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격동
133화 격동
현실적으로 지금 기술 수준으로 도로를 확충하는 건 어렵다. 샛길이라도 뚫어보려니 인력도 부족하다. 경작지 확보할 사람도 부족해서 외국인 노동자 데려오는 상황에서 도로 건설과도 같은 대규모 역사를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내가 찾는 것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대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그 대안이 떠올랐다. 나쁘지 않았다.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면 인력을 대거 확충하는 건 가능하지 않겠나?”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군요.”
“물자를 빠르게 옮기거나 대군의 이동을 원활하게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정보의 전달은 더 단축할 수 있지 않겠나?”
“역을 더 확장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리만 해도 더 정보의 전달은 더 빨라질 것이네. 어떤가.”
“그건 어려운 건 아닙니다. 다만, 굳이 그리할 이유가 있을지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아니, 애초에 을지문덕의 제안은 단지 정보 전달의 편의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방금 형님께서 언급하신 물자와 대군의 이동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었다.
을지문덕은 평양 도성과 요동을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나?”
“이유만 충분하다면 당장 강행할 수 있습니다.”
“잘 듣게. 북으로 도로를 확충할 수 없다면, 남으로 펼치는 건 가능하지 않겠나?”
연자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해할 수 있었다. 국력을 기울여 북방을 개척하고자 하는데 대뜸 남쪽으로 도로를 확충하자고 하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런데 이건 하나씩 설명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계속 이어갔다.
아니, 이어가려고 했으나 연자유의 물음이 빨랐다.
“평양 도성에서 한수를 연결하는 도로를 확충하자는 것입니까? 형님께서도 알겠지만, 남방의 교통로는 관방체계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가장 빠르고 편리한 도로와 수로가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나의 입장을 고려한 완곡한 반대였다. 그런데 연자유가 제기한 부분을 내가 모를 수는 없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왕고덕이 막리지이니 말이다.
그래서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
“그 도로를 확장하자는 말일세.”
“구태여 그리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 말의 뜻은 요동으로 연결된 도로를 확충하는 것과는 달리 이유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는가?”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이러면 된다.
나는 싱그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간단하다네. 고구려의 본토보다 한수와 남쪽이 더 비옥하지 않나? 그 풍요로움을 더 빠르고 확실하게 많이 운송하기 위해서일세.”
“설득력이 없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번국의 대군이 빠르게 북상할 수도 있지 않겠나?”
“만에 하나 요동이 돌파당하는 순간 고구려의 모든 역량은 평양 도성을 사수하기 위해서 집중될 겁니다. 이러한데 번국의 대군이 늦게 당도할 수는 없습니다.”
“늘 근심이었던 남쪽을 더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단이 될 것이네.”
“고구려의 외교 역량이 총동원된 대계였습니다. 작금의 방침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남방을 포기해야 합니다.”
부드럽고 완곡하게 반론을 펼치는 연자유는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내 말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네의 말이 참으로 바람직하네. 한데, 더 확고하게 하려면 도로가 필요할 것이네.”
“이해하기 어렵군요.”
“일찍이 장수 태왕께서 동방의 패권을 확보하셨네.”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더 이해할 수 없군요.”
“그렇지. 갑자기라는 말이 참으로 적합하군.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은 백제를 강력하게 압박할 수 있었으나 한수를 실질적으로 통치할 역량은 부족하지 않았나? 즉, 당시 우리가 가진 동방의 패권이라는 건 군사적 승리로 귀결되었을 뿐이었네. 냉정하게 되돌아보게. 작금의 고구려가 당시보다 강대한 힘을 가진 건 아니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 분명하게 국세가 꺾이긴 했지요.”
오늘날 고구려가 펼치는 대외정책과는 별개로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의 황금시대의 국력과 단순 비교한다면 분명 열세였다.
“그런데도 작금의 고구려가 북방을 바라보는 건 천하의 정세와 발맞춰서 우리의 방침이 변경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 장수 태왕 이래 구축된 남진 중심으로 대외 팽창 정책을 북진으로 변경한 것일세. 모르겠는가? 오늘의 고구려는 새로운 기조를 수립하고 있다는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자면 과거와는 달리 한수가 오롯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야 하네. 물론, 번국의 영토를 빼앗자는 말이 아닐세. 이는 참으로 우매한 짓이니까.”
“그렇군요.”
과연 연자유는 내 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우리 조정이 나서서 번국의 경작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입니까?”
“그렇다네.”
“음. 소수의 농학자를 파견하여 경작을 크게 일으킬 수 있다면 고구려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요. 실질적으로 우리의 역량이 소모되는 것도 아닐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지. 그리하여 발생하는 모든 풍요로움을 고구려가 취할 것이라네. 물론, 무역의 형식이 될 것이네. 그러자면 지금보다 도로가 더 발전해야지. 안 그런가?”
“무역이라. 그들이 필요한 모든 물자를 미리 준비해야겠군요. 이미 시작한 철광이나 말이나 여러 사치품을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었다.
“우리의 귀족은 번국의 유력가들이 탐낼 만한 여러 사치품을 만들어 낼 것이네.”
“이런. 투자 설명회부터 모든 것의 복선이었습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군.”
“좋습니다. 이건 나쁘지 않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고구려의 국세에는 좋은 것이니 말입니다.”
고구려에서 생산할 잉여 사치품이 외국으로 수출되는 격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필요한 물자를 대거 수입해올 수도 있다.
또한, 평양 도성과 한반도의 중남부에서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점차 남북조 신라와 백제까지 포함하는 무역권을 구축할 수도 있다. 이는 고구려의 내실을 더 탄력 있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어떤가. 도로를 확충할 수 있겠나?”
“해야지요. 우리 도성에서 한수까지 수레가 멈추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어보겠습니다.”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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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였다.
“아파가한이 수나라에 밀사를 파견했다고 하셨소?”
“그렇소.”
고정의의 계책으로 대라편에게 밀사를 보냈던 돌라가 전한 말이라고 했다. 애초 그들과 밀접하게 관계를 형성하던 돌라였으나 이미 고구려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이 와중에 수나라와 손을 잡으려고 하는 대라편의 정보를 함구한다는 건 너무나도 우매한 짓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런 선택을 했다가 우리에게 포착되기라도 한다면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우리에게 모든 정보를 전달하며 철저하게 고구려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고정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떻소? 나는 아파가한이 손을 내미는 순간 수나라 황제가 대카간에게 물자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오.”
“끌. 나도 마찬가지요. 이는 참으로 큰일이 아닐 수 없소.”
“허. 어찌하여 큰일이라는 것이오?”
“하하하! 일이 너무 순탄하니 큰일이라는 것이외다.”
“하하하! 이런. 내가 왕 막리지의 깊은 뜻을 몰랐소이다.”
나의 실없는 농담에도 고정의는 호탕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만큼 천하의 정세가 너무나도 순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로 하느님이 보우하고 계신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왕 막리지. 더 속도를 내야 하지 않겠소?”
“그래야겠지요. 수나라의 물자가 아파가한에게 운송되는 순간 대카간의 눈이 돌아갈 것이니 말이외다.”
“선택지는 두 가지로 좁혀진다고 생각하오.”
고정의는 느긋하게 웃으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나 역시 마음이 한결 가벼워서 그럴까? 오늘따라 고정의의 여유가 참으로 편했다.
“첫째는 대카간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것이외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구려. 그래. 고 막리지는 어떤 방법이 있으시오?”
“수나라의 배신에 격분한 대카간이 대군을 이끌고 수나라를 공격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이 경우 대카간은 수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필시 우리에게 다시 손을 내밀 것이니 말이외다.”
돼지 수만 마리에 이어 처라후에게도 곡식을 지원하는 걸 본 아사나 섭도는 눈 딱 감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이때 우리의 선택지는 아주 간단하오. 대군을 이끌고 대카간의 뒤를 도모하면 되오.”
“나쁘지는 않소. 한데, 이리되면 그간 우리의 펼친 노력이 너무 아깝지 않소?”
“그렇긴 하오.”
정말이었다.
고작 위장 동맹을 체결한 뒤 뒤를 노릴 생각이었다면 치밀하게 덫을 설치하고 우리의 물자를 돌궐로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정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방도가 있는 것이외다.”
“나쁘지 않을 것 같소이다.”
“이런. 듣기도 전에 결정하셨소?”
“더 들어볼 필요가 있겠소?”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파가한과 수나라는 손을 잡게 될 것이외다. 원인은 우리가 보낸 돼지 떼를 대카간이 강탈했기 때문이오. 또한, 수나라 외교 실패의 책임까지 덮칠 것이외다. 무엇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대카간이니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이오. 어떻소? 내 말이 틀렸소?”
“하하하. 부족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소이다. 한데, 어찌 틀렸다고 하겠소이까.”
“하면, 더 공세적으로 움직이는 게 어떻소?”
“공세적이라.”
고정의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나 역시 미소로서 화답하며 말했다.
“처라후에게 구휼미를 운송하오. 지금 국내성으로 사람을 보내어 수천 기의 기병을 앞세워 지키게 한다면 어찌 대카간이 경거망동할 수 있겠소이까.”
“참으로 묘안이외다. 병력을 파견한다고 할지라도 돼지 떼의 사례가 있으니 섣불리 입을 댈 수도 없을 것이외다. 이리되면 우리의 구휼미는 무조건 처라후가 취하게 될 것이오.”
“수나라는 아파가한을 선택했고, 고구려는 처라후와 손을 잡는 형세가 펼쳐지는 것이오.”
“대카간은 외교적으로 완벽하게 고립된 것이오. 원인은 왕 막리지의 말대로 무조건적인 자신의 실책이외다.”
“바로 그렇소.”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남은 건 한가지였다.
“의연이 이계찰과 의기투합했소. 그의 활약에 따라서 대카간의 몰락이 가속화될 것이외다.”
“그를 돌궐로 보낸 건 참으로 탁월한 방책이외다. 과연 왕 막리지가 아닐 수 없소.”
언제부터였을까.
나와 고정의는 아끼지 않는 나무처럼 덕담을 주고받았다. 참으로 바람직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참으로 서운합니다!”
갑자기 문이 덜컥 열렸다.
참으로 무례한 상황이었기에 나와 고정의는 동시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전하······?”
“허. 전하.”
서둘러 일어난 뒤 예를 취했다.
그랬다.
상대는 형식적으로나마 나와 고정의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이었다.
바로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내가 서운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고막해국의 국왕 아회씨였다.
그나저나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일까?
대뜸 도성에 찾아온 것도 당황스러운데, 서운하다고 까지 하니 참으로 의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