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상대적인 박탈감
134화 상대적인 박탈감
들으면 들을수록 절절한 내용이었다. 이건 다시 듣고, 백 번을 곱씹어도 의연의 잘못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그가 잘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러자고 이역만리의 땅까지 왔는지 개탄스럽습니다.”
아회씨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정당한 노여움이었기에 나와 고의성은 어물쩍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귀를 닫을 수는 없기에 아회씨의 하소연은 계속 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분명 의연 대사가 직접 고구려의 유학을 일러준다고 약조했습니다. 해서, 총명한 이들을 대기시켰고, 도끼도 잘 준비했습니다. 한데,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거 아무래도 쉽게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전하. 일단 고정하시지요.”
“왕 막리지. 내가 그래도 번국의 군왕인데, 오죽 답답하면 단기필마로 여기까지 달려왔겠습니까.”
“소인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전하를 백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돌궐로 사라진 그를 어찌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일단 노여움을 거두시지요.”
내가 진땀을 흘리며 이렇게까지 아회씨는 달래는 이유가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우리의 제후였다. 아니, 단순하게 이를 넘어서 지독할 정도로 고구려에 우호적이었다.
이러한데 강압적으로 누르거나 오만한 행동을 취하는 건 참으로 무지한 것이었다. 심지어 일국의 왕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왕 막리지가 그를 돌궐로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아회씨의 입에서 진실이 휘둘러졌다.
하지만, 전후 과정에서 분명한 사정이 있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급히 말했다.
“전하. 오해가 있습니다. 확실한 오해가 맞습니다.”
“오해라니요? 진실에 어찌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까.”
“전하. 만일, 소인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찌 의연을 돌궐로 보냈겠습니까.”
나는 정말 억울해서 하소연하듯 말했다.
“아니, 생각할수록 소인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의연, 이 사람은 어찌하여 이토록 중대한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고정의도 슬쩍 보태듯 말을 꺼냈다.
“전하. 소인 역시 금시초문입니다. 의연이 참으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니, 실은 별다른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말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옳습니다. 그는 원래······.”
나와 고정의는 온 힘을 다해서 아회씨를 달랬다. 아니, 의연을 대차게 욕했다. 지금은 무조건 이래야 했다.
그리고 우리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회씨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정확하게는 배신감이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허. 그렇다면 처음부터 본국에는 유학을 일러줄 생각이 없었던 겁니까. 물론, 지부상소가 고구려의 정수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약조했거늘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고정하십시오. 전하. 소인들이 방법을 찾아볼 겁니다.”
“왕 막리지. 내가 더 서운한 게 무엇인지 압니까.”
“이르시지요. 소인이 무조건 경청할 겁니다.”
“결국, 우리보다 돌궐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는 걸 이번에 너무 적나라하게 알아버렸다는 겁니다. 이 사실이 나를 더 버티지 못하게 합니다.”
사실 돌궐이 더 중요하긴 하다. 그러나 객관적인 사실이 국제 관계의 모든 걸 규정하는 건 아니었다. 아회씨는 고구려 후방을 책임지는 일국의 군왕이기에 막연하게 단순 비교할 수도 없다.
“지난번 고구려의 서토 정벌 때도 나는 앞뒤 재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소인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 이후 집행되었던 이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진을 수행할 때도 그랬습니다. 가장 고된 일을 자처했습니다. 한데, 이리도 홀대하니 내가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분통해서 말입니다.”
객관적으로 따질 때 아회씨의 공이 정말 대단하긴 했다. 여러 번 다시 생각해봐도 서운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곤혹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기에 눈알을 슬쩍 돌려 고정의를 바라봤다. 물론, 그의 얼굴에서도 역시 난처함이 잔뜩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전하. 의연이 아니더라도 유학을 익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장 적합한 수를 찾아낼 것이니 시간을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하아. 고구려 유학의 태두로부터 정수를 익히고 싶었을 뿐입니다. 한데, 과분한 욕심이었나 봅니다.”
“······.”
이런 열의라니.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대로 대화를 끝낼 수는 없기에 머리를 맹렬하게 굴렸다. 내가 최선을 다해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고정의는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면, 이리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나름의 묘책이 하나 떠올랐다.
물론, 아회씨는 여전히 침통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나도 강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 유학자 10명을 파견하겠습니다. 하면, 서운함이 조금이라도 가시리라 여깁니다.”
“그들은 지부상소를 남에게 일러준 경험이 있습니까.”
“······.”
“허.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회씨의 목소리에는 조금 전처럼 서운함이 묻어 있지 않았다. 나는 바로 느낌 왔다.
지부상소도 문제지만 10명은 더 문제였다.
지금의 해결책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곧장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리하는 건 어떻습니까.”
“또 무엇입니까. 내가 빈손으로 돌아가도 됩니다.”
“전하. 그러지 말고 고려해보십시오.”
“음. 말해보세요.”
“고구려의 왕도로 학자를 유학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모든 비용을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
“음.”
“전하. 본국도 사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우리도 유학을 이제 본격적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데, 고막해국으로 100명, 200명의 학자를 파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막해국에서 100명, 200명을 보낸다면 모두 수용하여 유학을 제대로 익힐 수 있는 길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리하면 대화가 더 편해지지 않겠습니까.”
아회씨의 이마에는 주름이 잔뜩 생겼다. 고민이 많아 보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 포로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우리의 유학을 익힌 이들이 제 나라를 다스릴 동량으로 성장한다는 건 너무나도 반가운 일이니, 말이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확실하게 약조해 드릴 수 있는 건 최고의 대우를 할 것입니다.”
“듣자니······.”
고민을 끝냈을까?
아회씨가 어물쩍 말을 이었다.
“고구려에는 과거 시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학자도 응시 자격이 있습니까.”
“음. 타국인을 대상으로 한 시험을 따로 개설하면 되긴 합니다.”
“허. 서운합니다. 우리는 남이었군요.”
이런.
이런 동포를 보았나.
나는 재빠르게 말을 바꿨다.
“같은 조건에서 동등하게 시험을 치를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오늘 두 분을 만나니 서운함이 확 가셨습니다.”
-----
진나라 황제 진욱은 통곡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구슬펐다.
“어찌 하늘은 이토록 야박할 수가 있는가······.”
분명 산 사람의 목소리였건만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주라후는 곤혹스러움을 애써 숨기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내가 마음을 침착하게 하고자 했으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소. 천하의 정세가 수나라를 거들고 있소. 나는 단 하루도 숨을 쉴 수가 없소.”
“폐하. 사신단의 보고에 의하면 고구려는 남방의 위험을 모두 제거했사옵니다. 하면, 그들의 말발굽이 어디로 향하겠사옵니까. 수나라가 아니겠사옵니까. 이러하온데 어찌 정세가 어둡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외다.”
충정이 가득 담긴 주라후의 청에도 진욱은 고개를 저으며 흐느끼듯 말을 이을 뿐이었다.
“고구려와 돌궐의 대군이 장성을 넘었어야 하오. 바로 그때 우리가 북진했다면 어찌 수나라가 감당할 수 있겠소? 한데, 무엇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소.”
“폐하.”
“당장이라도 장성을 넘을 기세였던 돌궐은 고구려와 동맹을 폐기했소. 그리고 수나라의 손을 잡았소이다. 이때 고구려가 무엇을 할 수 있소? 그들도 돌궐을 견제해야 할 것인데 어찌 장성을 바라볼 수 있겠소이까.”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고구려에게 수나라는 잠재적 적국이지만, 동맹을 파기한 돌궐은 명백한 적대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때 어찌 배후에 돌궐을 두고 장성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수나라 황제의 이이제이에 고구려와 돌궐이 넘어간 것이외다. 북방과 동방이 모두 그의 손바닥에 올라간 것이라는 말이오. 천하의 정세가 수나라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소.”
옳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국력을 모아서 수나라를 견제해야 한다. 하지만 진욱은 시절을 한탄만 할 뿐이었다. 아니, 짧은 기간 보였던 의욕조차 아예 사라졌고, 모든 의지를 상실한 듯 끼니까지 거르고 있었다.
그래서 주라 후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북진을 서둘렀어야 했다. 그래서 최소한의 성과를 냈어야 했다.’
뼈저린 후회가 머릿속을 지배했고, 가슴을 너무나도 무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후회에 불과하기에 더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지금 중요한 건 좌절의 늪에 빠지고 있는 황제 진욱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동안 잘 준비한 북진을 시행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폐하. 아직 늦지 않았사옵니다. 신이 대군을 이끌고 장안성을 도모하겠사옵니다.”
“······.”
“폐하. 부디 윤허하여주시옵소서.”
간곡하게 청하였으나 진욱은 멍하게 쳐다만 볼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급기야
“그리한들 본국이 수나라를 감당할 수 있겠소?”
진한 패배 의식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일국의 황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언행이었다.
주라후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속은 울렁거렸다.
“하늘은 어찌하여 양견을 수나라의 황제로 봉하셨다는 말인가.”
“폐하. 신을 믿어주시옵소서. 기어이 대승을 가져오겠사옵니다.”
주라후는 포기하지 않고 간곡하게 청하였다. 하지만, 진욱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넋을 놓은 채로 걸었다.
이에 주라후는 황급히 뒤를 따르며 말했다.
“폐하. 부디······.”
그런데
“!!!”
진욱이 크게 휘청였다.
그리고
“폐, 폐하!”
쓰러졌다.
그의 입가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찌하여 하늘은 내게 한 번도 기회를 주지 않으시는 것인가.”
그저 하늘을 원망하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