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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11화 (111/199)

111화 다가오는 또 다른 세상(2)

111화 다가오는 또 다른 세상(2)

듬직한 노비를 데리고 다녀서 그런지 평소보다 많은 이들이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왕 대인. 못 보던 사람이군요.”

사실 남루하게 분장하긴 했으니 고양성은 기본적으로 기골이 장대한 무장형이었다. 눈에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노비일세.”

“허. 노비입니까?”

“딱 봐도 노비가 아닌가.”

“노비 주제에 참으로 기골이 장대하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한다네.”

주거니 받거니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고양성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서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우리 노비에게 살길을 열어줄까 싶네. 혹시 적당하게 일할 만한 자리가 있겠나?”

“음. 설마 노비 신분을 걷어주시는 겁니까?”

“그럴까 싶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개간하느라 귀족들이 혈안이 되었는데 노비를 놓아주시다니요. 과연 왕 대인이십니다.”

“하하하! 내가 원래 좀 자비롭지.”

“하하하. 물론이지요.”

백성들은 고양성을 지그시 쳐다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친위대 지원하면 좋을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유생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일자무식인데 유학은 아니지요. 친위대가 맞습니다.”

아. 친위대.

그건 좀 식상 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우리 노비가 덩치는 황소만 한데 아주 겁이 많다네. 그래서 친위대는 좀 어려울 것일세.”

“허. 고구려의 남아로서 친위대보다 더 한 영광이 없건만.”

“응당 창칼을 들고 돌진해야 하거늘 몸을 사린다는 말인가?”

“친위대가 되면 일가를 건사할 수 있는데 도전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건 대체 뭔가?”

모두 한탄하며 고양성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이 폭발하듯 빨갛게 되는 건 나와 관련이 없었다. 원하던 대로 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신이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말고 평화로운 일은 없겠나?”

“듣자니 제지술도 알려준다더군요.”

“아. 그렇지. 그거 내가 추진했네.”

“역시 왕 대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하하! 괜히 민망하군. 한데, 제지술을 익히면 좀 나은가?”

“대인. 제지술을 익힐 수 있으면 장인이 되는 겁니다. 사실 이게 제일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대대로 먹고 살길이 열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된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특히 일국의 문화력과 직결하는 제지술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번에 나는 단지 종이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아예 기술의 전파를 결정했기에 의지가 있는 이들은 모두 장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욱이 가업이 계승되는 시절이었기에 대대손손 제지술로 먹고살 수 있게 된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안의 가시와도 같은 걸 슬쩍 꺼내 봤다.

“양잠업도 나쁘지 않던데?”

“비단은 좋지요. 그런데 양잠업은 아주 해롭습니다.”

“음. 그런가?”

“대인. 괜히 양잠업을 입에 담았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조심하십시오.”

역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고구려 여인을 감당한다는 건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양잠업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도 경작에 나서는 게 제일 무난하긴 하지요.”

“농기구를 구하는 게 문제이긴 한데, 철광에서 농기구를 대여해준다고 하니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최근 철광을 크게 열었습니다. 일단 농기구를 내어준 뒤 나중에 수확하여 갚을 수 있게 한다고 하였으니 무난하게 경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슬쩍 눈길을 돌려 고양성을 쳐다봤다. 여전히 분기탱천한 듯 얼굴이 붉었으나 무언가 복잡한 표정이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토록 생기 넘치는 백성의 삶을 바라보는 태왕의 심장이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저 신분이 노비라서 울고 싶을 뿐일 것이다. 적어도 노비가 함부로 입을 댈 자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무조건 그랬다.

“그나저나 대인.”

“왜 그러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우 옆에 전우인 나라였기에 어떤 청을 할 때 주저함이 없었다. 내가 막리지라는 건 위계를 세울 때나 중요할 뿐, 지금처럼 길 가다가 만난 사람에게 꺼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말이 들렸다.

“친위대를 모아내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음?”

“그게 말입니다······.”

청탁이 아니라 민심의 흐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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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었다.

발걸음이 참으로 무거웠다.

천근만근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무거웠다.

한참을 걸어갈 동안 나와 고양성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한결 나아질 것 같았으나 감히 그리할 수 없었다. 나도 그러했고, 고양성도 그러했다. 아니, 내가 그러했다.

우리의 걸음은 어느새 평양 도성 외곽의 허름한 민가 앞에서 멈췄다.

고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끼던 도성의 생기는 흔적도 없었다. 최근 집마다 보이는 뽕나무도 없었고, 눈을 부라리는 여인들의 정겨운 장면도 볼 수 없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러나

“누구십니까······.”

분명 사람은 살았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던 문이 열리며 병색이 완연한 남자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

“······.”

나와 고양성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감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한쪽 팔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천적인 게 아니었다. 단지 문만 열었는데도 후각을 통해 전해지는 피 냄새의 진동과 시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름은 이 사람의 팔이 비교적 최근에 절단되었다는 걸 알게 했다.

고통이 강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야가 흐렸기 때문일까.

한참이나 미간을 찌푸리며 흐릿한 눈으로 우리는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 왕 대인께서 어찌 오셨습니까.”

“······.”

“이, 이런. 소인이 경황이 없었습니다. 잠시 들어오시겠습니까. 아니군요. 너무 누추하니 소인이 나가겠습니다.”

“되었네. 그대로 있게.”

“아닙니다.”

그는 허둥지둥거리며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제대로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은 괜히 화가 치밀어 오르게 했다.

“내 말을 듣지 못했나? 그냥 편히 있네. 내가 들어갈 것이니까.”

“소, 송구합니다.”

“뭐가 또 송구하나.”

“하하하.”

나는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고양성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방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아니, 다른 걸 떠나서 아예 환기 자체가 안된 상태였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문이라도 좀 열게.”

“하하하. 대인. 몸이 상해서 그런지 추위를 참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땔감을 허비할 수도 없으니 문이라도 꽉 닫아둬야지요.”

이 시절 백성은 온돌을 사용했다. 반면, 귀족은 화로를 사용하는 문화였다. 무엇이 더 효과가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현실이 이러할 뿐이었다.

“땔감을 구하기 어렵나?”

“쉽지는 않습니다. 모두 땔감이 필요하니 경쟁하듯 구하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산이나 들어갈 수는 없지요. 귀족의 소유이니 허가 없이 땔감을 구하려고 했다가는 험한 꼴을 당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한숨만 절로 나오는 형편이었다.

나는 말을 아끼며 시선을 돌렸다.

“팔은 좀 괜찮은가.”

“남들은 안 죽은 게 다행이라고 하지요.”

“자네는 아니라는 건가?”

“하하하. 대인. 팔이 하나가 없습니다. 하면, 소인은 뭘 할 수 있습니까.”

“왜 할 게 없나. 얼마든지 찾을 수 있네.”

“하하하!”

원래도 자주 웃었는데 지금 보이는 웃음은 무언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허탈함까지 보태져서 처량해 보이기도 했다.

“소인이 출병할 수 있습니까?”

“뭐······?”

“약탈도 할 수 없습니다. 말도 못 탑니다. 활을 들 수가 없지요. 한데, 무엇을 할 수가 있습니까.”

“이보게.”

“흐······.”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평생 배운 건 싸우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팔이 없어서 허무한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사라졌다는 게 고통스럽습니다. 대인. 소인은 이제 어찌 살아야 합니까?”

그는

“소인은 이제 싸울 수 없지 않습니까.”

기어이

“차라리 죽었어야 합니다.”

울었다.

“소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이는

“하루가 고통스럽습니다.”

거대한 국가와 대업에 매몰된 개인의 세계였다.

아니,

“싸울 수 없는 소인을 바라보지 않는 전우들이 원망스럽지 않습니다. 모두 소인의 탓이니 말입니다.”

나의 오판이었다.

백성을 장기판의 말로 바라본 나의 악행이 만든 결과였다.

그는 홀로 오열했다.

진정으로 육신의 일부가 사라진 것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괴로운 것만 같았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네. 내가 나서보겠네.”

“하하하. 대인.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놈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농사는 어디 쉽습니까. 아니지요. 소인이 할 수 있는 건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겁니다.”

“자네 대체······.”

그때

“대인.”

고양성이 나섰다.

“병자는 쉴 시간이 필요할 듯합니다. 이만 물러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

“지금 병자에게 필요한 건 내일 무엇을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지금 먹을 약재가 아니겠습니까. 우선 고통부터 해결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만.”

“하하하! 아닐세. 나는 괜찮네. 나는······.”

대뜸 그가 다시 외쳤다.

“싸우지 못하여 슬플 뿐일세. 이깟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라네.”

그러나 그의 눈물은 조금 전과는 무언가 달라진 것만 같았다.

“고구려의 남아로서 싸우지 못하여 슬픈 것일세.”

“아프지 않습니까.”

“팔다리가 다치는 건 언제라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프지 않습니까.”

“······.”

“고구려의 남아는 고통도 참아야 합니까.”

“······.”

“아프지 않습니까.”

고양성이 몇 번이나 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아프지······.”

그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말이 나왔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 아파서 오늘 이대로 눈을 감고 싶을 뿐이네.”

“······.”

“그러나 내가 괴로운 건 오직······.”

“알겠습니다. 더는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내로 왕 대인께서 의원과 약재를 보낼 겁니다. 그러니 편히 쉬세요.”

“······.”

고양성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 순간, 나는 깨달았다.

미세하게나마.

나의 정책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게 된 것이다.

기록에 남을 수 없는 절대다수를 말살하는 정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약재를 먹고 다시 전장에 나서겠습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하여

“하하하! 고구려의 남아라면 응당 그리해야지요.”

전통을 부활시켰던 것인가.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하여

“하하하! 바로 이거지요. 다시 숨을 쉬는 것만 같습니다.”

패권을 꾀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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