려 주듯이 천천히 알려 주었다.
이에 중신들은 색다른 반응을 보였다.
“간단하기는 간단합니다. 세상에… 한자보다 더 쉽지 않습니까.”
“허나, 우리는 학자로서 유학에 이 글자를 쓴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유학의 뜻은 한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문자는 매우 쉬운 문자입니다. 이 문자를 배우면서 한자를 알아도 되고, 한자의 뜻을 풀이해 적어도 아는 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현수는 짤막하게 말을 하였다.
“글자는 쉬우나, 한자의 뜻을 이 글자를 통해 적는다라…….”
윤인첨은 현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곤 곰곰이 생각하다가 붓을 들고서 빈 종이에 글을 써보았다.
논어였다.
공자와 제자의 어록을 남겼다는 논어를 현수에게 짧게 배운 글자로 써 내려가 보았다.
‘…뭐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그냥 이의방에게 알려 주듯이 알려 주었더니, 뜻을 금세 알아차리고서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현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종이의 써진 글을 살폈다.
“흐음…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아, 네… 그러니까요.”
현수는 다시 빈 종이에 글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뭐… 이런 식으로 써 내려가면 그 뜻을 알 것이고, 중간중간에 한자를 넣어 주면 그 뜻을 이해하기는 더 쉽지 않을까요? “
“허허허.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한자의 뜻을 풀이해서 이 글자로 적어 넣는다… 괜찮은 생각 아닙니까?”
한문준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자 학습을 게을리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럼 두 개 다 병행하시오. 그렇게 해서 이 글자를 배우고 싶은 이들은 이걸 배우고, 한자를 배우고 싶은 이들은 한자를 배우게 하면 되는 거 아니오. 뭘 그리 따져… 따지기는.”
이의방의 말에 조영인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중방 신료들이 30~40대였고, 나이가 많아야 50대였다.
얼마나 젊은 신료들을 많이 죽이고 유배를 보내었는지 현재 상황을 보면 답이 나왔다.
따라서 이의방의 말 한마디면 지금은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하고 있었다.
“저…….”
“왜 그러느냐?”
“맞는 말씀이시긴 한데… 한자는 최소 3천 자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요. 적어도 한자로 이름은 쓸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한자를 알면 깊은 이해심을 키울 수 있으니, 좋은 생각각이십니다.”
한문준이 현수의 말에 덧붙여 말하였고 윤인첨, 조영인, 문극겸 할 것 없이 좋게 이야기를 하며 이의방을 구슬렸다.
“흐음…….”
“사서삼경, 오경을 읽을 줄 알려면 최대한 많이 아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저, 죄송합니다만… 이 글자로 삼경, 오경 그거 다 뜻풀이해서 옮기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글자 하나 모르는 사람도 이걸 배우면 쉽게 읽을 수 있을 거 아닙니까. 못 배워먹었다니 뭐니… 그런 소리 안 들어도 되고 말이죠.”
이의방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현수를 노려보았다.
마치 자신을 겨냥한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현수는 눈치가 보였지만, 이의방과 시선을 죽어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조영인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논어든 시경이든… 이 글자로 뜻풀이를 하면서 배운다면 자연스럽게 유학의 깊이를 더 알 수 있지 않을까하는…….”
“하하하하!”
조영인은 현수의 말에 크게 웃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인 듯합니다. 이 글자를 읽고 써 내려가며 한자의 뜻풀이를 배운다… 확실히 학문의 깊이가 더해질 듯합니다.”
“고맙습니다.”
현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좋습니다. 선생의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예?”
“선생이 말한 이 글자… 한번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하하하, 저는 이미 마음이 굳혔습니다.”
“나 또한 그렇습니다.”
신료들 모두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현수는 침을 꿀꺽 삼키었다.
조선 시대의 선비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였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광경이 나왔을 것 같았다.
물론 지금 이의방이 집권자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답이 빠르게 나온 것이나 진배없지만, 그래도 한두 명쯤은 반대하는 자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었다.
“저… 그런데 이 글자를 만들게 된 계기가 무엇이오?”
“고려는 중국과 달라서요.”
“…….”
중국과 달라 글자를 만들었다.
신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현수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현수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신료들이었다.
‘뭐지?’
정적이 이어지자, 조금 난해한 상황이 되었고 신료들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던 탓이었던 것 같다.
‘이 시대에는 그런 걸 못 느낀 거야?’
현수는 머리를 긁적임과 동시에 세종대왕에게 죽을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뺏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툭.
그때 이의방이 나가자며 눈치를 주자, 현수는 조용히 중방 밖으로 나갔다.
이의방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신료들 반응이 없자, 피식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이의방은 썩 나쁘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글자 말이다… 얼마면 되겠느냐?”
“네? 그게 무슨 말이세요?”
“고려 전역으로 퍼트리는 데 있어서 얼마면 되겠느냐… 이런 말이다.”
“일단 가르쳐야 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럼 중신들과 다시 의논을 해야겠구나. 현수야.”
“네.”
“차근차근 정리한 후에 떠나거라. 그게 옳은 순서 같다.”
“…네.”
“위위경!”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이의방과 유현수는 시선을 돌렸다.
“아, 응양군 장군 경대승이 아닌가. 그래 무슨 일로 오셨는가?”
“경대승……?”
훤칠한 키, 잘생긴 얼굴.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남자가 경대승이라니.
현수는 침을 꿀꺽 삼키었다.
그런데 무언가 경대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위위경.”
“그래. 왜 그러나?”
“이의민이… 동벽상공신에 오른다는 게 사실이옵니까?”
눈을 부라리며 말하는 경대승이었다.
이의방은 그런 경대승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는커녕 웃으며 말하였다.
“황제 폐하의 명일세. 이래라저래라할 게 아니야.”
“소장은 황실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위위경과 잠시 한뜻을 하였으나, 이의민이 동벽상공신에 오르는 꼴은 도저히 못 보옵니다. 제 아버지를 처리하신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을 드리지 않겠사오나… 이의민만큼은 절대로 아니 됩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거스르겠다는 것이냐?”
“위위경께서 황제 폐하께 철회해 달라 하면 철회해줄 것이 아니 옵니까. 이의민은 황제를 시역(弑逆)한 죄인이옵니다.”
“뭐라!?”
이의방은 크게 소리치며 경대승을 노려보았지만, 경대승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황제를 시해한 자가 아직 살아 있는데 어찌 두 발을 뻗고 자겠습니까. 전 그렇게 지낼 수는 없사옵니다.”
“…….”
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선황을 죽이라고 시킨 게 나인데… 그럼 나도 죽이겠다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