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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81화 (181/199)

181화 새로운 국면(2)

181화 새로운 국면(2)

순탄한 외교 협상이었으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늘 여유롭게 상황을 이끌던 을지문덕이었으나 난처함을 차마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불평이나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상황을 유발한 사람이 바로 고정의였기 때문이었다.

“대인.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가한이 우리를 지원하겠다고 하여 그러라고 했네.”

“아.”

1,000여 명의 수준이었으나 분명하게 돌궐의 병력이었다. 말 그대로 돌발 상황이었다. 을지문덕은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고정의는 그를 쓱 보면서 말했다.

“음. 전혀 반겨주지 않는 자네를 보니 사정이 있는 게 분명하게. 그래. 말해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그것이······.”

을지문덕은 현재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고정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돌궐의 병력이 등장해서 협상력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게 된 것이군.”

“그렇습니다. 수나라도 본국을 신뢰할 수 없다며 나설 것이니 말입니다. 어떻게든 이 논리를 해결하지 않으면 탈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 아파가한의 공세를 막고자 협상에 나선 수나라였다. 그런데 고구려군이 돌궐군과 연계하는 상황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으니 제대로 협상이 이뤄질 수는 없었다. 상황이 아예 바뀐 것이다.

“음. 이런 경우가 있나. 내가 실수했군. 저들을 장성 밖에 배치했어야 하는데. 생각이 짧았어.”

“아, 아닙니다. 그저 상황이 매끄럽지 않을 뿐입니다.”

“아. 자네를 탓하는 말이 아니었네. 진정하게. 자네가 그럴수록 내가 더 난처하다네.”

고정의는 손을 내저으면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면서 고민을 이어가듯 미간을 더 살짝 찌푸렸다.

“애석하게도 수나라 역시 돌궐군의 등장을 알았겠지? 지금 서둘러 뒤로 물린다고 하여 효과가 없겠지?”

“그렇습니다. 그들 역시 아군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을 겁니다.”

“음. 그렇군.”

고정의는 볼을 긁적이면서 입맛을 다셨다. 을지문덕을 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군. 이보게. 혹시 내가 협상에 나서도 되겠나? 혹시 안 된다면 말하게.”

“어찌 반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네가 책임자이니 동의를 구해야지.”

을지문덕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막리지이십니다. 왕명이 아닌 이상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데 어찌 그러십니까.”

“아. 자네의 능력을 그만큼 신뢰하는 걸세. 그래서 다시 묻겠네. 내가 가도 탈이 없겠나? 아. 미리 말해야겠군. 협상을 이대로 마무리할까 싶네.”

을지문덕은 의아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대인. 본국이 더 많은 걸 확보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돌궐의 개입으로 입장이 난처하긴 했으나 여전히 주도권은 우리 손에 있었습니다.”

“아닐세.”

고정의는 단호했다.

“적은 10만의 대군일세. 적장 고경 역시 명장이네. 억지로 붙잡고 있으면 결국 큰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네. 저들은 우리가 돌궐의 원군을 기다리느라 시일을 끌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으니 말일세.”

“하지만, 이참에 수나라의 힘을 최대한 줄이는 건 더 중요합니다.”

“싸워서 이긴다 한들 피해가 클 것이네. 물론 전쟁하면서 어찌 피해를 두려워하겠나. 그저 큰 변수가 생겼기에 이리했을 뿐일세.”

“변수라고 하셨습니까.”

“대카간이 수나라와 손을 잡으려고 한다네.”

“예······?”

“어떤가. 이만하면 우리도 수나라와 휴전을 체결해야 하지 않겠나?”

아무리 돌궐의 처지가 우스워졌다고 할지라도 대카간은 수십만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북방의 패자였다. 만일, 대카간이 허튼 생각을 한다면 고구려도 국운을 걸어야 했다. 더불어 무조건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정의는 짧게 말했다.

“문덕. 지금부터 아군은 모든 군사적 역량을 북방에 집중해야 하는 걸세. 그저 아파가한이 수나라를 최대한 오래 붙잡아두길 바랄 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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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한 건 아니었으나 돌궐군의 등장이라는 건 심각하게 바라봐야 할 부분이었다. 어쩌면 회담을 더 이어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장손람은 잔뜩 화가 나서 따지고자 했으나 상황에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막리지 고정의라고 하오.”

을지문덕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았던 거물이 나타난 것이다. 장손람이 멈칫하는 사이 고정의의 말이 이어졌다.

“아주 초면은 아니지요?”

과거 고구려 외교 당시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를 언급한 고정의가 말을 다시 이었다.

“상황이 변했소. 어떻소? 논의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지요?”

“가장 중요한 내용을 배제했다는 건 고구려가 돌궐과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오? 돌궐군이 나타났는데도 말이오?”

“그렇소.”

“나는 쉽사리 믿을 수가 없소. 애초 협상 이후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으나 돌궐군이 지금 포착된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외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만일 그런 생각이었다면 요구를 다 수용하고 벌써 협상을 끝냈을 것이오. 내 말이 틀렸소?”

“음.”

“협상에서 불필요한 상상력은 지루함을 더할 뿐이외다.”

고정의의 말을 모두 신뢰할 수는 없으나 당장 협상을 취소할 게 아니었기에 장손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귀공이 어떤 제안을 하는지 들어보겠소.”

“간단하오. 수나라군의 안전한 퇴각을 보장하겠소.”

“내 말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셨소? 내가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시오.”

“답답하구려. 보시오. 고구려도 평양계와 국내계로 분열되었다고 믿지 않으셨소? 한데, 어찌하여 돌궐의 분열은 상상하지 않소? 이거 참으로 서운하오.”

“이보시오. 지금 그게 무슨······.”

수치스러웠던 기억을 떠오르게 하자 장손람의 안색은 대번에 굳었다. 그러나 찰나 고정의의 말에 담긴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조롱하려는 의미만 담긴 게 아니었다.

“혹시 돌궐의 분열을 이용하자는 것이오?”

“하하하. 그건 귀국이 알아서 해야지요. 구태여 우리가 그렇게 심오한 논의까지 할 이유가 있소? 어차피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는 험악한 관계인데 말이외다.”

대 돌궐 외교는 각국의 사정에 따라 알아서 진행하자는 의미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정책이나 전쟁의 과실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으니 말이었다.

“우리는 이 상황을 정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겠소?”

고정의는 손을 내저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여유로움이 가득 담긴 행동이었다.

“이대로 휴전하는 게 양국 모두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이라고 생각하오. 공의 생각은 어떻소?”

“좋소. 거부할 이유가 없소.”

“우리는 수나라가 북평을 포기할지 의문이고, 수나라는 아군이 공격하지 않을지 의심하는 상황이오.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휴전은 참으로 흥미롭겠구려.”

“언젠가는 다시 창칼을 마주하겠지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여기까지요.”

“좋소.”

두 사람은 협상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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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찰은 이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고구려에 원군을 보내다니요.”

“진정하게.”

“대카간께서 이를 넘기시면 위계가 완벽하게 무너질 겁니다.”

“음.”

“당장 사람을 보내서 문책해야 합니다.”

“문책? 그 뒤에는 어쩌자는 건가.”

스산한 눈빛과 마주친 지근찰은 멈칫했다. 흥분해서 말이 너무 어긋나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처라후와 정면 충돌해야 한다거나 벌해야 한다는 말은 삼가야 했다.

지근찰은 곧장 자세를 낮췄다.

“송구합니다.”

“자네의 생각은 잘 알겠지만 과하게 나서지는 말게.”

아나사 섭도도 더 문제 삼을 생각이 없는 듯 한숨을 쉬면서 말을 돌렸다.

“수나라에 사람을 보냈으니 답이 올 것이네. 그리고 가한의 일도 해결하긴 해야겠지.”

“······대카간께서 수나라와 손을 잡겠다고 선언했는데 취한 행동입니다. 의도를 좋게만 바라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일단 아파가한은 이대로 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눈치를 보던 의연이 현재 논의중인 사안과는 다른 문제를 언급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오? 아파가한을 그냥 두자는 말이오?”

“대인. 현재 상황이 그렇습니다. 내부에서 분열의 싹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대한 취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아파가한은 품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의연은 최선을 다해서 상황을 교란하고자 했다. 어차피 지금은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의 진흙탕이었다.

‘더욱이 본국이 처라후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면 이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해.’

그렇다면 돌궐의 중심에서 혼란이 가중되게 하는 게 가장 합당했다.

“아니외다. 그건 곤란하오.”

지근찰은 더 길게 고려하지 않고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의연은 잔뜩 긴장하며 자세를 낮췄다. 현재 자신의 위치에 가장 걸맞은 태도였다. 그리고 이미 논의의 화두가 바뀌었기에 어떤 결과가 나와도 꼭 나쁜 건 아니었다.

“생각해보시오. 결국은 모두 돌궐의 일이외다. 이대로 바라만 보고 있으면 천하가 비웃을 것이오. 확실하게 나서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오.”

의연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지근찰은 아사나 섭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라도 출병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합니다.”

“나 역시 대라편을 그냥 둘 생각이 없었네. 이번에 확실히 제압할 것이니 돌궐의 모든 병력은 내 명령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어차피 수나라는 우리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어느새 처라후는 언급되고 있지 않았다.

‘대카간은 자신의 후계이니 언급하기 어렵고, 지근찰도 더 말하는 건 부담스럽겠지. 자연스러웠다.’

의연은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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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의 안색은 모처럼 환했다. 최악과 최악의 상황만 발생했는데 좋은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폐하. 진나라가 북진을 멈췄사옵니다. 파악한 바에 의하면 진의 황제가 반대했사옵니다.”

양견은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으나 기쁨을 숨기지도 않았다. 가뭄의 단비라는 건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대카간이 보낸 밀사에 의하면······.”

아파가한 대라편을 제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하게도 세폐를 요구했으나 고려할 필요도 없이 동의했다. 수나라가 가장 원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현재 아파가한의 공세는 어찌 되었소?”

“최대한 차단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한계에 봉착하고 있사옵니다.”

양견은 입술을 잘게 깨물며 고민을 이어갔다. 최근 발생한 여러 상황은 앞으로 수나라가 어떤 행보를 취해야 할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더불어 어떤 한계가 있는지도 알려주었다.

이렇게 협상과 외교로만 상황을 종결한다면 수나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진나라를 방비하던 병력을 돌궐 전선으로 보내시오.”

“폐하······?”

“또한, 고구려 전선에 사람을 다시 보내시오.”

“폐하.”

“상황을 살핀 뒤 고구려를 기습하여 도륙하라고 하시오.”

“······.”

전선은 거대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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