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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44화 (144/199)

144화 무너지는 만리장성(3)

144화 무너지는 만리장성(3)

온달은 여유로웠다.

그의 언행에는 아무런 긴장감이 담겨 있지 않았다. 분명 적의 영토에 있거늘 마치 도성 근처를 산보하는 것만 같았다.

“적군이 지척에 이르렀습니다.”

부관의 말에 온달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우리와 수나라는 신뢰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법일세.”

분명 밀약을 체결했으나 양측 모두 전혀 지키지 않았다.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그냥 치워버린 것이다. 그러하니 애초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온달은 목을 만지며 을지문덕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어차피 북평 태수도 약조를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애초 우리도 지킬 생각이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만일, 그가 정말 믿었다면 참으로 아둔한 것이지요.

신뢰라는 단어의 가치를 저 멀리 날려버리는 대화였다.

-대형께서 장성 이남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접한 즉시 병력을 움직일 겁니다.

-이왕이면 소수로 넘어가는 게 좋겠군.

-그렇습니다. 그가 우리를 어디까지 신뢰했는지는 가늠할 수 없으나 대형을 사로잡고자 최선을 다할 것이니 말입니다.

-바로 그때 북평을 포위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미끼를 던져 덫을 놓는 것이니 참으로 좋은 방책이었다. 물론, 무려 부마가 미끼라는 사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탈이 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데, 수만의 대군을 어찌 이동시킬 생각인가?

-대형께서 장성을 넘는 순간 북평 태수는 경계를 소홀히 할 겁니다. 그러니 단 밤을 틈타 단번에 진군해야지요.

-이런. 내가 정말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군.

-실은 그렇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명쾌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온달은 을지문덕의 요구대로 온달은 정말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또한,

“북평 태수께서 보내셨습니다.”

적은 나름대로 치밀하게 움직였다.

온달은 밀사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등장하고 바로 출병했을 것이니 본군이 장성을 넘은 사실을 모를 것이다. 이 또한 을지문덕의 말대로구나.’

가끔 을지문덕의 혜안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전장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이 정확하게 예측하니 말이다.

어쨌거나 온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밀약에 의하면 내가 철수할 때 추격하는 것이다. 한데, 어찌하여 여기에 대군을 이끌고 왔나?”

“부득이한 사정이 좀 있습니다.”

“사정?”

“그렇습니다. 한데, 말투가 왜 이리 어색합니까?”

“아.”

밀사의 말에 온달은 잠시 멈칫했다. 아무래도 이런 역할을 잘 수행하지 않았기에 언행이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여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최근 몸이 불편해서 그렇다네.”

“이런. 그렇습니까?”

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 같은 고구려의 부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참으로 바람직하다. 하늘이 우리 편이구나.’

뜻밖의 호재에 기분이 좋아졌다.

온 힘을 다해서 표정을 관리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려니 정치적으로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허. 그러면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송구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뒤를 추격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음. 그래도 영 불편한데?”

“부마께서 이동 경로를 미리 알려주신다면 아군은 반대 방향으로 향할 것입니다. 하면,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오. 그건 참으로 묘안이로군.”

“부마께서 기뻐하시니 마음이 편해지고 말았습니다.”

“하하하! 아닐세. 어차피······”

온달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북평 태수는 은밀한 혈맹이자 동반자가 아닌가.”

“과연 그렇습니다.”

대화는 순탄했다.

온달은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농락하고 싶으나 언제 상황을 파악할지 모른다. 그건 곤란한 일이지.’

나름대로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이동 경로를 전해 들은 밀사는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온달은 부관들을 불러서 간단하게 작전을 하달했다.

“곧장 전군을 움직여 북상할 것이네.”

“저들과 싸우지 않습니까?”

“굳이 피를 볼 이유는 없네.”

“하지만······.”

부관들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언제봐도 참으로 호전적인 이들이 아닐 수 없었다.

“시원하게 창칼을 휘두르고 싶은데 이대로 가다니요.”

“한 명도 안 죽고 이길 수 있습니다.”

“죽기는커녕 다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이보게. 그건 좀 너무 나간 것 같네.”

“시끄럽네. 일단 부마를 설득해야 하지 않겠나?”

“허. 자네 설마 부마를 상대로 위계를 펼친 것인가?”

“그렇다네.”

“엄청나군. 꼭 성공하게.”

“나만 믿게. 시작이 절반이니 이미 5할은 성공하고 있네.”

의도치 않게 두 사람의 놀라운 대화를 듣게 된 온달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전에는 싸워야 했으나 지금은 아닐세. 수만 명의 본군을 두고 우리가 결사대처럼 적지에서 혈전을 펼쳐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걸세.”

“결사대는 곧 낭만입니다.”

“음. 그건 그렇지만, 아니 되는 일일세.”

온달은 참으로 단호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가득 채운 말이 있었다.

-대형. 절대로 적과 교전하지 마십시오. 곧장 본군과 결합하셔야 합니다. 적을 압살하는 건 그 뒤에 시도해도 늦지 않습니다.

-알겠네.

-성의를 가지고 답해주십시오.

-끙. 알겠네. 자네 말대로 하겠네.

정말로 마음 같아서는 과감하게 적과 혈전을 치르고 싶었으나 을지문덕의 신신당부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이번 전쟁의 계책을 수립하는 건 군권을 행사하는 온달이 아니라 을지문덕이었다. 만일, 그의 결정을 따르지 않을 것이었다면 굳이 일부러 중책을 맡길 이유는 없었다. 더욱이 온달은 이런 역할의 분배가 정확한 사람이었다.

“반론은 받지 않겠네. 모두 내 말대로 하게.”

“끙. 어쩔 수 없지요.”

부관들은 미련이 잔뜩 남았으나 말을 더 보탤 수는 없었다. 안된다면 안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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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북평은 늘 요충지였다. 참으로 많은 왕조가 북평을 거점으로 세력을 팽창했다. 과거 고구려와 명운을 걸고 혈전을 펼쳤던 전연과 후연 역시 이곳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일국의 왕도로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기에 늘 번영을 이어가며 과거의 영광을 과시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영광의 역사가 쓰러지고 있었다.

“마, 막아야 한다!”

북평 태수는 발악하듯 외쳤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외침이었다. 이미 북평의 주력군은 부마 온달을 사로잡기 위해서 출병한 상태였기에 성을 방어하는 병력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눈동자에는 사방을 에워싸고 우직하게 공격하는 고구려군만 담기고 있었다.

애초 수백 명과 수만 명이 펼치는 농성전이었다. 기어이 이기고자 한다면 난공불락의 요새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 만나야만 승산이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 북평성에는 해당 요소가 없었다.

그러기에

“대, 대인! 성문이 돌파당했습니다.”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이는

“서, 성벽으로 적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압도적 패배의 서막에 불과했다.

북평 태수의 눈동자에는 절망과 후회만이 담겨 있었다. 만일, 병력을 출병하지 않았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 고구려와 밀약을 체결하지 않았어야 했다. 모든 것이 후회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미 전장은 패배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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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공격으로 성을 점령한 고구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사실상 무혈입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기세등등한 고구려군 중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민심을 교란하는 행위를 모두 금지할 것이다.”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에다가 칼을 잡으면 쓰러질 것 같은 인물이었다. 특히 놀라운 건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바로 가서일이었다.

그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쉬지 않고 외쳤다.

“오늘부터 저들은 우리와 다른 말을 사용하는 고구려의 백성인 것이다. 절대로 해를 끼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

“이를 어기면 지엄한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니라!”

“······.”

핏대까지 세우며 외치는 가서일을 병사들은 빤히 쳐다만 봤다. 그러다가 결국, 한 명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외쳤다.

“하하하! 선생. 우리가 전쟁 한 두 번 하는 줄 압니까?”

“음?”

“전투가 끝났는데 뭐 하러 괴롭힙니까?”

“······.”

“하하하! 이보게. 너무한 거 아닌가? 선생께서 언제 전쟁을 직접 경험해보셨겠는가?”

그새 다른 이가 끼어들었다.

그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왁자지껄 떠들었다.

가서일의 눈동자가 더 가늘어졌다.

하지만

“허. 선생. 지금 눈이 더 가늘어지신 겁니까?”

“참으로 놀랍습니다.”

병사들에게 놀라움을 줄 뿐이었다.

그새 을지문덕이 다가왔다.

약간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말이다.

“서일.”

“아니, 문덕. 나 지금 너무 놀림당하고 있네.”

“시끄럽네. 이 바쁜 와중에 대체 왜 이러고 있나?”

“전쟁이 끝났으니 통치를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하나씩 일러주고 있었네.”

“됐네. 병사들이 무슨 통치를 하나? 그냥 좀 두게. 자네들도 다시 정비하여 경계를 강화하게!”

을지문덕의 한 마디에 다소 풀어진 듯 떠들던 병사들은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꿨다. 그리고 일제히 이동을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가서일은 입맛을 다셨다.

“아니, 내 말은 전혀 안 듣던데?”

“저들이 자네 말을 왜 듣나? 어림도 없네.”

“애석하군.”

“애석하기는 뭐가 애석하나? 애초 병법서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바로 자네가 아니었나?”

“봐도 모르겠는데 왜 보나?”

“자랑일세.”

을지문덕과 가서일은 쉬지 않고 티격태격했다. 물론, 서로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는 옹졸함은 전혀 없었다.

“그나저나 문덕. 북평군의 관리는 모두 사로잡았나?”

“그렇다네. 한데, 그들을 회유할 수 있겠나?”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나? 쉬운 사람도 있고, 어려운 이도 있겠지.”

애초 가서일은 관리를 생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오랜 세월 지역을 통치해온 그들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걸 정확하게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괴롭힐 필요는 없네. 한두 번 의사를 묻고 따르지 않을 시 바로 참하면 될 것이네. 그나저나 태수는 어찌 되었나?”

“죽었네.”

“잘됐군. 살아 있으면 귀찮았을 것이네.”

전혀 필요가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가서일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문덕. 지금부터 우리는 북평의 백성들이 이곳은 영구히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는 걸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할 것이네.”

“방도를 말해보게.”

“어렵지 않네.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정확하게 인지시켜야지.”

“대군을 운용하여 인근의 성을 더 점령해야 한다는 것이군.”

“그렇다네. 가능하겠나?”

“애초 왕명은 북평 점령이었네. 하지만, 이를 공고히 하려면 세력을 더 넓혀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리해야지.”

“역시 시원시원하군.”

가서일은 싱긋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백성은 곧장 생업에 복귀하도록 하게. 생계에 어려움이 있는 백성은 군량을 나눠서라도 도울 것이고, 경작에도 힘을 보태야 할 것이네.”

“서일.”

“말하게.”

“통치는 자네가 알아서 하게. 어지럽네.”

“아. 어차피 자네가 제대로 이해할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네. 나는 그저 말하는 걸 즐겨할 뿐이니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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