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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76화 (176/199)

176화 세계대전(6)

176화 세계대전(6)

대카간 아사나 섭도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불쾌감과 당혹감이 범벅되어 있었다.

감히 처라후가 반기를 들었다고 여겨져 불쾌할 것이며, 급소를 찌르는 듯한 요구와 불필요한 분란의 발생이라고 여겼기에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의연은 지금 일생일대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미치겠군. 나를 쇄환하지 않았기에 이계찰을 걸고넘어지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다가 아사나 섭도가 나를 어찌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왕고덕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아니, 무슨 정신으로 밥을 먹고 있나!’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생명의 위기에 봉착하는 순간 막리지는 한낱 왕고덕에 불과한 것이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마른침을 넘기다 보니 목울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물론, 절대로 섣불리 나서지는 않았다. 대카간이 여기까지 와서 노기를 터트리고 있을 때 말을 보탠다는 건 확실한 미친 짓이기 때문이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나? 이 일을 어찌 수습할 건가?”

“아······.”

“하. 대책이 없군. 대책이. 내가 이래서 섣불리 행동하지 말자고 한 것이네.”

“······.”

지근찰은 고소를 삼켰다.

잠시 잊고 있었으나 대카간 아사나 섭도는 늘 이런 식으로 책임을 떠넘겼다. 더욱이 외부의 심대한 도발도 아니고 내부의 작은 사안에 불과하거늘 이런다.

지난날, 용맹하고 빠른 판단력의 가한들과 비교했던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었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당장 아파가한의 독단적인 행동을 해결해야 합니다.”

지근찰이 괜히 말을 돌린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회피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현재 돌궐의 정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파가한의 수나라 공격이었다. 절대로 이계찰이 아니었다.

아사나 섭도는 멈칫하더니 오만상을 찌푸렸다. 뒤늦게 사안의 선후를 파악한 것이었다.

“수나라 공격은 이미 발생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분명하게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아파가한을 지원할 것인지 막아설 것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는 돌궐의 명운을 좌우할 일입니다.”

“······.”

“또한, 어떤 결정을 내릴지라도 가한에게 비상한 시국이라는 걸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퇴로를 찾을 수 없는 원론에 아사나 섭도는 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여기서 억지를 펼치면 꼴만 더 우스워진다는 걸 알고 있거니와 아파가한 대라편을 어찌할지 한시라도 빨리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네 생각은 어떤가.”

결정을 회피했다.

“진압하면 돌궐이 분열될 것이며, 관망하면 권위가 무너질 것이며, 함께 하면 과실을 분배에 탈이 날 겁니다. 지금은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지근찰은 말을 끝내면서 의연을 슬쩍 쳐다봤다.

“어떻소? 대사에게 묘안이 있소?”

“방금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만약, 요동과 북평의 고구려군이 태왕의 동의 없이 수나라 정벌을 감행했다면 어찌 되었을지 말입니다. 아무리 승전을 거듭하고 있었을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벌했을 것이라는 말이오?”

“돌궐과 고구려의 사정이나 체계가 다르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같은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일개 부족을 제압하는 것과 수나라는 다릅니다. 소승은 이를 벌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의연의 말을 얼핏 들으면 옳지만, 정확하게 따지면 상당한 모순을 품고 있었다. 돌궐의 가한이 가진 권한은 생각 이상으로 크고 독자적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건 어떻게 문제 삼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아예 다르게 도출될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의연은 이 부분을 유독 확대하여 꼬집은 것이었다.

“대사의 말이 옳습니다. 아파가한을 견제하는 게 옳습니다.”

“만일, 내키지 않으면 온 힘을 다해 수나라 정벌에 나서는 방책이 차선입니다. 현재 수나라는 고구려와 전쟁까지 치르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처지이니 말입니다.”

“아아. 그건 아니오.”

함께 보조를 맞추던 지근찰이 고개를 저었다. 의연이 의아하여 쳐다보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이니 아주 급하지 않겠소? 대카간께서 나선다면 더 위태로울 것이외다. 하면, 어찌하면 되겠소이까.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유려한 외교가 아니겠소?”

의연은 지근찰의 혀가 참으로 뱀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계찰을 제압한 이후 참으로 노련하게 정국을 운영하였는데 그 방법이 놀라울 정도였다.

설마 이 국면에서 수나라와 재차 협상을 주장할지는 몰랐다.

‘분명 상황에 따라서 수나라 공격도 감행할 수 있다고 했다. 한데, 이토록 유리한 국면을 맞이했는데도 외교에 나선다. 참으로 당황스럽구나.’

그리고 이유도 짐작이 됐다.

‘지근찰은 어떤 큰 목표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분명 일국을 좌지우지할 능력은 있으나 우직하게 하나를 추진하지 않는다. 매사 임기응변에 의존하고 사안마다 틈새만 찾으니 큰 결과물을 도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건 돌궐의 국세를 폭발적으로 팽창시키기보다는 개인의 정치적 입지와 권력의 강화로만 귀결될 뿐이다. 눈앞에서 보듯 대카간조차도 우물쭈물하는 건 그간 이어진 모든 결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어떻습니까. 이번에야말로 수나라 황제를 확실하게 압박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으나 그는 신뢰를 잃었네. 쉽사리 믿기 어렵지 않겠나?”

“그걸 해내는 것이 외교입니다.”

눈알을 굴리며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던 의연은 결심을 굳힌 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의아하군요. 소승이 알기로는 분명 수나라 황제가 대카간께 세폐를 바쳤습니다.”

“대사. 그게 무슨 말이오?”

“아파가한에게 전해 들은 내용이었습니다. 분명 수나라 황제가 세폐를 그리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 내용을 왜 이제 말하오?”

“소승이 따로 전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일이니 말입니다.”

틀린 말이지만 옳은 말이기도 했다. 정상적인 체계였다면 의연이 이런 내용까지 따로 보고할 이유는 없었다. 돌궐의 내부에서 알아서 움직여야 할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아파가한이 중간에서 가로챈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결과로다.”

“소승도 지금 상황을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참으로 당혹스럽군요.”

지근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볼을 씰룩거렸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눈동자가 대카간을 담아냈다.

“이는 명백한 반기입니다. 지금 대카간께서 누구를 신뢰해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음.”

“여기서 더 지체하시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 자네의 말이 옳군. 아파가한이 내게 반기를 든 것이야. 당장 출병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니 즉각 수나라와 외교를 진행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의연은 안도했다.

이토록 엄중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처우에 대해서 제대로 논의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만, 의미심장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지근찰의 눈동자를 미처 확인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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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은 헛웃음을 지으며 옆을 바라봤다. 자연스레 부관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온달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렇게 쳐다보나?”

“소인은 부마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말하지 말게. 듣고 싶지 않아졌다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계속 소인을 쳐다보시는 걸 보니 소인의 속내가 무척이나 궁금하신 겁니다.”

“거참.”

온달은 피식 웃으면서 입맛을 다셨다.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내 속내를 파악했으면 알아서 말을 꺼내야지.”

“그래도 부마께서 허락하셔야죠. 하하하. 일전에 부마께서 수천의 병력으로 수나라의 수만 대군을 가로 막았을 때를 떠올리시는 거 아니십니까?”

“큭.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나? 아주 정확하다네.”

요격에 나선 온달의 병력은 1만 명이었다. 한데, 적의 선봉은 2~3천여 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온달은 과거 자기 행동을 본 수나라군이 얼마나 황당했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단지 정찰이라고 보기에는 많고, 선봉이라고 보기에는 적지. 한데, 어처구니가 없는 건 적의 본군이 10만여 명이라는 걸세.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자세한 건 모르지만 미친 짓이라는 건 분명하지요. 우리 앞을 고작 2천여 명으로 가로막다니 말입니다. 심지어 숨지도 않습니다.”

“혹시 유인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나?”

“그러면 유인 안 되실 겁니까?”

“그럴 리가 있는가.”

온달은 피식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얼마든지 유인책에 떠밀려줘야겠지.”

물론,

“매복에 대비하여 깊게 따라갈 수는 없다. 이는 명심하라.”

어디까지는 유인이 되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온달이라고 할지라도 사지를 일부러 들어가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늘을 향했던 그의 손이 적군을 가리켰다.

“도륙하라.”

1만 명의 경기병이 진군을 시작했다. 그들의 활이 유독 날카롭게 기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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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해장유는 황당했다.

적을 유인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나서긴 했는데 마주하자마자 득달같이 돌격해올 줄은 몰랐다. 이건 매복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미친놈이었군.”

고구려 부마 온달의 명성은 익히 들었는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저돌적인 행동과 마주하니 욕설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고구려군의 행동은 자신으로서는 손해 볼 게 없었기에 여유롭게 외쳤다.

“교전에 응할 필요는 없다. 곧장 퇴각한다.”

어차피 적은 적당하게 쫓다가 물러설 것이다. 이렇게 몇 번 반복하면 적장 온달을 완벽하게 고립시켜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피식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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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을 보필하던 부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적이 퇴각합니다.”

“따라오라고 유혹하는 것 같지 않나?”

“소인의 생각은 이미 중요하지 않군요.”

부관은 오랫동안 온달과 전장을 누볐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할 때 온달은 어지간해서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다. 게다가 결정은 철저한 분석보다는 전장에서 발생하는 사태를 보고 본능적으로 판단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놀랍게도 모두 승전으로 귀결되었다.

“적을 끝까지 추격하겠습니다.”

“그리하게.”

수나라군을 추격하던 고구려 기병의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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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해장유의 미간을 잔뜩 찌푸려졌다. 그의 귀로 부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고구려군의 추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

적당히 추격하다가 물러설 줄 알았는데 집요할 정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당혹스러웠다.

“교전해도 승산은 없다. 더 속도를 내어 물러나도록 한다.”

그런데 문뜩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고구려의 기병은 개마가 아니었다. 빠른 기동력과 활 공격을 활용하는 경기병이었다. 그들은 늘 넓은 포위망을 구축하여 화살을 날린다.

한데, 현재 고구려군은 쫓아오기만 했다.

달해장유는 이 부분이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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