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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15화 (115/199)

115화 노선(2)

115화 노선(2)

10명에게 고구려 외교의 선봉에 누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5명은 고식을 말한다. 그러나 돌궐 외교의 심장부를 묻는다면 10명이 고식을 지목한다. 이는 바꿔 말해서 대 북방 정책의 지휘관이 누군지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토록 중대한 역할인 고식은 오늘 울화통이 터졌다. 고구려를 심장에 품은 이래 이토록 수치스러웠던 적도 없었다.

도무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폭발하듯 화를 냈다.

“자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입이 있으면 해명이라도 해보게!”

“휴. 형님. 일단 진정하시지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장 해명하게. 나를 이해시키지 못하면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네.”

평소 보기 힘든 고식의 모습이었다. 연자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곤란하군. 이 형님이 화를 내면 짧아도 반년인데.’

강렬하게 스치는 참담했던 과거의 기억이 연자유의 뇌리를 흔들었다.

실제로 고식은 심기가 뒤틀리면 아예 말도 섞지 않았다. 신중하게 일을 하는 성정이라 그런지 마음도 신중하게 풀렸다. 특히, 그의 전문 영역과 관련한 일로 심사가 상하면 괘씸죄까지 더해질 것이기에 실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대 돌궐 외교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전담하고 있네. 이는 태왕 폐하의 왕명이라는 걸세. 한데, 자네가 나를 통하지 않고 오적에게 수를 쓰지 않았는가.”

돌궐 전문가인 고식에게 연자유의 행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큰일이로다.’

진땀을 흘리는 연자유는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새 고식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여유롭게 관망하던 고정의는 움찔하더니 대뜸 빙그레 웃었다.

“왜 그러나? 우리는 정파가 달라서 늘 이랬네. 사실 국내계의 수장인 내가 평양계에 속하는 자네의 동의를 받는다는 게 어불성설이지.”

“하!”

고식은 코웃음을 쳤다.

고정의는 순식간에 먼 산을 쳐다봤다.

“고 대인.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지금 우리가 내전 중입니까?”

“그건 아니지.”

“또한, 내가 단지 평양계이기만 합니까. 분명 국내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알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지. 다시 말하지만 내가 바로 국내계의 수장일세. 한데, 그리 말하다니! 자네 나를 무시하나? 불쾌하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대인께서 나를 통하지 않고 돌라를 만나서 돌궐의 내분을 유도했습니다. 틀렸습니까? 지금 누가 누구를 무시하는 겁니까.”

“그건 내가 사과하겠네.”

“하!”

아무리 고정의라고 할지라도 합당함으로 무장한 고식의 노여움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는 분명하게 나눠진 고유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하! 고구려에서 어찌 이토록 체계가 없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형님. 그게 아니라 나는 원래 노선대로 일을 추진한 겁니다.”

“허. 이보게. 나는 수정 노선이 통과되었다기에 힘을 보탠 게 전부일세.”

두 사람이 동시에 변명하자 고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게다가 눈까지 부릅뜨며 두 사람을 노려봤다.

“결국 노선 갈등에 우위를 점하고자 나를 통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였다는 의미······.”

“형님. 그게 아니라······.”

“사실 그건 맞지.”

연자유는 눈을 부라리며 사태를 악화시키는 고정의를 노려봤다.

“대인.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왜 대인과 노선 갈등 따위나 일으켜야 하는 겁니까?”

“됐네. 애초에 자네 스스로 내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려먹은 걸세.”

“하! 대인! 참으로 오만하군요.”

“사실을 말한 걸세.”

두 사람의 유치하고 이유 없는 다툼은

“다 시끄럽습니다!”

고식이 화를 내면서 단번에 중단됐다. 물론, 고정의가 아예 입을 닫은 건 아니었다.

“한데, 나와 연자유의 방법이 충돌하는 건 아니지 않나? 둘 다 가져가도 탈이 없다는 말일세. 그러한데 자네는 왜 이리 화를 내나?”

“다시 말해야 합니까? 나를 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간 대돌궐 외교를 꾸리느라 얼마나 많은······하. 되었습니다. 일국의 대계입니다. 체계를 무시해도 됩니까?”

“아니지. 어찌 체계를 무시하겠나? 나는 그저 연자유가 모처럼 일을 제대로 해냈다는 걸 말한 것일세. 나는 자네가 이를 정확하게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네.”

그 말에 고식과 연자유가 동시에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고정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돌라가 대카간과 아파가한을 이간질하고, 오적이 대카간을 부채질하는 걸세. 둘 중 하나만 이뤄져도 좋고, 둘 다 이뤄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게 아닌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아. 나는 자네가 완벽한 마무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진심일세.”

“허. 대인. 지금 농을 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마음 같아서는 나와 연자유가 더 나서고 싶으나 능력이 부족하네.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이는 고구려에서 자네밖에 없다는 걸 내가 어찌 모르겠나?”

고정의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처럼 고 대인께서 옳은 말씀을 했습니다.”

연자유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사실 거란족을 만난 일이 거대한 북방 정책에서 어떤 이변을 일으키겠습니까. 결국, 형님께서 우직하게 추진하셨던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이리 나오자 정말 흐뭇하였을까?

고식의 입 끝에는 동그란 우물이 생겼다.

“뭐. 좋습니다.”

“하면, 방책이 있겠나?”

“형님의 뜻을 따르지요.”

고식은 고개를 저으며 유려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 모습이 참으로 걸작이었다.

“돌궐의 통제를 받는 여러 집단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세력이 박고(부쿠,Buqu)와 동흘라(통라, Tongra)지요.”

“그렇군. 그들을 포섭하여 돌궐의 기층 체계를 흔들자는 의미인가?”

“물론입니다. 최근 파악한 바에 의하면 이들은 대카간의 가혹한 공물 징수에 불만이 큽니다. 다만, 돌궐의 위세에 감히 나서지 못할 뿐입니다.”

“그들을 우리의 산하로 포섭하는 것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표는 흑산이니 말입니다.”

“이런.”

흑산은 초원의 심장부다. 이를 상기한 고정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두 분 모두 아셔야 합니다. 상책은 북방을 통째로 도모하는 겁니다. 중책은 아파가한을 취하는 겁니다. 하책은 흑산에 깃발을 꽂는 겁니다. 이때 우리가 가장 먼저 집중해야 하는 건 하책입니다. 단계별로 진행해야만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외교이며, 계책이고, 대계라는 겁니다. 그러니 제발 나의 손을 거치십시오.”

“음. 그나저나 나와 연자유의 일은 이미 진행되었는데 탈은 없겠나?”

고식이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흥! 그 정도도 통제하지 못하면 어찌 대 돌궐 외교의 일인자라고 자부하겠습니까.”

“오. 역시 방책이 있는가.”

“잊었습니까? 이미 아파가한에게 돼지 떼를 보내기로 한 것을 말입니다. 여기에 고 대인과 자유의 계책이 더해지고, 박고와 동흘라는 흔들면 돌궐은 송두리째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허.”

“더불어 농업부의 생산력이 뒷받침된다면 저들은 알아서 백기를 들고 달려올 겁니다. 거두어달라고 말입니다.”

“음. 하면, 잘된 일이군? 한데······.”

고정의가 익살스레 웃으며 말하려고 할 때였다.

“하하하! 과연 형님이십니다.”

연자유의 호탕하게 웃으면 슬쩍 고개를 돌려 고정의를 험악한 눈으로 노려봤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였다.

고정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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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빤히 쳐다봤다.

의연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으니 마음은 5할이나 통한 것이다. 그래서 흡족함에 그냥 말했다.

“나는 자네가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허. 대인. 어찌하여 또 이러십니까. 조금 전 소승이 염화미소의 경지를 펼쳤거늘 전혀 파악하지 못하신 겁니까?”

“미안하네. 내가 아직 그런 경지는 아닐세.”

“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됐네. 어쨌거나 나는 자네가 생각이 참으로 많다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행동은 늘 생각보다 한 걸음 앞서 걷지 않나?”

“생각은 정확하지만, 행동은 빨라야 하는 법이지요. 하여, 소승은 늘 행동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하여, 나는 자네가 내일이면 돌궐로 출발할 것으로 믿고 있네.”

“이럴 수가!”

의연은 경악하며 합장했다.

자주 겪은 일이라서 그냥 쳐다만 봤다.

“대인께서 염화미소를 깨우치지 못하셨기에 관세음보살께 여쭤봤더니 그저 만류하셨습니다. 송구합니다.”

이 사람은 승려를 하지 않았으면 필시 사기꾼이 되었을 것이다.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출발하게.”

“허. 어찌 관세음보살께서 이르셨는데도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알겠네만 자네는 가게 될 것이네.”

“아닙니다. 소생은 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일러주십시오. 생각하는 건 늘 즐거운 일이니 말입니다.”

“자네 유학이 가장 무서운 게 무엇인지 아는가?”

“음. 대뜸 던지신 질문치고는 무겁군요. 유학이라. 아마도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내재한 학문이기에 두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것일세.”

유학은 통치학이다.

가장 중시하는 건 바로 위계였다. 하여, 나라 안으로는 관료 체계를 구축하고, 나라 밖으로는 국제 질서의 위계를 공고히 한다.

단지 힘이 아니라 세계관을 구축하는 철학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유학의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괜히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간 동아시아를 좌지우지한 통치학으로 거듭난 게 아니었다.

“이보게. 나는 우리 고구려의 유학이 이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네. 하여, 천하 만민이 알 수 있도록 널리 퍼져야 한다고 여기고 있네.”

“이런. 돌궐에 전하여 그들이 세계관을 고구려가 장악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지. 결국은 우리의 영역이 될 돌궐일세. 이때 우리가 사상적으로 다스릴 수도 있다면 새로운 천년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나?”

“사실 천년까지는 바라지도 않지요. 백 년만 가능해도 충분합니다.”

이미 의연의 엉덩이가 들썩이고 있었다.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데, 대인. 쉽사리 소승에게 유학을 배우겠습니까.”

“자네는 승려일세. 그들은 불교를 아주 좋아하지 않나?”

“아니, 승려라고 한 뒤 몰래 유학을 이르라는 겁니까?”

“비슷하네.”

“이런.”

의연은 대뜸 합장했다.

그냥 기다렸다.

잠시 후, 고개를 젓더니 한탄하며 말했다.

“소승은 불자입니다. 그래서 늘 당당해야 합니다.”

“오. 묘안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

“있겠지요.”

“음?”

“대인. 묘안이라는 건 잘 떠오르는 게 아닙니다. 이를 찾아낸 뒤 움직이면 남들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게 옳습니다. 먼 길이니 가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겁니다. 소승은 자신이 있습니다. 늘 그래왔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자네는 늘 옳았지. 하면, 언제 떠날 생각인가.”

“지금 당장 가야지요. 소승은 일단 행동해야 합니다.”

“시원시원해서 좋군.”

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네.”

그러자 의연이 구부정하게 멈춰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유학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 되는데 사상적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네. 이를 절대로 빼앗기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는 것일세.”

어느새 의연은 자세를 바로 하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일찍이 공도는 괴력난신을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그랬지.”

“한데, 우리 추모왕께서는 천자(해모수)의 적통입니다.”

“너무나도 옳은 말일세.”

“우리가 천하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입니다.”

“지당한 말일세.”

“나머지는 다 괴력난신입니다.”

“자네는 천재일세.”

논거는 중요하지 않다. 의연이 그렇다면 논거는 만들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의연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소승이 돌아오는 날, 고구려의 건국은 재탄생되어 있을 겁니다.”

“이보게. 말하면서 왜 걷고 있나.”

“바쁩니다. 돌궐이 소승을 부르지 않습니까.”

“하하하!”

이미 의연의 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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