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고조되는 전운
145화 고조되는 전운
고구려군이 만리장성을 넘어서 북평을 점령했다. 고구려 천 년사에 이보다 더 크고 위대한 쾌거는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랬다.
쾌거, 이보다 적합한 단어는 없었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신하들의 입에서는 진심이 가득 담긴 말들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고양성도 기쁨을 숨기지 않고 호탕하게 웃었다. 다시 말하지만, 쾌거라는 단어가 부족할 정도로 기쁜 일이었기에 마음껏 축하하고 기뻐해도 부족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참이나 웃음을 주고받은 뒤에나 고양성이 먼저 냉정을 되찾았다.
“지금부터가 중요하지 않겠소?”
“그렇사옵니다.”
온달과 을지문덕의 놀라운 활약으로 순식간에 북평을 점령했기에 얼핏 보면 가벼운 일처럼 여겨질 수는 있다. 그러나 이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고구려 본토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천년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라는 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점령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유지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수나라의 대대적인 반격이 예상되었으니 상황은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이를 상기하게 되자 모두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역시 가장 먼저 나선 건 고정의였다.
“폐하. 오롯이 우리의 영토로 삼기 위해서는 북평 인근의 요충지를 모두 취해야 하옵니다. 그래야만 수나라의 반격도 효과적으로 방비할 수 있사옵니다.”
“고 막리지의 말이 참으로 지당하오. 단지, 북평만 취하였다고 하여 어찌 모든 걸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소이까.”
“폐하. 신이 사료할 때 이는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옵니다.”
대뜸 고흘이 끼어들었다.
심지어 입가에 미소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단지 요충지 몇 곳을 확보하는 건 부족하옵니다. 신이 백번을 생각해봤사옵니다. 적의 반격을 앉아서 기다리기 전에 공세를 취하는 것이 옳사옵니다.”
“음. 장군. 우리가 기주를 모두 취할 수는 없소. 북평이 서진 한계선이외다.”
“폐하. 신이 나설 것이옵니다.”
돼지 떼를 이끌고 돌궐에 다녀온 이후 고흘은 더 정정해졌다. 그러니까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호전적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고양성도 보통은 아니기에 자연스럽게 고흘의 말을 넘겼다.
“다른 의견 없소? 아. 고 막리지. 조금 전에 말이 끊긴 것 같소만.”
“아.”
“음?”
고정의는 고흘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흘 장군의 말처럼 먼저 공세를 취하는 게 나쁘지 않사옵니다.”
“고 막리지까지 왜 이러시오?”
“그것이 아니오라 기주 전역을 대상으로 약탈을 감행하는 것이옵니다.”
“약탈이라고 하셨소? 역량이 분산될까 우려되오만.”
“그게 아니옵니다. 대대적으로 약탈하여 가축 따위를 신속을 청한 북평의 백성에게 나눈다면 어찌 민심을 잃겠사옵니까.”
대체 그들이 언제 신속을 청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바람직한 의견이었다.
아니, 애초에 적의 영토를 약탈하여 점령지의 민심을 다독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다.
“폐하. 이리한다면 기주 전역에 아군의 위력을 다시 확인시키는 것이옵니다.”
“연달아 패배한 저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겠구려.”
“그러하옵니다. 신은 이번에 확보한 영토를 기어이 우리의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여기옵니다.”
“하하하! 고 막리지의 말이 참으로 옳소. 영원히 우리의 영토로 삼아야 하오.”
“하하하! 과연 그러하옵니다!”
상상만 해도 행복했는지 다시 축제 분위기가 시작됐다. 그때 연자유의 차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폐하.”
분위기 파악이라고는 전혀 하지 못하는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신이 사료할 때 1년이 중요하옵니다.”
“1년이라고 하셨소?”
“그러하옵니다. 1년을 지킬 수 있다면 10만의 대군을 북평에 주둔시킬 수 있사옵니다. 그러하니 어찌 중요하지 않겠사옵니까.”
미치지 않은 이상 요동 전선의 병력을 북평으로 진군시킨다는 발상을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요동 서쪽에 우리의 영토가 있다고 할지라도 평양 도성을 지키는 방벽은 요동이며, 고구려의 최전선도 요동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연자유가 언급한 10만의 대군이라는 건 추가로 육성할 병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즉, 고구려의 역량이 그만큼 발전할 수 있다고 전망한 것이다.
“신 또한 같은 생각이옵니다.”
나도 연자유의 의견이 힘을 보탰다.
“폐하. 북평은 참으로 오랜 세월 경작 따위를 발전시킨 옥토이옵니다.”
최소한으로 계산해도 무려 100만 명의 인구를 고구려가 품을 수 있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점령지의 인구 부양력이 100만 명을 넘어선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일, 이 지역들을 제대로 통치할 수 있다면 중국의 절반에 국한된 수나라 따위가 고구려를 바라볼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오늘 고구려 사람들이 미친 듯 흥분한 건 다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가지지 못했다면 모르나 이미 취했다면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곳이옵니다.”
나는 정확하게 역사적 의미를 언급했다.
“이번 전쟁으로 만리장성은 고작 경계에 불과하다는 걸 입증했습니다. 더불어 향후 1년의 방비로 만리장성을 고구려의 내성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만리장성은 공간을 규정하는 성으로 남겨서는 곤란했다. 그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성으로 규정하는 게 옳았다.
“폐하. 고 막리지의 의견이 참으로 합당하옵니다. 본토의 관리를 보내어 통치를 완비하되 기주를 약탈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역량을 키우는 것이 옳사옵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머지않아 강이식의 수군이 다시 기주를 공격할 것이옵니다. 이때 북평과 연계할 수 있다면 바다 또한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니 어찌 두려움이 있겠사옵니까.”
1년 후 우리는 만리장성과 서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행할 건 오직 한 가지였다.
“하여, 청하옵니다. 머뭇거리지 않고 고구려답게 북평의 모든 농지에 우리의 농법을 보급하여주시옵소서.”
여차하면 중국에 신농법이 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우려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공세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좋소. 당장 집행하시오.”
고양성도 흔쾌히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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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은 차분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속은 너무나도 복잡했다.
‘아니, 나의 귀한 생명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어찌 지금 장성 이남을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눈앞에 왕고덕이 있으면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 정도였다. 아니,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하거늘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부여잡아야 했다. 조금만 놓치면 정말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고구려가 무리했군요.”
“그렇소?”
“물론입니다. 고구려가 장성 이남을 점령한다는 건 역량을 넘어선 일입니다.”
지근찰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의견을 슬쩍 쳐다봤다.
“그런데 왜 그랬소?”
“소승이 어찌 모두 알겠습니까. 그러나 짐작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막리지 왕고덕은 약탈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을 정도로 호전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감행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소승이 그를 아는데 참으로 괴팍하고 저열합니다.”
“음.”
“차라리 잘됐습니다. 필시 수나라가 대대적으로 반격할 것이니 양국의 힘이 빠지는 걸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의연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나 지근찰은 집중하기 어려웠다.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하게 흐르고 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팽창을 본 수나라가 우리에게 군사적 움직임을 요구할 수도 있다.’
수나라와의 관계도 생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온다던 물자는 수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 고구려의 비상은 돌궐에게 전혀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의연 역시 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이어갔다.
‘지금 내가 취해야 하는 건 돌궐이 외교적으로 완벽하게 고립되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찌 되었는지 지금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돌궐이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와 동맹을 파기하고 수나라의 손을 잡았으나 구체적인 효과가 없다. 그런데 다시 본국이 팽창하니 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 정도가 되었다면 이제라도 노선을 새로 잡아야 하는 것이지만 지근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건 냉철한 판단이 아니라 아집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의연은 이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수나라가 물자를 전혀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방치하신다면······.”
의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이보시오!”
거친 목소리와 함께 이계찰이 모습을 보였다. 지근찰은 헛웃음을 짓더니 매섭게 노려봤다.
“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참으로 무례하시오.”
“하! 무례? 됐소. 공과 쓸데없는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소.”
“왜 왔소?”
“아파가한과 수나라가 협정을 체결했소.”
“뭐요······?”
지근찰은 당황하여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도 못했다. 그 꼴을 본 이계찰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눈을 부라린 채로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아직 이를 파악도 못 하셨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정신 똑바로 차리시오!”
그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잔뜩 담겨 있었다.
“고구려의 돼지 떼를 강탈하여 아파가한이 수나라와 손을 잡은 것이외다. 내 말을 이해하셨소?”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아직도 모르겠소? 공의 어처구니없는 정책이 돌궐을 분열시킨 것이오.”
“그, 그럴 리가 없소. 설령 그가 딴마음을 품었다고 한들 수나라가 그리할 이유가 없소이다.”
“아직도 그 소리요? 또,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하오? 이미 현실이 된 일이외다! 그리고 고구려가 우리의 분열책을 꾀한 게 아니라 공과 수나라가 그리한 것이외다.”
“!!!”
지근찰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만일, 정말이라면 외교 실패의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었다.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지금 상황을 말해주면 되오?”
“······.”
“고구려는 남방을 평정하여 모든 국력을 요동이 투입할 수 있소. 수나라는 아파가한을 얻었기에 북방을 고민하지 않소. 아시겠소? 천하에서 외로운 나라는 우리밖에 없는 것이외다. 내 말을 이해하셨소?”
그때였다.
몰골이 엉망이 된 사람이 들어왔다.
그의 입에서는 다급한 말이 터져 나왔다.
“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
“!!!”
급보가 전해졌다.
기겁한 지근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대, 대체 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인가?”
“박고와 동흘라가 거병했습니다!”
“!!!”
돌궐에 속한 부족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