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질적인 변화
122화 질적인 변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했다. 농업이야말로 일국의 가장 중요한 대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중요도만큼 정치적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기도 했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하기에 소외될 수밖에 없는 정치적 구조에서 비롯하는 것이었다.
고구려 역시 농업 개혁을 과감하게 진행하면서 기층의 변화를 도모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든 방향이 생산력의 증대에 집중되었기에 시간이 갈수록 관성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농업처럼 1년을 바라보는 분야의 개혁은 점진적일 수밖에 없기에 더 그런 성질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농업의 개혁이 다른 분야까지 본질적으로 바꿔낸다면 속도감은 감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래서 오늘 농업부 관리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결연했다.
특히, 그들을 진두지휘하는 이문진의 표정은 실로 단호했다.
“모두 자부심을 품으시게.”
그의 입에서 자부심이라는 석 자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를 알았을 때 그야말로 숨이 멎는 것 같았네. 어찌하여 그러하였나? 되돌아보면 나는 농업을 개혁하여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가장 최고의 목표라고만 여겼네.”
일찍이 이문진이 왕고덕을 찾아갔을 때만 해도 농업이 만들어내는 풍요로움이 백성을 뒤덮을 것이라며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 여겼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생산력이 확대되면서 백성이 끼니를 거르지 않고, 시비법의 확보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네.”
“그렇습니다. 소생들 역시 농업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본국의 국고가 가득하고, 백성이 끼니를 챙기며 춤을 추는 현실이 최고라고 여겼습니다.”
“암. 우리만이 아니라 천하의 모든 나라가 농자천하지대본을 말할 때 전혀 다르지 않게 여겼을 것이네. 하지만, 아니었네. 우리는 실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네.”
“과연 그렇습니다! 농업은 단지 먹고 사는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지. 농업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맞네. 하지만, 농업의 개혁이라는 건 사람의 삶을 모조리 해결하는 것이었네.”
“오. 실로 정확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생들 역시 선생의 말씀을 이미 심장이 알고 있기에 흥분하고, 기쁨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몇 마디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농업부 관리들의 목소리에는 열기가 넘쳤다. 그야말로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였다.
이문진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특정하여 어떤 곳을 가리킨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은 그 무언가를 바라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일찍이 고구려는 의술을 증진하기로 했네. 하여, 서토의 의원을 등용하여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건 의술이라는 다른 영역의 일이었습니다. 농업은 그저 뒷받침해야 할 기본에 불과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아니었네.”
“그렇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농업의 개혁이 바로 의술의 혁신이었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농업의 힘은 실로 무궁무진한 것이었네.”
그랬다.
왕고덕이 추진한 투자 설명회의 결과가 도출해낼 무수한 변화에 강렬하게 존재하는 건 바로 의술의 혁신이었다.
“만형자, 향부자, 촉부자, 양척촉화, 한련자초,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나?”
“두통과 어지럼증 그리고 가슴의 답답함을 고치는 약재인 향유의 재료입니다.”
“우리 백성을 가장 힘들게 하는 병마에는 창질이 있네. 혹시 처방을 아는가?”
“일러주십시오.”
“오사고가 있네. 바로 여기에 참기름을 구하여 황단화 함께 넣는 것일세. 이후 약한 불로 지져 섞고서 끓여 밀랍을 넣고 열 번 김을 내면 고약을 만들어낼 수 있네.”
고약은 새살을 돋게 하는 약이었다. 이 시절 창질 따위의 병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꿔 말해서 민간에서는 돼지비계로 겨우 처방했다는 걸 고려할 때 고가의 약재라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고약만이 아니라 내복하는 처방이 있지 않겠는가.”
의술의 신비를 강한 어조로 언급하던 이문진의 머릿속으로는 왕고덕의 말이 스쳤다.
-무소뿔 가루를 비롯하여 인삼, 당귀 등 20여 개의 약제를 분말로 만들어 잘 갈아 꿀을 가미하면 고름이 물로 변하는 놀라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네.
이미 시비법을 도입하면서 왕고덕의 ‘신출귀몰’하고 경천동지할 농업에 대한 지식은 확실하게 입증됐다. 그의 농업이 시작되면서 고구려의 뿌리 깊은 정치적 갈등까지 일거에 해결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의술의 영역까지 독보적인 지식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에 의아했으나 왕고덕은 이 또한 해소했다.
-내가 여러 약재를 만들어낼 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의술을 진흥시키기는커녕 억제한 이유가 궁금할 것일세.
-실은 그렇습니다. 오늘 대인께서 이르신 내용은 고구려의 의술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해야겠지. 내가 말한 내용이 의원의 영역인가?
-그건 아닙니다. 재료와 약간의 지식만 있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약’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세.
-예······?
-이 모든 건 약초 혹은 약재가 아니라 사람이 바르거나 먹을 수 있는 ‘약’을 제조하는 내용일세. 만일, 이를 무턱대고 알리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왕고덕의 말은 실로 많은 걸 함축하고 있었다. 또한, 모든 건 정확하게 하나의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상념을 걷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왕 대인께서 입안한 작금의 방책은 농업이 의술을 견인하는 것이 아니라 농업이 곧 의술이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네.”
이미 관리들은 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참으로 흐뭇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약초꾼이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우연히 약초를 구하는 것이 아니었네. 병마를 제압할 방법을 사람이 직접 재배하여 언제라도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방책이었네.”
“그렇습니다. 셀 수도 없는 약초를 직접 재배하여 모두 대비한다면 어찌 병마를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랬다.
오늘의 일은 사람이 병마와 싸울 수 있는 준비 태세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방책의 수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혹자는 말할 것이네. 이를 곧장 추진했으면 더 좋은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말일세.”
이문진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라는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지 않은가.”
“실로 그렇습니다. 약초를 농작물처럼 재배하는 건 어디까지나 경작의 뒤에 이뤄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닐세. 그것이 아닐세.”
“예······?”
“자네들의 말은 굉장히 초보적인 시야에서 비롯한 것일세. 나는 이를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
“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네. 하지만 우리 농업부에 속한다면 오직 하나의 시선으로 한곳을 바라봐야 하지 않겠나?”
“그렇습니다. 선생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심장에 새기고, 글자로 남기겠습니다.”
“하하하! 자네들의 학구열에 내 심장이 뜨거워진다네.”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자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저들의 손은 모두 고구려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사실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겨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중 3할은 글자라면 치를 떨며 먼 산을 바라봤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학문에 임하고 관리의 일에 최선을 다하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차분하게 되돌아보게. 만일, 농업 개혁을 추진하지 않은 상황에서 약초의 재배화를 언급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누가 한 명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네. 그러니 조정에서 이를 악물고 힘겹게 꾸리게 되었을 것이네.”
조정에서 추진한다고 하여 탈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영역은 정책으로 추진할 때 절대로 큰 효과를 낼 수가 없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마디씩 보탰다.
“조정에서 하나씩 책임지고 집행했다면 결국, 의원의 일이 되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의원이 바빠졌겠지요.”
“한데, 의원의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약초를 재배하느라 의원이 병자를 살피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까지 발생했을 겁니다.”
“이런 걸 바로 본말의 전도라고 배웠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특히 말을 꺼낸 이들은 글자라면 경기를 일으켰던 백성 출신의 관리였다. 한데, 지금은 어디 내놓아도 남부끄럽지 않은 능력과 열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괄목상대라는 말을 마련해두기도 했다.
이문진은 뿌듯함에 싱그럽게 웃었다.
“바로 그것일세. 하지만, 투자 설명회를 거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귀족이 욕심을 내는 분야가 되었네. 일찍이 왕 대인께서 이르셨다네. 농업으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귀족은 농업이 아닌 다른 영역에 손을 대기 시작할 것이라는 걸 말일세. 지금이 바로 그러한 시기라는 것이네.”
농업 생산력의 증대.
이는 귀족에게 더 많은 농업 생산력의 확충만을 바라보게 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소홀히 했던 또 다른 영역으로 손을 뻗게 한 것이다.
“귀족은 늘 사치스럽기에 재물을 보관하지 않고, 사용하고자 한다네.”
“하하하! 소인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우리 귀족은 재물을 쟁여두는 걸 정말 싫어합니다. 일단 사용하고자 하지요.”
“그렇지. 모두 잘 보시게. 원래 100석의 가진 귀족이 1,000석을 가지게 되었을 때 어찌 되겠는가?”
“900석이나 더 생긴 겁니다. 넘치는 힘을 분출하기 위해서 어디에 사용할지 눈을 부라리며 뛰어다닐 겁니다.”
“해서, 투자 설명회가 중요한 것이었네.”
“더 많은 재물을 확보할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병마의 제압에도 시선을 돌리는 건 당연한 겁니다.”
“바로 그것일세!”
이문진은 크게 감탄하며 외쳤다.
“100석을 가졌을 때 50년을 살고 싶었다면, 1,000석을 가졌을 때는 100년을 살고 싶은 게 바로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이를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하여, 귀족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농업이 곧 의술이 되는 신묘한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옳은 말일세.”
문답은 점차 절정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 사안이 어찌 추상적인 수준에 그치겠는가.”
“의원이 없어도 병마를 제압할 수 있다는 건 귀족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병을 거느린 귀족에게 아주 흥미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전이었다면 그들이 먹을 식량을 확보하는 데 온 힘을 다했으나 지금은 사정이 아예 달랐다. 그러니 지금부터 귀족은 사병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 여러 방법을 마련할 것이니 ‘약’의 제조는 아무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내용을 고구려 전역에 알리게.”
“그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