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다가오는 또 다른 세상(3)
112화 다가오는 또 다른 세상(3)
말을 아꼈다.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꺼낼 때가 아니었다. 고양성의 말을 기다려야 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발걸음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이것이었다.
어느새 석양이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늘 그렇듯 평양 도성의 일몰은 참으로 절경이었다. 머릿속을 잔뜩 채운 번뇌를 잠시나마 밀어낼 여유를 가질 때였다.
“대인.”
“······폐하. 어찌 이러시옵니까.”
“아직 오늘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서, 소인은 노비입니다.”
“······.”
잠행이 아름답고 좋은 일로 순탄하게만 진행되었다면 어림도 없다고 하겠으나 애석하게도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고양성의 감정을 맞춰야 할 것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게 할 말이 있느냐?”
“들어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아직 오늘은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말하라. 석양만 해도 생명력이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니까.”
“고구려의 태왕은 죄인입니다.”
“허. 어찌 그토록 참담한 말을 입에 담느냐. 말을 삼가라.”
“아닙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아니, 왕실이 죄인입니다.”
“너는 근거를 확실하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나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팔이 잘려 나간 이가 전쟁을 부르짖는 장면은 내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그동안 그저 가볍게 호전적이라고 여겼던 고구려 백성을 바라보는 생각이 아예 달라졌다.
나쁜 말로 비상식적이었다.
전근대라서 이해해야 한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광기라고 여겨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고통 혹은 통증 혹은 아프다······라는 말을 꺼내지 않는 그가 너무나도 괴이했다.
그리고
“아픈데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나라가 고구려였습니다.”
고양성이 나와 비슷한 말을 꺼냈다. 아니, 어쩌면 그는 나처럼 괴이하다고만 여기는 게 아니라 원인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잘려진 팔을 어찌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프다고······괴롭다고는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네 말이 옳다.”
“그런데 아까 그자는 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분명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나서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할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탓했습니다. 대체 이는 무엇입니까. 아니, 애초에 그가 자신을 질책할 정도로 무능했습니까.”
“아니지.”
“오직 조정과 왕실 아니 고구려의 부름에 창칼로서 화답한 그가 무슨 죄가 있기에 아프다고 말할 수도 없는 나라가 만들어진 겁니까.”
그의 말은
“무려 천 년 동안 말입니다.”
참으로 따가운 성찰이었다.
나는 여전히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고양성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너무나도 궁금했으나 고개를 돌려보지 않았다.
천천히 말을 꺼낼 뿐이었다.
“일찍이 이 대화를 이문진과 나눴고, 태왕 폐하와 나누었다. 나는 이문진에게 의술의 진흥은 모순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반면, 폐하께서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은 없다고 이르셨다. 그러한데, 너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냐.”
“소인은 환상에 빠져 사는 무지렁이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전쟁에 나갈 수 있습니다. 이는 쟁투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 명의 백성을 살리는 길보다는 만 명의 부양할 수 있는 옥토를 빼앗고자 수만 명을 전쟁으로 밀어내는 시대이니 말입니다.”
“······.”
“이러한데 어찌 백성을 부르짖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백성을 위한 정치가 불가능하다는 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진대법? 이는 백성 자체가 아니라 자원의 재분배를 둘러싸고 왕실과 귀족, 귀족과 귀족이 다툰 결과의 산물이 아니었습니까. 이 나라 고구려에 백성, 그 자체를 위한 정치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고 하여 다르지 않다는 걸 소인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고구려의 왕족이 아니라 철저하게 기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노비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토록 신랄한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묻지요. 대인께서는 어찌 이토록 손을 놓고 있습니까.”
대한민국 정부는 군인이 다치면 그의 삶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부족함이 있을 수는 있으나 명제는 그러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이와 같은 수준의 복지를 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다.
고구려에서 무턱대고 고려와 조선 수준의 의료나 사회 복지 시설을 구축할 수는 없다.
애석하게도 복지는 사회 발전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내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은 이와 같은 원론이 아니다.
“일찍이 태왕 폐하께서 내게 이르셨던 내용이다. 하여, 끝없이 고민했고, 의술을 증진하고자 했다.”
대관절 고구려에 가장 부합하는 정책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생산력을 폭증시키는 건 무엇이라도 가져올 수 있으나 복지 정책은 섣불리 손을 댈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내가 이를 외면하는 건 아니었다. 내게는 분명한 책임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저 농업을 입안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부족하여 전통을 부활시켰고, 더 나아가 북방의 패권을 가지고자 했다. 나의 손끝은 이렇게 뻗어나갔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무엇이라고 합니까.”
“전쟁.”
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물론 쟁투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기에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선택한 길이 원 역사에서 치른 수나라와의 전쟁보다 더 많은 피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 당나라와의 전쟁도 막아낼 것이다. 그러니 흐르는 피의 양은 줄어든다.
그런데 다시 언급하지만,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곳의 역사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 늘어난 피의 값은 나의 손끝에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틀리셨습니다.”
고양성은 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를 빤히 쳐다봤다.
“전쟁에서 다치는 건 흔한 일이기에 탓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흔한 일인데 흔히 말하지 못합니다. 대인.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의술을 증진하지 않은 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
그의 손이 끝을 보이는 석양을 가리켰다.
“고구려의 태양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의 태양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며, 누구의 머리 위에 있는 겁니까.”
“······.”
“적어도 아프다는 말이 죄가 되는 세상은 아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옳다.
아픔은 죄가 아니거늘.
“농업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요. 고작 농업이지요. 고작 농업을 입안했을 뿐입니다. 한데,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백성이 이토록 활기차게 움직이며 뛰어다닌 일은 없었습니다. 이토록 간단한 농업 개혁을 하지 못한 나라가 바로 고구려입니다.”
“······.”
너무나도 원론적인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런 감상에 빠질 때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고양성의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막리지.”
태왕이 돌아왔다.
“나는 죄인이오.”
“아니옵니다.”
“들으시오.”
“이르시옵소서.”
“고구려의 왕실이 백성에게 준 것은 지독한 내전과 피 칠갑 된 용상에 불과하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소. ‘고구려’라는 석 자를 심장에 새기라고 말이외다. 하하하. 하늘이 도왔기에 우리 백성은 강인했소.”
고구려의 백성은 상상의 범주에 있는 또 다른 생명체라고 여겨질 정도로 강인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창칼을 휘두르는 그들과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오직 ‘전사’였다.
“우리의 백성은 말이외다.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지 않소. 왜 그러한지 아시오?”
“······.”
“누구도 지키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무려 천년이나.”
“······.”
“우리는 늘 백성에게 희생을 전했을 뿐이오. 이 또한 천년이외다.”
“······.”
“막리지. 우리 그래도 백성이 아프다는 말은 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소?”
“······.”
“아프다. 딱 세 음절이외다.”
“······.”
“오늘 우리 앞에서 울부짖었던 그는 정녕 싸우지 못하기에 그리했을까. 오직 그 이유만 존재했을까. 혹은 싸울 수 없으면 말도 할 수 없는 풍조의 영향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끝없이 어지럽히고 있소.”
지독한 회한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되돌아본다.
고양성이라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고양성은 왕권 강화를 위하고자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농업의 풍요로움에 매료되었다. 고구려의 국세를 지켜 땅을 수호하고자 했다. 종국에는 어떠한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고자 북방의 패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건 바로 이 모든 흐름이 녹여져 있는 것이었다.
바로 백성이었다.
고양성은 고려와 조선의 수준으로 복지를 꾀하고자 한 적이 없었다.
현대국가가 고대사회라고 부르는 이 시절, 이 시대에 가장 걸맞은 복지를 추구하고 있었다.
바로 외세의 공격으로 백성의 팔다리가 잘리지 않는 나라, 전쟁의 패배로 백성이 타국의 노예가 되지 않는 강력한 나라.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복지였다.
고양성은 줄기차게 이를 꾀하였다.
내가 이를 몰랐을 뿐이다.
단지 쟁투로만 바라봤던 것이 실은 복지였다는 사실을.
해서, 이 나라 고구려의 발걸음이 나와 묘하게 삐걱거렸다.
이미 고구려는 복지의 길을 걸어가는데, 나는 성장만을 바라보며 천년 뒤의 복지를 상상하느라 숨이 턱턱 막혔을 뿐이다.
“막리지.”
“예. 폐하.”
“고구려는 북방의 패권을 가질 것이외다. 그러나 나는 가지지 않아도 되오.”
“······.”
“어떻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오?”
“······.”
“내가 과한 욕심을 내는 것이오?”
더는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고민이 끝났다.
아니, 지난날 고양성과 나눈 대화로 원론은 동의한 바가 있다. 원 역사는 허구라는 걸 내가 뒤늦게 깨닫게 되면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역사의 발전성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하여, 구체적인 실무적 고민이 말끔하게 해소됐다.
지금, 이 시절 할 수 있는 복지를 해결하면 되는 것이었다.
“신이 해내겠사옵니다.”
“어찌해낼 수 있소.”
“천하에서 가장 ‘건강’한 나라로 만들어보겠사옵니다.”
“건강한 나라라고 하였소?”
“단지, 굶지 않는 백성의 수와 의술을 비례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옵니다.”
나는 무턱대고 백성에게 수명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어떤 병마를 백성에게 죽음을 요구하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집중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낼 것이옵니다. 아니, 아플 때 ‘아프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벌하는 나라로 만들어낼 것이옵니다.”
아픈 것이 죄가 아닌 나라.
아프다고 하여 내일이 박탈당하지 않는 나라.
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 나라 고구려에서 가장 많은 백성을 아프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전쟁이 만들어 내는 고통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말했다.
“외상(外傷)을 고치는 의술을 천하제일로 만들어 낼 것이옵니다.”
단지 의술만이 아니라 외상에 모든 걸 집중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절 고구려에 가장 적합한 복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