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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14화 (114/199)

114화 노선(1)

114화 노선(1)

의도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아니, 실수라고 해도 막리지인 나의 책임은 무한대였다.

“대형. 이건 정말 곤란합니다.”

고식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난색을 보였다.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지 말고 대 전략을 새로 수립해보는 건 어떻겠는가.”

“이미 북방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데, 전면 수정이라니요.”

“아닐세. 전면 수정이 아니라 일부를 수정할 수 있느냐는 말이었네.”

“허. 대형. 다시 말씀드리지만, 돌궐을 취하는 게 원안이었습니다. 한데, 시기 조절이나 접근 방법을 조정하는 게 아니라 아파가한만 걷어올 수 있느냐고 하셨지요. 우리는 이를 전면 수정이라고 부릅니다.”

북방 정책이라는 건 결국, 돌궐을 다루는 일이었기에 고식이 중심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부 수정을 고려하는 나로서는 그와 긴밀한 상의를 해야 했는데 반응은 역시나 상당한 반발이었다.

“대형. 기존 방책을 수립하는데 얼마나 큰 고민을 하며, 인력이 투입되었는지 아십니까. 휴. 문서 한 장을 작성할 때도 백 번을 고민했습니다. 한데,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행동하시다니요. 참으로 원통합니다.”

신중함을 넘어 사람의 숨통까지 답답하게 하는 수준의

나는 여전히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예 방향을 틀자는 의미가 아니지 않은가. 이 또한 고려해야 할 부분이니 방안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네.”

“일국의 대계를 어찌 그리 준비할 수 있습니까.”

“늘 최상의 결과만 바라볼 수는 없지 않겠나? 다소 부족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방안이 있다면 미리 꾸리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나?”

그저 궁색하여 변명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일국의 대계이기에 차선책도 늘 준비해야 하는 법이었다.

“휴. 대형.”

“편히 말하게. 나는 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북방의 패권만 도모하면 얼마든지 내실을 다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됩니다. 백년대계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고작 몇 년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음.”

“생각을 달리해주실 수는 없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원안을 포기하는 게 아니었다. 역시나 최상책은 고구려가 북방을 한입에 집어넣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노선 투쟁이 본격화된 고구려에서 막리지라는 사람의 입장이 모호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엄중한 정세를 관통하는 정세에 회색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보게. 하면, 나 역시 한 가지를 물어보겠네.”

“무엇입니까.”

“고구려가 북방을 취했다고 하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가를 떠나서 기어이 해냈다고 하자는 가정하자는 걸세.”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걸 언급하는 건 아닐세.”

외과 의술을 발전시켜서 구할 수 있는 백성을 놓쳤다는 식의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내려는 건 아니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네. 패권을 장악하는 노력과 세월보다 유지하기 위한 국력과 시간이 몇 배는 더 필요할 것이네. 하면, 묻겠네. 대체 언제 내실을 다질 수 있는가? 그때 고구려가 본토의 역량과 백성의 삶을 챙길 여력이 있겠는가?”

“······.”

“전운은 끝없이 고조될 것이며,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비용이 투입될 것인데 말일세.”

한국인으로서 감히 상상한다.

대륙을 제패한 고구려.

심장이 뛰고 피가 용솟음을 친다.

“대관절 고구려의 국력이라는 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가. 작금의 고구려가 천하의 패권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북방의 무리처럼 단지 남의 것을 탐하며 역사를 이어오지 않았기 때문일세. 치열한 쟁투를 치르면서도 하나씩 다독이며 걸어왔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하여,

“고구려는 역사가 있지만, 저들의 선대는 발걸음이 먼지로 남아 있을 뿐이네.”

고구려는 천년의 역사를 품고 있었다.

“이보게. 애초 내가 북방의 패권을 발의한 건 군사 강국 고구려만을 꾀한 게 아닐세. 이는 자네도 알지 않은가.”

고구려인으로서 바라본다.

백성이 건강한 고구려.

“전인미답의 길이라는 걸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

“일국의 생존이 걸린 쟁투의 역사에서 백성을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너무나도 알고 있네. 그러나 우리의 길은 쟁투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한걸음 물러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

“하면, 고려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네. 이런데도 내가 마냥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나?”

“······.”

고식은 나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표정이 참으로 복잡해 보였다.

그리고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속마음을 꺼냈다.

“역사가 응집된 서토의 땅을 도모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의 시간을 가진 북방에 깃발을 꽂는 것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우리 고구려는 저들과 분명히 과거의 시간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여, 어렵지 않게 취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대로 올라가면 북방과 고구려의 DNA가 같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절대로 이질적이지 않으니 합쳐지는 것도 수월할 수 있다.

“하지만, 대형의 의견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예. 아파가한의 세력을 취하는 방안도 수립해보겠습니다.”

“고맙네.”

“할 일을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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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의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마음이 편했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날개를 움직이며 하늘을 나는 새의 기분이 바로 이러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고 편했다.

그래서인지 마주한 돌라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대인 덕에 한을 풀게 되었으니 어찌 보은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아니외다. 그래서 긴히 청할 말이 있소.”

아니라고 하더니 바로 청탁하는 놀라운 화법에 돌라는 조금 당황했으나 이내 정신을 바로잡았다.

‘고구려인들은 눈 감고 있으면 코를 잘라간다. 평양에서 살아남으려면 맑은 정신이 최선이다.’

이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무엇이든 편히 이르시지요.”

“돌궐의 아파가한과 긴밀한 사이라고 들었소.”

“물론입니다. 호형호제하는 사이지요.”

호언장담하게 호탕하게 웃는 돌라를 보며 고정의도 미소 지었다.

‘허언은 천하제일이로다.’

물론,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아파가한과 더 가까워지고 싶소.”

“어렵지 않습니다. 서찰 한 통 보내지요.”

“아. 아니외다. 이미 밀사가 다녀갔소.”

“예······?”

돌라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치솟았다.

‘이런.’

어찌나 당황했는지 표정 관리가 어려울 정도였다. 고정의의 눈동자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고정의는 은근슬쩍 시선을 돌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구나.’

그야말로 최대한의 배려였다.

그나저나 아파가한의 밀사가 오간 사실도 모른다는 건 돌궐 내부에서 돌라의 입지가 어떠한지 한 번에 말해주고 있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으나 이번에 확실하게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고정의는 이 관계가 중요했다.

자연스레 시선을 바로 하며 말을 꺼냈다.

“어찌 그리 놀라시오?”

“아, 아닙니다. 하하하! 그들이 이미 다녀갔다니 일이 잘 풀렸겠습니다.”

“그랬다면 내가 따로 청탁할 일이 없었을 것이외다.”

“이런. 설마 그들이 무례하게 행동이라도 했습니까?”

“꼭 그런 건 아니오만······.”

고정의는 말을 끌면서 입맛을 다셨다.

“편히 이르시지요.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말 그대로 밀사인지라 우리로서는 그들이 돌궐의 입장을 확실하게 대변한다고 여기기가 어렵소.”

“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소.”

“무엇입니까.”

“알다시피 본국은 대카간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고 있소. 그러한데 아파가한의 밀사라니.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도 할 수가 없소이다.”

돌라는 눈알을 굴렸다.

‘그래. 어쩌면 당연한 의문일 것이다. 고구려로 가정할 때 왕이 아닌 막리지가 따로 밀사를 파견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이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대인. 아파가한은 야심이 큰 인물입니다. 언제라도 기회가 된다면 대카간을 노릴 겁니다.”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허. 그래서 밀사를 파견한 것이구려.”

“물론입니다. 아파가한은 고구려와 은밀히 손을 잡아서 힘을 키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허······고작 내전에 본국을 개입시키려고 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고정의가 불쾌함을 표출하자 돌라는 내심 당황하여 허둥지둥거렸다. 그 역시도 아파가한과 은밀한 관계를 형성한 것이 이번 개국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데 이런 상황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진정하시지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그냥 넘길 수가 없소.”

“하면······.”

“본국은 이 일을 대카간에게 전할 것이외다.”

돌라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런······.’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고정의의 눈동자는 날카로웠다.

‘이 일을 아파가한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일이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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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유는 볼수록 오적이 예사롭지 않았다. 일국의 창업을 주도할 그릇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휴. 섭섭해도 어쩌겠습니까. 대국의 뜻이 그러한 데 따라야지요.”

거란국의 분열 소식은 오적에게 큰 충격이었다. 연자유가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했기에 적당하게 푸념하긴 했으나 특별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는 반드시 화가 되어 돌아온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연자유 역시 결과적으로는 이번 결정에 동의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돌라는 함께 가면 분란만 일으킬 것인데 따로 가서 경쟁하는 게 더 나을 겁니다.”

“그렇소······?”

“예. 그리고 그와는 노선도 다릅니다. 나는 이번에 농업을 잘 익혀볼 생각입니다.”

“음.”

연자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들어도 가장 착실하게 번국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눌 대화가 아주 많았다.

“이왕 이리되었으니 허심탄회하게 말하리다.”

“무엇입니까.”

“본국은 북방을 도모하고자 하오.”

“······.”

오적은 몸이 굳는 것 같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연자유의 말에 담긴 뜻을 알 수밖에 없었다.

‘돌궐을 취한다······?’

이미 단일 세력으로 천하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고구려였다. 그러한데 북방을 바라본다면 천하에서 상대할 세력은 없을 것이다.

물론, 정말로 가능하다면 말이다.

오적은 이 부분이 회의적이었다.

돌궐은 단일 군사력으로는 천하의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의도일까?’

오적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움직였다.

이럴 때는 침묵을 유지하는 건 별로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차피 상대가 원대한 꿈을 언급했으니 최소한의 반응이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주로 이럴 때 필요한 건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감탄이었다.

연자유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해서, 긴히 청할 게 있소.”

“무엇입니까.”

“돌궐의 대카간과 밀약을 체결해주실 수 있겠소?”

“예······?”

“차후 개국한 뒤 귀국이······.”

어느새 연자유의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졌다. 고구려의 내정을 총괄하는 정치인의 표정만 남아 있었다.

“고구려의 후방을 도모할 수도 있다는 그런 내용을 언급하면서 말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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