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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99화 (99/199)

99화 신라를 위한 변명(4)

99화 신라를 위한 변명(4)

여기 ‘신라’라는 두 글자가 있다.

남들처럼 고귀한 시작은 아니었다.

시작부터 위대한 정통성을 가진 건 아니었다.

위태로웠다.

부족했다.

어려웠다.

나약했다.

지금 이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진실로 모를 수가 없었다.

신라의 건국은 실로 부실했기 때문이었다.

국조 박혁거세는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일국을 세우기 위한 쟁투를 펼치지 않았다. 그저 태어났기에 육부조의 추대로 왕이 되었을 뿐이었다.

하여, 신라의 시작은 쟁투의 기록이 없다.

그는 왕비를 간택할 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여, 건국의 치세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박혁거세.

그는 건국부터 치세까지 홀로 이뤄낸 게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주변의 도움······아니, 결정에 따르듯 고개나 끄덕인 게 전부였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진실로 태어났고 숨을 쉬었으며 고개를 끄덕인 게 전부였다.

신라의 건국은 오직 이러했다.

하여, 신라의 건국에는 서사가 없었다.

탄생부터 건국까지 이야기는 있으나 위대한 서사가 없었다.

이를 모르는 신라인은 없다.

신라의 시작은 부족하였다는 걸 말이다.

홀로 나아가지 못한 시작.

남의 손으로 도모하였던 건국.

신라사의 첫 장은 이렇게 기록만 있을 뿐, 그 어떤 감동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여긴 건 아니었다.

절대로.

과거 신라인 중 누구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하늘 아래 모든 나라가 그러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니,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고귀하다고 여겼다.

유력가들을 움켜쥔 탄생.

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성장.

피를 흘리지 않은 추대와 즉위 그리고 건국.

이보다 훌륭할 수는 없었다.

분명 만족했다.

차고 넘쳤으니까.

탁월한 건국의 역사가 뒷받침했기 때문일까?

신라의 국세는 점차 팽창했다.

남부러울 게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만나게 되었다.

고구려를.

그들을 알면서 신라의 세계는 확장됐다.

고구려는 대국이었다.

수만의 대병을 동원하며 천하와 싸우며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구려가 가진 절정의 국력을 동경했다. 멍하게 그저 바라만 보다가 결심했다. 언제고 고구려와 같은 곳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겠노라고.

하여, 배웠고, 익혔으며, 탐하였다.

그렇게 알게 되었다.

고구려의 건국은 영웅의 서사가 있다는걸.

추모왕이 세력을 일궈 남하하여 건국을 주도했다. 심지어 쟁투로서 영토까지 확장했다.

신라의 건국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주체적인 영웅의 대서사시가 고구려에 있었다.

세계는 확장됐다.

백제가 보였다.

그들의 건국을 보았다.

온조왕도 남하하여 일국을 세웠고, 쟁투의 역사가 있었다. 그들의 건국도 대서사시였다.

세계가 더는 확장되어서는 곤란했다. 더는 초라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동방의 구성원이 되었기에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가야조차도 김수로가 건국을 주도하는 쟁투의 기록이 있다는 걸 깨우치게 되었다.

동방에서 오직 신라만이 서사가 없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신라의 건국은 위대하고 고귀한 게 아니라 수동적인 타협의 결과물이라는 걸 말이다.

얼마나 큰 착각 속에 살아왔는지 무려 수백 년 만에 알게 되었다.

고통에 몸부림쳤다.

진실을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건국을 뜯어고칠 수는 없었다.

해서, 선택했다.

뜯어고칠 수 없다면 박탈하기로 했다.

비루한 시작을 새로운 시작으로 덮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김 씨의 나라가 탄생했다.

오롯이 김 씨가 왕이 되는 나라였다.

합의와 추대로 박 씨, 석 씨, 김 씨가 사이좋게 왕을 나누는 비루한 나라가 아니라 오롯이 김 씨의 나라로 만들었다.

박 씨가 서사를 남기지 못했다면 새로운 건국으로 김 씨의 서사를 적어 내리면 되는 것이다.

과거를 지울 수는 없으나, 오늘부터 새 역사는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서사의 시작은 고구려와 단절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보살핌과 배려로 왕이 된 박 씨와는 달리 김 씨의 건국은 동방의 패권을 가진 고구려와 결사의 자세로 싸우는 당찬 신라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너무나도 강대했다. 감히 마주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강성했다.

그래서 서사를 미뤘다.

아직은 때가 아니기에 잠시 미뤘다.

내일이 되었으나 다시 미뤘고, 다시 하루가 지났으나 또 미뤘다.

계속 미뤄졌다.

그때 신라의 눈에 홀로 기어이 고구려와 싸우는 백제가 보였다.

멍하니 바라만 봤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백제는 고구려를 위협할 수 있는 동방의 유일한 왕조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대서사시를 가진 나라는 저토록 강성할 수밖에 없다는걸.

그래서 백제와 손을 잡았다.

그들의 뒤에서 고구려와 싸웠다.

나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뒤에 서 있는 것이니까.

싸우는 건 오직 백제이니 말이다.

백제는 참으로 대단했다.

비록 패할지라도 일방적이지 않았다.

고구려도 숨을 고르며 움직였다.

늘 거칠 것 없던 고구려가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시기했다.

고구려의 눈에는 오직 백제만 보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도했다.

안전하기에.

그런데 백제의 왕이 죽었다.

그토록 강성하였는데 전쟁에서 패하자 왕이 죽었다.

반면, 고구려의 국세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신라는 이 모든 상황의 이면을 봤다.

일시적인 승리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보았다.

과거 백제는 고구려의 왕을 죽이며 최고의 성세를 자랑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기어이 부활하여 백제의 왕을 죽였다.

백제 그리고 고구려.

양국의 쟁투는 영원한 승리가 아니라 일시적인 승리로 귀결될 뿐이었다.

이는 서사의 완성이 아니었다.

그저 이어질 뿐이었다.

서사의 완성은 일시적인 승리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였다. 고작 상대의 왕을 죽이는 게 아니라 멸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잠시 고개를 숙일지라도 칼을 숨기고 갈아 기어이 찌를 것이니 어찌 서사가 완성되겠는가.

신라는 이를 보게 되었다.

이렇게 깨닫게 되었다.

잠시의 수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말이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 잠시 고개를 숙이는 건 백 번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알게 되었다.

왕이 죽었으나 고구려가 일어났다.

백제도 왕이 죽었으나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어찌 가능한 것인가.

이는 그들을 묶어내는 서사가 있기에 그러했다.

그러나 신라는 아니었다.

위대한 영웅의 대서사시가 아직 없었다.

건국은 비루하였고, 오늘의 역사도 눈치나 살피고 있었다. 치열한 쟁투의 역사가 지속하였으나 여전히 주역은 아니었다. 이러할 때 왕이 죽는다는 건 모든 게 종결되는 걸 의미했다.

단 한 글자의 서사도 가지지 못한 스쳐 지나가는 나라가 될 뿐이었다.

김수로의 서사를 가진 가야도 그러한데 신라라고 다르겠는가.

무릇, 강대한 적에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할 사람은 마지막까지 살아야 했다.

신라의 역사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사람을 향하여 왕이라고 불렀다.

하여, 신라의 국시는 오직 ‘생존’이 되었다.

왕과 백성이 오직 신라의 생존을 위하여 살았다.

그들 모두가 대서사시의 주역으로 거듭났다.

한 명의 목숨이 한 글자였으며, 백만의 목숨이 서사의 정점일 것이다.

이렇게 신라는 변모했다.

오직 강해지고자 지독하게 노력했다.

이후, 영웅의 대서사시를 가진 백제가 기어이 부흥의 날개를 펼치자 신라는 다가갔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쟁투의 중심지에 도달했다. 두 발로 밟은 그 땅은 너무나도 비옥했으며,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은 위용을 보였다.

그랬다.

신라는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기어이 쟁투의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백제의 왕을 죽였다.

이를 악물고 죽이지 않았다.

희열에 차서 죽였다.

기뻐 웃으며 죽였다.

환호하며 죽였다.

신라가 백제의 왕을 죽였다.

이는 신라가 백제의 위치를 가지는 것이기에 황홀했다. 고작 한수를 탐하고자 100년의 동맹을 끊어낸 것이 아니다. 백제를 치워야만 그 위치에 앉을 수 있기에 그러했다.

만인이 질타하듯 고작 땅을 탐하여 동맹을 끊어낼 만큼 생각이 없지 않았다.

신라가 바라본 건 오직 위치였다.

고구려와 홀로 싸울 수 있는 바로 그 자리였다.

신라의 심장이 이러한 서사를 원한 것이다.

신라.

그랬다.

실은 고구려를 연모했다.

그 강대함과 오만함을 탐하였다.

추모왕의 서사를 바라보며 열광하지 않았던가.

부여에서 탈출하여 기어이 일국을 세워내는 영웅의 대서사시는 너무나도 탐나는 것이었다.

보라, 위대한 서사가 어찌 이어졌던가. 고구려는 기어이 부여까지 도모하며 포효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신라도 고구려의 힘을 빌려 성장했고, 멸하고자 할 뿐이었다.

영원히 서사를 홀로 곱씹을 뿐이었다.

이렇게 신라의 세계는 최대치로 확장됐다.

백제의 위치를 뺏었고, 고구려의 위치까지 탐하게 되었으니 더는 거칠 게 없었다.

오직 서토를 바라보며 강렬하게 요구했다.

아니, 부르짖었다.

우리의 서사에 등장해달라고.

당신들이 필요하노라고.

서사의 완성에 그들은 꼭 필요했다.

그래서 갈망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신라사는 곧 배신과 직결한다고.

신라사는 신의를 찾아볼 수 없다고.

듣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왜? 그들은 모두 패자였기 때문이었다.

패하여 창칼을 거두면서 그저 세 치 혀를 움직일 뿐이었다.

대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가.

고구려의 왕이 망국의 위기에서 구해주었다고 하여 영원히 고구려의 속국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백제와 동맹이라고 하여 영원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짧은 강성함에 기대어 오만하게 힘을 나눠준 무리가 어리석은 것이다. 숨통을 끊지 않고 그저 짓밟으며 웃은 이들이 무지한 것이다.

결국, 쟁투의 역사가 누구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던가. 천하가 비웃었던 약소국 신라가 당당하게 포효하고 있지 않은가.

일국의 역사는 천년이다.

역사의 승리는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하여, 말할 수 있었다.

신라가 이기고 있노라고.

김 씨의 서사는 완성되어 가고 있노라고.

그래서 오늘도 아니, 이 순간에도 생존을 위하여

“항복하겠소.”

최선을 다했다.

지척에 이른 고흘의 칼을 멈추기 위해서.

이미 퇴로를 차단되었다.

1만의 대병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기어이 죽음을 각오하겠다던 김후직은 대패했다.

김백정은 당당했다.

그래서 다시 말할 수 있었다.

“항복할 것이외다.”

진심이었다.

신라의 군주로서 지켜야 할 책무를 다해야 하기에.

“태왕 폐하께 죄를 청할 것이오.”

이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신라의 역사를 이어가는 위대한 결정이다.

옳다.

가장 중요한 건 최후의 승리이니 말이다.

대서사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의 굴욕도 위대한 승리로 가는 하나의 여정에 불과할 것이다.

아직 신라는 존속하니 말이다.

이 또한 서사의 일부가 될 것이다.

하여, 신라의 국시는 생존이었다.

하여, 신라의 국시는 존재였다.

하여, 신라는 끝없이 버텨왔다.

그러나 신라는 여전히 모르고 있다.

그들의 역사는 서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서사의 필수요소인 위대함이 단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존은 그저 기록일 뿐, 어떠한 경우라도 서사가 될 수 없다는 걸 말이다.

하여, 생존은 국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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