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고수전쟁(1)
182화 고수전쟁(1)
고정의는 볼을 긁적이며 을지문덕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의구심이 잔뜩 담겨 있었다. 이를 느낀 을지문덕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송구합니다. 대인께 먼저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 아닐세. 나는 그냥 온 것이니 매사 상황을 전해줄 필요는 없네. 그러니 말해주겠나? 어째서 퇴각을 미루는 것인지에 대해서. 저들이 아군의 후미를 공격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인데 말일세.”
고정의는 직접 협상을 마무리했기에 수나라의 절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절대로 허튼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수나라는 그럴 상황이 아니지요. 다만, 소장은 변수를 대비할 뿐입니다.”
“변수라니? 발생할 수 있는 변수가 있다고 여기는가?”
“만일, 수나라군이 아파가한을 격퇴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필시 고경은 말머리를 북평으로 돌릴 것입니다. 소장은 이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허.”
고정의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 한 음절이었는데 가장 앞서는 건 놀라움이었다.
“자네 참으로 신중하군.”
“송구합니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오가다 보니 이리되었습니다. 대인께서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아닐세.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 나는 진심으로 자네의 신중함에 감탄한 것일세. 참으로 옳은 판단이네. 암. 대군을 지휘하려면 응당 그리하는 게 옳은 것일세.”
진심 어린 고정의의 칭찬에 을지문덕의 얼굴은 다소 붉어졌다.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고정의는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부마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돌궐이 패배하면 좋겠다고 하셨지요.”
“······.”
“수나라의 10만 대군과 혈전을 펼치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일세.”
“하하하······.”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심 어린 말에 을지문덕은 멋쩍게 웃었다.
고정의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부마의 용맹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됐네. 어쨌거나 사안은 자네가 알아서 잘하리라 믿겠네. 하면, 나는 쉬겠네.”
“예? 대인께서 계셔야지요.”
“알아서 하게. 알아서. 내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젊은 자네가 전면에 서야지. 난 자야겠네. 너무 피곤하네.”
“······.”
고정의는 정말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을지문덕은 당황하여 눈을 껌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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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은 순탄하게 마무리되었으나 고경은 고구려를 신뢰하지 않았다. 물론, 작은 믿음이라도 얻을 단서가 있었다면 모를까 사정상 도저히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철군은 시작했으나 철저한 경계를 하면서 이뤄졌기에 속도가 빠를 수는 없었다.
“지독한 나라가 아닐 수 없소.”
“······.”
고경이 분통을 터트렸고, 장손람은 할 말이 없다 보니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협상이 마무리되었는데도 고구려군은 여전히 지척에서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북평으로 철군하면 참으로 좋을 것인데 지척에서 노려보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겠소이까. 최대한 경계하면서 물러나야지요.”
“그래야지요. 그러나 언젠가는 이 수모를 반드시 갚을 것이외다. 기필코 그리할 것이오.”
“물론이오. 응당 그리해야 하오.”
두 사람은 이를 악물며 고구려를 욕했다. 천하를 도모하려던 수나라의 관리로서 훗날을 기약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대로면 얼마나 걸리겠소?”
“10만 대군이 뒤를 경계하면서 물러나고 있소.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소. 다만, 황도의 안위를 우선해야 하는 것이니 선봉을 따로 꾸려 속히 이동시켰소. 그러니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오.”
고경은 명장이라고 불리는 만큼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해둔 상태였다. 그의 말대로 황도가 돌궐에게 위협당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하게 고구려를 탓하는 대화가 이어질 때였다. 멀찍이서 황급히 달려오는 사만세가 보였다. 이미 선봉으로 떠났을 그가 여기까지 직접 왔다는 사실은 어떤 사유로도 좋게 여길 수 없었다. 이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고경과 장손람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인!”
“대체 무슨 일인가?”
“화, 황명입니다.”
“황명? 설마 황도에 변고라도 생긴 것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틈을 노려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황명입니다.”
“뭐······?”
황급히 황제의 어지를 확인한 고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손람 역시 믿을 수 없었기에 내용을 곧장 확인했다.
“허.”
“허.”
두 사람은 내용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있을 권위가 아니었다.
“돌궐의 분열이라.”
“좋은 소식이지만 너무 부담감이 크오. 자칫 잘못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소.”
“음.”
고경 역시 장손람의 말에 동의했으나 섣불리 의견을 꺼낼 수가 없었다. 돌궐의 대카간이 아파가한을 공격할지라도 시기에 따라서 황도가 공격에 노출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진나라를 방비하던 병력을 부른다고 할지라도 이동하는 시일이 짧은 것도 아니었다.
즉, 황도를 둘러싼 불운한 정세는 전혀 해소된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데 이토록 공격적인 황명은 쉽사리 따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여 항명할 수도 없었기에 고경과 장손람은 난처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황명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머뭇거리는 두 사람을 향해서 사만세가 강력한 어조로 재촉하듯 말했다. 고경은 굳은 안색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의 말대로 어찌 황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폐하께서는 황명에 어디까지나 지휘관인 나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이르셨네. 고구려를 공격하는 시기와 방법 모두 내가 결정한다는 걸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건······.”
“다시 말해야 하나? 고구려와 정면 대결을 명하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네. 하면, 시기를 살펴야 하며 적을 방심토록 해야 하기에 시일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네. 나와 장 대인이 그새 돌궐의 불미스러운 움직임이 걷잡을 수 없을 가능성을 우려하는 걸세.”
불쾌함마저 담긴 고경의 말에 사만세는 아차 했다. 자신이 너무 무례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어쨌거나 전장에서의 판단은 고경의 몫이었다.
“송구합니다. 대인. 소장이 결례를 범했습니다.”
“되었네. 하면, 선봉 부대의 진군은 멈춘 것인가?”
“그렇습니다.”
“휴. 섣불리 행동했네. 고구려군 역시 퇴각하지 않고 아군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고 있으니 말일세. 일이 복잡하게 됐군.”
“설마 선봉 부대의 움직임까지 살필 수 있겠습니까.”
“억측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을 공격하라는 황명이 내려진 이상 하나부터 열까지 살펴야 하는 것이네.”
“소장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고경은 한숨을 쉬면서 복잡하게 흘러가는 전장을 되새겼다. 장손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 대인의 생각은 어떻소?”
“이대로 돌격할 수는 없소. 그건 자멸이외다. 시일이 걸리더라도 고구려군의 눈과 귀를 속이는 게 옳소.”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그래서 철군을 빠르게 진행하는 게 어떻겠소이까.”
“음. 그리하면 고구려군도 철군을 시작하겠구려. 이때를 노리자는 말이오?”
“그렇소.”
현재로서는 가장 합당한 의견이었다. 장손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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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군의 전격적인 철수 소식은 빠르게 고구려군에도 전해졌다. 긴장한 상태로 적진을 살피던 을지문덕의 얼굴에는 여유가 감돌았다. 모처럼 가벼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대인. 이제 철군하면 될 듯합니다.”
“하하하. 자네 웃으니까 참으로 보기 좋군.”
“이런. 송구합니다.”
“뭐가 그렇게 매번 송구한가. 그나저나 부마께서는 또 어디에 계시는가.”
“수나라군의 발 빠른 퇴각에 비통해하고 계십니다.”
“······.”
고정의는 입맛을 다시며 잠시 먼 산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이성을 되찾으며 말했다.
“저들이 갑자기 퇴각을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돌궐의 공세가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음. 그 외에는 없겠지?”
“왜 그러십니까. 뭔가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그건 아닐세.”
고정의는 무언가 찝찝한 표정을 지었으나 더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돌궐의 공격이 거세니 퇴각하는 게 맞겠지. 한데, 왜 이리 속이 복잡한 것인지 모르겠군.’
무엇인지 정확하게 떠올리지는 못했으나 분명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불분명한 것이었기에 괜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근거가 없는 말은 혼란을 가중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내가 군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니 문덕의 판단에 힘을 실어줄 필요도 있겠지.’
그 역시 을지문덕의 성장이 반가운 입장이었기에 의구심은 생각으로만 그쳤다.
“하면, 우리도 퇴각을 서두르지.”
“예. 대인.”
“고생하게. 난 쉬겠네.”
“······.”
나른한 표정으로 하품하던 고정의가 대뜸 물었다.
“아. 혹시 일거에 퇴각할 건가?”
“아닙니다. 분군해야지요.”
“음. 그래. 자네의 뜻대로 하게. 난 가겠네.”
“······.”
그랬는데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적의 선봉은 어디쯤인지 아는가?”
“송구합니다. 거기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음. 지금쯤이면 멀리 갔겠지?”
“필시 그러할 겁니다.”
“하면, 됐네. 그러면 진짜 쉬러 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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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를 부리며 말을 끌던 고정의는 이미 몇 번이나 하품했다. 생각 이상으로 전선의 복잡한 문제가 잘 해결되었기에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철군 전후로 찝찝함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나 현재까지 아무런 탈이 없었기에 마음은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분군한 병력의 선두를 이끌었기에 더 여유로웠다. 머지않아 북평에 당도할 것이니 며칠 푹 쉬어볼 생각이었다.
“이대로 마무리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홀로 내뱉은 짧은 말에 그의 평화로운 마음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랬다.
그랬는데
“······.”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고정의의 눈이 가늘어졌다.
“······.”
아직 정체를 확인한 건 아니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고정의는 순식간에 단 한 가지의 결론을 내렸다.
“적군이다! 전군 방어 태세를 갖춰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나라군이 모습을 보였다. 대체 어찌하여 저들이 이곳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정의가 가장 중시한 건 저들이 보이는 명백한 살의였다.
협상은 파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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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은 숨 쉬는 시간조차 아끼면서 창을 휘둘렀다. 잠시라도 여유를 부렸다가는 끔찍한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온몸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없이 몰려오는 적은 전군의 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평생 강대한 적을 상대했고, 소수로 대군을 격멸하기도 했으나 이번은 상황이 달랐다.
적은 너무나도 많았고, 지금껏 상대한 그 어떤 적보다 강한 정예군이었다.
피 칠갑을 한 온달이 이를 악물고 앞을 바라봤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진군했다.
그는 그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곧 모든 명령이었기에 전군이 달려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