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장군, 계속 이러고 계실 것이옵니까? 차라리 이의방을 도와 정중부를 처단함이 어떠하시옵니까?”
허승이 말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소인도 견룡교위의 말씀이 옳다고 여겨지옵니다.”
김광립과 준익 또한 경대승을 보채었다.
허승, 김광립, 준익.
이 세 사람은 정균과도 친한 사이였지만, 중립과 기회를 보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정균과 밀접하게 지내면서도 경대승과도 함께 하였다.
경대승도 이러한 세 사람을 알고 있었고, 나름 자신만큼 고려를 생각하는 이들로 느꼈기에 함께 하는 동지들이었다.
“참으로 답답하십니다. 지금 이의방을 돕는다면 경장군이 이루고자 하는 뜻을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장군이 아니라, 이의방의 편에 서서 정중부를 친다면 최소 응양군 대장군이 되어 황실을 지킬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나는 고작 황실을 지키려고 하는 게 아니네. 황실의 권위가 바닥을 쳤으니, 황실의 권위를 다시 높여야만 한다는 생각이야. 더불어 나는 위위경과 함께 할 생각이 전혀 없네.”
경대승은 자신의 뜻이 확고했다.
김자격, 허승, 김광립, 준익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황실의 북문을 지키었다.
목책을 세운 채로 방패수가 앞에 서고, 창병이 뒤에 섰으며 그 뒤에 궁수를 배치하였다.
황궁의 북문을 통해 들어오려 한다면 반드시 경대승을 거쳐야 할 것이었다.
용호군은 그 반대로 무장해제를 시켰다.
조원정, 석린, 이영진 이 세 사람을 제압하니, 용호군 전체가 저항하지 못한 것이다.
“장군!”
김자격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 주변에서 붉은 불빛이 가득 피워 졌다.
정중부와 이의방의 싸움이 시작된 것으로 보였고, 이에 경대승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 * *
와아아아아!
퍼억!
검차에 나무를 올리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였다.
군사들이 불이 붙은 검차를 들이밀며 방벽으로 갖다가 때려 박아버렸다.
화르르!
방벽에 불이 옮겨붙었고, 방패와 도끼를 든 병사들은 검차를 발판 삼아 뛰어 올라가 방벽을 넘었다.
퍽!
빠악!
방패로 막고, 때리고, 도끼로 찍고 머리를 타격하면서 진영을 무너뜨리는 도끼병들이었다.
그렇게 몇몇의 도끼병들이 정중부가 설치한 방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다.
푸푸푹!
“위위경, 상대의 방벽이 곧 무너질 듯 보이옵니다.”
이의방은 같은 자리에서 돌아가고 있는 전투 상황을 계속 지켜보았다.
이의방보다 군사가 많지만, 제대로 된 전술을 펼치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 당하고 있는 정중부였다.
“계속해서 밀어붙여라!”
이의방은 크게 소리치며 명을 내리었다.
“남은 군사들! 모두! 적진으로! 들어가! 적들을 섬멸하라!”
와아아아아!
뒤에 남아 있던 군사들마저도 돌격했다.
이의방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니, 흥위위 군사들은 기존보다 현재 더욱더 사기가 드높아져 죽음을 불사하는 정예 병사들이 되었다.
무승들조차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속수무책 당하고 있었고, 종군하여 정균의 부장으로 있던 종참 역시 흥위위 군에 강성함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무승이라 하더라도 중앙군의 속해 있는 흥위위를 상대하기는 벅찼기에 곳곳으로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고 있었다.
퍼억!
퍼퍽! 퍽!
“이야아아아!”
이의민이 검차를 발판 삼아 번쩍 뛰어올라서 도끼로 군사의 머리를 가격했다.
그 주위에 있는 군사들을 모조리 도끼로 때려죽이기 시작하면서 가차 없이 길을 막는 장졸들을 무참하게 때려 죽여가기 시작하였다.
“정중부를 잡아라! 정균을 잡아라!”
박존위는 이광정의 사병들과 그의 군사들을 동원하면서 정중부와 정균을 포박하게끔 명을 내렸다.
밀리고는 있다고 하지만, 노장은 노장이었다.
밀리고 있어도 흐트러짐 없이 장졸들을 지휘하면서 노련하게 군사들을 베고, 찌르는 정중부였다.
또한 그런 정중부를 양옆에서 지키는 정균, 송유인은 굉장하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송유인은 젊었을 적부터 힘이 장사라고 불렸다.
정중부의 사위가 되고 나서부터는 탐욕스러운 인물로 백성들에게 낙인이 찍혔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완벽한 장수였다.
정균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씨가 민가 곳곳에 옮겨붙었다.
민가에 불이 붙자, 불 때문에 뛰쳐나왔던 백성들은 재수 없게도 주변에 있는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곳곳에서 한 명, 두 명씩 뛰쳐나왔다.
운 좋게 살아남은 백성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군사들의 손에 죽어가는 백성들도 있었다.
“백성들을 보호하라!”
박존위는 소리치면서 민가에서 뛰쳐나오는 백성들을 보호하라고 외쳤다.
이 싸움에 백성들이 피해를 볼 일은 없어야 했으니 말이다.
화르르르!
화마(火魔)가 집 전체를 곳곳을 덮치고, 그 불씨가 또 다른 집을 태우기 시작했다.
점점 불은 걷잡을 수 없는 형태로 번져갔다.
한쪽에서는 불을 끄기 위해 달려 나왔고, 다른 한쪽에서는 군사와 싸우고 있었다.
대체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져 버렸다.
“으아아아!”
“으아!”
몸에 불이 붙은 백성들이 집안에서 뛰쳐나왔다.
“…….”
정중부도 현재 이런 상황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 일단 피하시고! 다음 방어선으로 가시지요!”
“예! 그렇게 하십시요!”
“문하시중, 정 장군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정중부의 측근들 역시나 이곳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는 상황이었다.
곳곳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본 정중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퇴각하라! 2차 방어선으로 가라!”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헷갈리는 상황 속에 흥위위는 무조건 갑주를 입고 흥위위 표식이 없는 군사들만 죽여 나갔다.
“뭐해! 이놈들아! 어서 옮겨!”
박존위는 사병들에게 명을 내리면서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검차들을 밀어라.”
“예!”
“검차들을 밀어 치워라!”
천시호는 큰소리로 외쳐서 명을 내렸다.
다른 부장들이 뛰쳐나가 소리치면서 천시호의 명을 복창했다.
이영령은 말 위에 올라타서 이의방의 명을 기다렸다.
이의방의 허락이 떨어지면 기병을 이끌고 치고 나가 정중부를 치려는 생각이었다.
시가지에서 기병을 쓴다는 것은 무모하다고 분수 있었지만, 승기를 제대로 잡은 흥위위이니, 상관없다고 판단한 이영령이었다.
* * *
한편.
정중부는 경진에게 명을 내렸다.
“황궁으로 들어가서 방어할 것이네! 자네가 길을 열고, 태자비를 끌어 내리게! 개경으로 군대가 올 때까지 버텨야 할 것이네!”
“예! 문하시중!”
경진은 정중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장 부장들과 군사를 이끌고서 황궁으로 향하였다.
정중부는 경진을 이용하여 경대승을 제압하려는 생각이었다.
자식이 어찌 아비에게 칼을 겨누겠는가.
그러하니 경진을 보내는 것이다.
“이야아아!”
푸욱!
정중부가 앞에서 소리치면서 달려드는 군사의 창을 부여잡고서는 그대로 군사의 목덜미에 검을 쑤셔 박았다.
창을 빼내자, 피가 정중부 얼굴과 갑옷에 튀었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정중부는 소리쳤다.
“막아라! 역적 놈들이다!”
푸푸푹!
한쪽에서는 치열하게 막고, 또 한쪽에서는 공격했다.
애꿎은 백성들만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다.
정중부, 이의방의 싸움을 말릴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 * *
“네 이노옴! 문을 열라고 하지 않느냐!”
“그럴 수 없사옵니다!”
경진과 경대승이 마찰을 빚었다.
경진은 당당하게 이들 앞에 다가와서는 황궁 문을 열라 하였고, 경대승은 그럴 수 없다며 완강하게 버티었다.
그래도 경진이 경대승의 아버지라는 것을 아는지, 군사들과 부장들은 창과 검을 함부로 들이대지 않았다.
“비키거라… 비켜야 한다.”
“…….”
앞에서는 황제가 나무라고 이번에는 아버지가 길을 열라며 말을 하고 있으니, 경대승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난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경진에게 길을 비켜준다고 한다면 황제는 자신의 충심을 알아주기는커녕 자신을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었고, 오히려 자신을 더욱더 멀리할 게 뻔했다.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면 경대승은 검을 뽑아 아버지를 겨누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검을 들이대는 자식이 어디 있던가.
촤아아앙!
경대승은 두 눈을 꽉 감고서 경진에게 검을 겨눴다.
이에 경진은 깜짝 놀랐다.
“아버지!”
뒤에 있던 경대승의 아우, 경우민 또한 깜짝 놀랐다.
장인 이소응이 이의민에게 죽으면서, 경우민는 아버지와 함께하며 이의방을 견제하고 있었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려고 하는 경대승이 참으로 답답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아버지에게 검을 겨눈 경대승을 본 경우민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네 이놈! 아비에게 뭐 하는 짓이냐! 썩 검을 거두지 못할까!”
“송구합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막아야겠습니다.”
“이노오오옴!”
경진은 소리쳤고, 허승과 김광립은 경진의 팔을 붙잡았다.
“정중히 모시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경진은 허승과 김광립에게 어디론가 끌려가면서도 자포자기한 듯이 두 눈을 감고서 저항하지 않았다.
경대승은 아우 경우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이제 어찌할 것이냐?”
툭!
경우민은 대답 대신 검을 바닥에 내 던졌다.
형과 검을 맞대고 싶지는 않았다.
만일 검을 맞댄다고 하더라도 형을 벨 자신이 없는 경우민이었다.
“형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장군, 가시지요. 가서 정중부를 우리 손으로 잡으시지요!”
김자격의 말에 경대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게. 우리는 이의방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아우야, 검을 다시 들고 앞장서거라! 황실을 어지럽힌 정중부를 잡을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서방님, 뭐 하시는지요…….”
“살려면 뭐든지 해야 할 것이 아니오.”
정중부의 두 번째 사위 왕규가 급하게 재물들을 챙기고 있었다.
이의방이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한 왕규는 어떻게든 살려고 하였다.
왕규는 이지무의 딸과 혼례를 올린 적이 있었다.
의종을 복위하려 일으킨 김보당의 난에 이지무의 아들, 이세연이 관련되었다고 하여 이의방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왕규는 이지무를 버리고, 정중부에게 부탁해서 과부가 된 정중부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이때, 이의방과 정중부가 다시 싸움을 벌였다.
승패가 예상되는 이상, 어떻게든 당장 살 궁리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콰앙!
문이 박살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정중부의 가솔(家率)들을 모조리 끌어내라!”
이의방의 목소리가 들렸고, 군사들이 곳곳을 뒤지는 소리가 났다.
이에 노비들은 혼비백산하면서 소리를 질러 대었다
콰앙!
“서방님…….”
어찌할 줄도 모르고 덜덜 떠는 정씨였다.
점점 군사들이 가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